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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대회 우승만 4회 전업주부 박춘록 씨

풍월 사선암 2008. 12. 22. 08:05

[조선인터뷰] "신문 쌓아놓고 대회 때마다 복습… 남이 버린 책까지 닥치는 대로 읽어요"

퀴즈대회 우승만 4회 전업주부 박춘록 씨

"우승후 눈물 흘린 분은 친정 어머니 아닌 시어머니

가난 때문에 산업체高 졸업… 배움에 갈증 느껴

새로운 지식 알게 될 때의 쾌감, 비교할 데 없어

자격증 5개… 직접 롤러 몰며 도로 포장 하기도"

청주=김윤덕 기자 sion@chosun.com 

 

드디어 마지막 문제. '한국 근대희곡으로… 유치진의 첫 작품은?'


'근대희곡'이란 말이 나오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게 '이제 끝났다'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말 찬스를 썼다. '움막집'. 순간 번개처럼 스쳐가던 단어 '토막(土幕)'.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났다. 한국근대연극 100주년이라면서 문화면에 소개됐던 유치진의 희곡 '토막'. 과연 정답이었다.


박춘록(40)씨가 '퀴즈영웅'으로 등극한 순간은 이렇듯 극적이었다. 지난해부터 퀴즈대회 우승만 벌써 4번째. '우리말 겨루기'(2007년 1월), '우리말 겨루기 왕중왕전'(2007년 12월), '우주인 서포터스 선발퀴즈쇼'(2008년 2월)에 이어 21일 방영된 KBS '퀴즈 대한민국'에서 우승하며 상금 4900만원을 거머쥐었다.


“신문 안 읽었으면 퀴즈영웅 어림없었죠.”언제나 밝은 표정의 박춘록씨는“공부 잘하 던 딸을 못 가르쳐 평생 미안해하시는 친정엄마에게 큰 효도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19일 청주시 모충동으로 박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입구에 걸린 플래카드 '축! 퀴즈영웅 탄생'이었다. 현관에 들어섰을 땐 천장까지 쌓인 신문 더미가 손님을 맞았다. 중학생·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며 사는 충청도 주부가 대한민국 퀴즈의 달인이 된 비결은 뭘까.


―상금이 꽤 되던데 한턱 내라는 사람들이 많겠다.


"보은 시댁에서 돼지를 잡으신단다. 친정인 부여에서도 오빠더러 잔치하라고 난리라더라. 퀴즈영웅이 된 순간 방청석에서 눈물을 터뜨리신 분이 친정어머니가 아니라 시어머니신데, 녹화 후 사방팔방 전화를 거셔서 방송 나가기도 전에 일가친척, 동네 주민들이 다 알아버렸다."


―4번째 퀴즈대회 우승이다. 비결이 뭔가.


"남들은 6개월 내지 1년은 공부하고 나간다는데, 나는 길어야 한 달 준비했다. 평소 책, 신문, 잡지를 많이 읽어서 그런지 이미 알고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나갈 때마다 우승한 것은 아니다. 10년도 더 전에 '알뜰살림 장만퀴즈'에 처음 나갔는데 답하는 족족 틀려서 4명 중 3등했다. 누가 알아볼까 봐 6개월 동안 바깥엘 못 나갔다."


―책은 어떤 분야를, 얼마나 많이 읽는가?


"닥치는 대로 읽는다. 양서, 악서 가리지 않는다. 만화책도 엄청 읽는다. 재활용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엔 주민들이 버린 책들을 다 들고 온다. 아이들 책 산다 핑계 대고 헌책방에 가서는 내 책도 한 권씩 끼어서 사온다. 남편 돈으로 사는 것이니 미안해서 만화책은 숨겨놓고 본다. 어릴 때부터 책이라면 껌벅 죽었다. '톰소여의 모험'부터 '괴테전집' '여인열전'까지.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이 읽어서는 안될 책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난 어떤 책이든 배울 만한 게 있다고 믿는 주의다."


―신발장 입구에 잔뜩 쌓여 있는 신문들은 아직 안 읽은 것인가? 왜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가?


"퀴즈 대회 나가려면 적어도 3개월 치는 복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다. 특히 국제면, 문화면."


―지적 욕구의 원천은 무엇인가.


"배움에 대한 허기인 것 같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했다. 병약한 아버지 대신 엄마가 식당일, 막일, 가리지 않으며 3남매를 키우셨다. 학교 가는 길에 엄마가 2층짜리 가(假)구조물 위에서 미장일 하시는 걸 보고 공부를 잘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공부를 잘하면 대학가고 싶을 테니까. 그러다 엄마가 팔을 다쳐서 중학교 수업료를 못 냈는데 선생님이 복도에서 벌을 세우더라.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순 없어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에 갔다. 방직공장에 있는 학교인데, 나중에 입학원서 낸 걸 알고 엄마가 우셨다. 엄마는 형편이 어려워도 나를 일반 고교에 보내려 했었다."


―11월에 딴 공인중개사까지 국가공인자격증만 모두 5개다. 자격증 욕심도 공부에 대한 한(恨) 때문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한우물 파는 스타일이 아니라 여기저기 잡다한 데 호기심이 많다. 고압가스화학기능사, 양장기능사, 롤러 운전기능사, 굴착기 운전기능사는 돈 많이 번대서 땄다. 롤러는 4년7개월 동안, 결혼해 임신한 것 알고 그만둘 때까지 정말 열심히 운전했다. 신갈·안산 간 고속도로의 반월터널, 미원·초정 간 국도, 논산·계룡대 사이 도로를 내가 포장했다. 요즘도 그 도로를 지나게 되면 엄마가 닦은 도로라고 자랑한다."


―우주에 관한 퀴즈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과학 분야에도 관심 있었나?


"정규학교가 아니라 지구과학은 배우지도 못했다. 다 요령이다. 본심 앞두고 12일 동안 우주에 관한 자료만 모았다. 퀴즈동호회 분들도 도움을 주셨다. 주제가 한 가지면 공부하기가 훨씬 쉽다. 30~40쪽 예상문제까지 만들어 집중적으로 공부했는데 막상 나온 문제들은 너무 쉬웠다. 작가들이 출연자들을 너무 무시한 것 같다. 하하!"


―퀴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나. 결국은 상금을 겨냥한 것 아닐까.


"주체할 수 없는 지식욕 때문이지 돈 때문은 아니다.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될 때의 쾌감이랄까? '퀴즈피아' 같은 카페에 들어가보라. 대부분 본업이 있는데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시사 정보, 예상문제를 올리는 고수들이 많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도전해보는 거고. 그 분들에 비하면 나는 하수다. 이번에도 '저렇게 쉬운 문제로 영웅 된 거야?' 하고 비웃을까 봐 걱정이다."


―엄마가 퀴즈 영웅이니 두 아들은 공부를 잘할 것 같다.


"둘째는 욕심이 많은데 큰아이는 별로다. 태어나면서 선천성 거대결장을 앓았다. 직장과 항문 사이에 괄약근 신경이 없어 대변을 못 보는 병이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돌도 안 된 아기에게 수술을 3번이나 시켰는데 그때 평생 울 거 다 울었다. 지금은 건강하다. 공부는 선생님 눈 밖에 나지 않을 정도만 하라고 한다."


―이번 우승으로 퀴즈대회에 도전하는 전업주부들이 많아질 것 같다.


"자기 발전이 되는 건 확실하다. 집에 전화가 와서 아이들이 받으면 '엄마 지금 공부해요'라고 말하는데, 참 듣기 좋더라. 아이들에게도 '네가 간절히 원하는 건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쉽지 않은 삶이었을 텐데, 표정이 굉장히 밝다.


"내가 굉장히 낙천적이다. 수업료도 제때 못 내면서 생활환경 적는 난에 늘 '중(中)'이라고 써냈다. 밥을 굶지는 않았으니까. 전기기사 남편을 만나 내 자취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때에도, 남자들만 우글대는 험한 공사판에서 롤러를 밀 때도, 힘든 줄 몰랐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엔 한자 1급 시험을 볼 거다. 외숙모가 등록금 대줄 테니 대학 가라고 하신다. 이젠 한우물을 파볼까도 생각 중이다. 물론 지금도 행복하다. 우리 집 밤 인사가 '행복한 사람 되세요'다."


 

'퀴즈왕' 朴씨의 비결 


남들은 2~3년씩 준비하고 나간다는 퀴즈대회. 그런데 박춘록씨는 평소 상식공부를 생활화해놓으면 한두 달만 준비해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첫째 비결은 메모 노트와 사전이다. 신문을 보든, 책을 보든, 심지어 전단지를 읽다가도 처음 보는 단어가 나오면 메모해두었다가 사전을 찾아본다.


둘째 비결은 매일 신문 읽기다. 책은 주제가 다양해서 골라 읽기가 쉽지 않지만, 신문을 통해서는 모든 분야의 주요 정보와 키워드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씨의 경우 국제면, 문화면, 경제면을 열심히 읽었다. 칼럼, 사설은 아이들과 함께 읽는다.


셋째, 대회가 가까워오면 예상문제를 만든다. 적게는 A4용지로 30장, 많게는 70장까지 문제를 만들어봤다.


마지막으로 퀴즈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기출문제를 비롯해 퀴즈 트렌드, 다양한 시사정보를 얻을 수 있다.


입력 : 2008.12.22 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