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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치의학전문대학원 이공계 재앙인가?

풍월 사선암 2008. 12. 24. 14:10

의·치의학전문대학원 이공계 재앙인가?

기초의학 수준 높일 수 있는 기회 만들어야 

이준덕 기자 ㆍcyrix99@donga.com 

 

최근 많은 대학이 의·치의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하면서 이공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의대나 치대 모집정원이 줄어, 4년 뒤 전문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생명공학과나 화학과 같은 자연계 학과에 몰리고 있는 것. 이런 연쇄반응 때문에 이공계가 재앙에 빠진 걸까. 요즘 대학에는 기업 맞춤형 강의는 물론 장학금을 제공하고 졸업 후 취업을 보장하는 학과 열풍이 불고 있다. 아는 만큼 알짜 학과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이공계 지각변동 속에서 뜨는 학과를 잡아보자.


사례 1

이번에 수능을 본 서울 K고 최 모군은 울상이다. 의대를 지망하지만 절반 이상의 의학부가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되며 모집 인원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사례 2

S대 생명과학과에 재학 중인 박 모씨는 요즘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한 뒤 유학을 가고 싶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다. 결국 박 씨는 부모님 뜻을 따라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사례 3

대기업에 다니는 이공계 출신 직장인 김 모씨는 회사에서 퇴근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3시까지 의·치의학입시전문학원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동영상 강의로 공부한다. 김 씨는 지금 당장은 고생스러워도 10년 뒤 ‘의사’라는 안정된 미래를 생각하며 새벽 늦게까지 공부한다.


지난 2005년 시작된 의·치의학전문대학원이 이공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의학전문대학원 모집 인원이 점점 늘며 의대를 지망하던 고3 상위권 수험생들은 의학부와 전문대학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공계 출신 ‘공돌이’와 ‘예비 과학자’들의 ‘의학전문대학원 러시’도 시작됐다. 의·치의학입시전문학원이 몰려있는 역삼동과 서초동 학원가는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전문대학원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넘쳐난다. 이공계 학생에게 새로운 진로를 마련해주고 다양한 전공 출신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도입된 전문대학원 제도가 이공계 기피와 같은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의·치의학전문대학원은 과연 이공계의 축복일까, 재앙일까.


생물학과, 화학과에 지원자 몰릴 가능성 커

의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된 뒤 의학부 모집인원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보건복지가족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문대학원 체제가 도입되기 전인 2004년에는 전국 의대에서 3097명, 치대에서는 75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올해는 전국 의대 41개 중 27개 대학에서 1427명을 모집하며, 치의학부는 3개 대학에서 210명을 모집한다. 이번에 수능을 치른 학생들이 의학부나 치의학부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그만큼 좁아진 셈이다. 게다가 학부 신입생을 모집하는 27개 의대 중 의학전문대학원을 병행 운영하는 13곳도 점차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할 계획이기 때문에 앞으로 의학부 모집 인원은 더 줄어들 전망이다.


높은 경쟁률 때문에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자연계 상위권 수험생 대부분은 ‘울며 겨자 먹기’로 4년 뒤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결국 수험생들은 의·치의학교육입문검사(MEET&DEET)를 준비하는 데 유리한 생명공학부나 생물학과, 화학과 등 기초과학 학과에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에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이 모군(경기 안산 D고)은 “의학부 모집 정원이 줄어들어 지원하기가 부담스럽다”며 “가, 나, 다군 중 한군데만 의학부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생물학과나 화학과,생명과학과 같은 의학전문대학원 관련 학과에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올해 고려대 생명공학부는 수시 2학기 입시에서 29.7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런 현상은 2005년 의·치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되며 이미 예견됐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서상기 의원(한나라당)이 지난 10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은 ‘치의학 전문대학원 재학생 출신학과 현황’자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진학한 학생 1410명 가운데 이공계 출신이 80%를 차지했다. 생물학, 화학 등 기초과학 출신이 653명으로 46%, 공대 출신 학생이 484명으로 34%였다.


많은 학생들이 의학전문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해 기초과학 학과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연세대 생물학과 김응빈 교수는 “생명시스템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의 절반 이상이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다”며 “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생물학이나 미생물학 같은 과목을 재수강하거나 청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고3 학생들의 혼란이 가중되며 대학들은 발 빠르게 ‘상위권 학생 잡기’에 나섰다. 전문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한 *프리메디 학과와 자유전공 학과를 편성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건국대(특성화학부), 경북대, 경희대(동서의과학부), 숭실대(프리메디 이공계 자유전공), 원광대, 인하대(기초의과학부), 한양대 등에서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는 자유전공 학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고려대, 덕성여대, 영남대, 이화여대, 조선대 등이 2009학년도부터 전문대학원 관련 학과를 운영할 예정이다.

 

의학전문대학원 경쟁률 다소 낮아져

의학부 모집정원은 줄어든 반면 전문대학원 모집정원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 2005년 4개 학교에서 159명을 모집했던 의학전문대학원은 올해 27개 대학에서 총 1641명을 모집해 10배 이상 규모가 커졌다. 치의학전문대학원도 2005년 5개 학교에서 340명을 모집했지만 올해는 8개 학교에서 530명을 모집한다.


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MEET&DEET를 치르는 학생도 크게 늘었다. 2005년 시행된 제 1회 시험에는 총 2496명의 수험생이 지원했지만 2008년 제 4회 시험에는 총 6181명, 지난 8월에 있었던 제 5회 시험에는 모두 8590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의학 계열이 3.75:1(6164명 지원), 치의학 계열이 4.57:1(2426명 지원)을 기록했다.


이처럼 많은 수험생이 몰린 이유는 올해 가톨릭대, 고려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수도권 소재 주요 의대들이 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해 첫 신입생을 모집하기 때문이다. 의·치의학입시전문학원인 PMS 김정현 원장은 “절반 이상의 대학이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며 모집정원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며 “많은 수험생이 몰렸지만 모집정원이 증가해 올해 전문대학원 경쟁률은 지난해보다 다소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의학부와 의학전문대학원이 다른 점은 뭘까. 의학부나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면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같지만 도입 취지나 학업 과정에는 차이가 있다. 전문대학원은 학부 전공에 제한을 두지 않고 폭 넓은 의학 전(前) 교육 과정을 거친 다양한 전공 출신의 의사와 의과학자, 기초의학 연구자를 양성하기 위해 도입됐다.


의학부에서는 2년 동안 예과 과정을 마친 뒤 4년 동안 본과 과정을 이수하면 의학사 학위가 수여된다. 하지만 전문대학원 체제는 예과 2년 과정을 학부 4년으로 대체하고 본과 4년 과정을 전문대학원에서 4년 동안 배운 뒤 졸업하면 의무석사 학위가 수여된다. 전문대학원 졸업자도 의학부 졸업자와 마찬가지로 인턴과 레지던트 같은 수련의 과정은 별도로 거쳐야 한다.

 

이공계 ‘두뇌유출’ 위기?

졸업생 중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학생 비율이 가장 높은 대학은 어딜까. 지난 10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김영진 의원(민주당)은 국정감사에서 “전체 대학 중에서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비율이 KAIST가 3.2%로 가장 높다”고 밝혔다.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한 학생까지 포함하면 KAIST 졸업생 2150명 중 총 166명(7.73%)이 의·치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매년 졸업생 100명 중 8명이 ‘의사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기초과학이나 공학을 공부한 학생들이 왜 의학전문대학원에 몰릴까. 우선 경기 침체로 학생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졌기 때문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설재홍 교수는 “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되며 생명과학부는 의사를 배출하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며 “전문대학원에 지원하기 위해 교수추천서를 받으러 온 학생들과 상담해보면 많은 학생들이 기초과학을 공부해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의과대 신희영 교무부학장도 “지금까지 한국의 산업을 이끌어 온 인물은 IT, 자동차, 반도체 같은 이공계 출신”이라며 “이공계의 ‘브레인’들이 모두 의사가 되기 위해 몰려온다면 10년, 20년 뒤 국가경쟁력이 뒤쳐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공계 학생이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이 꼭 이공계 위기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 기초과학 분야에 필요한 인원보다 더 많은 수의 인원이 공급된 측면이 있어 자연스럽게 조정되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한국의 의사 1인당 인구 수는 530명(2007년 기준)으로 여전히 선진국 수준(300명 미만)에 크게 못 미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기초의학 분야가 뒤떨어져 대부분의 의료 지식과 기술을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KAIST 생명과학과 정종경 교수는 “그동안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자는 많이 배출됐지만 아직까지 의사나 기초의학 분야 연구자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라며 “이공계 학생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면서 BT 산업에 필요한 기초의학 연구자나 의과학자를 양성할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숭실대 생명정보학과 임동빈 교수도 “우수한 성적의 학생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이공계에 위기가 오거나 학문이 고사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며 ‘사이언스’나 ‘셀’ 같은 학술지에 좋은 논문을 내는 학생은 성적이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흥미를 느껴 연구에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양한 의과학자와 기초의학 연구자 배출해야

문제는 의학전문대학원이 본래의 취지처럼 다양한 전공을 가진 의사와 의과학자, 기초의학 연구자를 배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있다. 지금처럼 우수한 학생이 의대를 졸업한 뒤 모두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되는 일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인 셈이다. 서울대 의대 신희영 교무부학장은 “의학전문대학원 4년 과정을 졸업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며 “등록금이 1억 원 가까이 들어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지 않고 보수가 적은 의과학 분야나 기초의학 분야가 학생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는 *M.D.-Ph.D. 복합학위 과정으로 매년 33개 의대에서 900여명의 복합학위과정 학생에게 국비로 장학금을 수여한다. 나머지 다른 대학도 복합학위 과정 학생에게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급해 의과학자나 기초의학 연구자를 지원한다. 미국은 이미 40년 전부터 이 제도를 시작해 1만 5000여 명의 의과학자를 키워냈고, 199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휴스턴 텍사스대 페리드 뮤라드 교수를 비롯해 수많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미국이 현재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연구 분야를 주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부산대, 성균관대를 포함해 몇몇 전문대학원을 제외하고는 복합학위 과정을 도입한 대학이 없다. 2009학년도에는 8개 대학에서 약 30명 정도를 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프리메디*

프리메디컬 에듀케이션(Pre-Medical Education)의 줄임말로 의학부 예과과정(2년) 대신 학생들은 다양한 전공의 학부과정(4년)을 배운다.


의·치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의 통과의례 ‘MEET&DEET’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듯 의·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의·치의학교육입문검사(MEET&DEET)를 치러야 한다. PMS 김정현 원장은 “MEET&DEET는 전문대학원 당락을 결정짓는 가장 큰 전형요소로 기초 자연과학 과목들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MEET&DEET는 대입수능시험 출제를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한다.


MEET&DEET는 언어추론 40문항, 자연과학추론I 40문항, 자연과학추론II 45문항을 포함해 총 125문항으로 구성된다. 언어추론은 수능 언어영역과 동일한 형식으로 출제되며 문학, 비(非)문학 등 다양한 종류의 지문을 제시한 뒤 문장 이해력과 추리 능력을 평가한다. 자연과학추론I은 일반생물학 40문항으로 구성되며, 언어추론을 제외한 기초 자연과학 과목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연과학추론 II는 일반화학, 유기화학, 일반물리학, 통계학으로 구성되며 각 과목별로 문항수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MEET&DEET는 매년 8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서울, 부산, 대구, 전주, 청주 등 전국 5개 권역에서 동시에 시행된다.

 


의·치의학전문대학원 입시에는 학부성적과 선수과목, 공인영어 성적도 반영한다. 학부성적을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 GPA는 다른 전형요소와 비교했을 때 당락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김 원장은 “지원자들의 평균 GPA는 80점대 후반에서 90점대 초반으로 높은 편”이라며 “특히 수시모집의 경우 MEET의 반영 비율이 정시모집보다 낮기 때문에 GPA가 낮으면 합격 가능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학부제에서 전문대학원 체제로 바뀌면서 기존의 예과 과정에서 이수했던 인문사회, 자연과학 분야의 기본 지식을 선수과목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생물학 및 화학계열에서 6학점, 물리학 및 수학계열에서 3학점 이상을 이수하면 어느 대학원이나 선수과목 이수 제한 없이 지원할 수 있다. 선수과목을 수강하지 못하고 졸업한 경우 학점은행제나 시간제등록제로 선수과목을 이수할 수 있다.


영어능력 또한 주요 전형요소로서 당락에 영향을 미친다. 영어능력은 대부분 토익(TOEIC)이나 토플(TOEFL), 텝스(TEPS)와 같은 공인영어 성적을 반영하지만 경희대처럼 자체 시험을 보는 곳도 있다.


M.D.-Ph.D. 복합학위 과정*

기초의학 과정을 마친 뒤 박사과정을 거치고 다시 임상의학 과정을 공부해 졸업과 동시에 의사자격(MD)과 이학박사 학위(Ph.D.)를 함께 수여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과학자인 인재를 양성해 의과학 분야의 전문인을 배출하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