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찔레꽃이 바꾼 인생, 장사익

풍월 사선암 2008. 12. 21. 10:06

[조선닷컴 주말특집] 찔레꽃이 바꾼 인생, 장사익

스타를 넘어서다 <19편> - 소리꾼 장사익

이학준 기자 arisu01@chosun.com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5년 동안 갈아치운 직업만 열네 개. 그 어떤 분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거세된 수컷과 같았다. 못견디게 외로울 땐 고향에서 장구를 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도 국악을 하고 싶었다. 사물놀이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다.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 했다.


햇살이 유난히 밝던 5월의 어느 날. 남자는 집 앞 화단에 흐드러진 장미를 바라보며 행복했다. 아름다운 외양에 은은한 향기라니. 그는 향기에 취하고 싶었다. 코를 가까이 댔지만 꽃에선 아무 냄새도 없었다. 향기는 장미 뒤에 숨은 찔레꽃에서 흘러나왔다. 남자는 생각했다. “이게 내 모습이구나. 화려한 장미에 가려진 볼품없는 외양이라니….”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났다.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집에 돌아와 시를 썼다.


소리꾼 장사익, 45세에 데뷔한 그는 어느새 환갑을 앞둔 59세가 됐다. 전 공연 매진을 기록하는 이 남자는 스무 살의 빅뱅도, 서른 살의 이효리도 부럽지 않다.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시에 음을 붙이니 노래가 됐다. 감정을 실어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른 노래는 수많은 장년층의 사랑을 받았다. 무대마다 관객이 넘쳐났다.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못난 찔레꽃이 내 인생을 바꿨네요.”


동화 같은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은 소리꾼 장사익이다. 45세에 데뷔한 그는 어느새 환갑을 앞둔 59세가 됐다. 전 공연 매진을 기록하는 이 남자는 스무 살의 빅뱅도, 서른 살의 이효리도 부럽지 않다.


◆“나에게 소리는 씻김 굿.”


소리를 하니까 소리꾼이고, 춤을 추니까 춤꾼이다. 장사익에게 소리는 신내림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 해도 목청을 뚫고 나오는 소리 덕분에 몸을 움찔움찔해야 한다.


그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났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장구재비였다.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불려가 장구를 쳤다. 그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가정마다 돌아다니며 농악치고 그랬죠. 그때 늘 쫓아다니고 그랬어요. 나도 모르게 국악이 몸에 스며든 건 아닌가 싶네요.”


장사익(59)에게 소리는 신내임이고 운명이다. 소리를 피해 산 것이 45년, 소리에 빠져산 것이 14년. 그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장구소리가 좋다고 음악을 할 순 없었다. 땅만 바라보고 사는 농부가 싫었다. 서울까지 올라와 선린상고에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은행 대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게 1972년이다. 얼마 후 무역회사로 옮겼지만 다시 사표를 내고 가구점 총무를 했다. 독서실 운영도 해보고 카센터에서 일도 했다. 그렇게 열네 번 직업을 바꿨다. 손에 탁 하고 들어맞는 직업은 없었다. 결국 1993년 생활전선을 떠났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연주해 유명해졌다. 이듬해 서울 신촌에서 처음 노래를 불렀다. 공연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첫 번째 앨범 ‘찔레꽃’에 이어 여섯 번째 앨범 ‘꽃구경’까지. 그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리꾼이 됐다.


소리를 피해 도망 다닌 것이 45년, 소리에 미쳐 산 것이 14년. 신내림을 거부하다 굴복한 무당의 애달픈 삶이 떠올랐다. “무당이라….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저는 어릿광대라고 생각해요. 내 노래를 듣는 분이 힘들면 위로해주고. 세상 일 모르는 분들한테는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주고. 즐거운 사람들에겐 흥을 돋워주고. 그렇게 사는 게 참 좋거든요.”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그러고 보니 무당하고 닮은 데도 있네요. 큰 공연을 앞두고 몸살이 심한 적이 있었어요. 곧 공연이 시작인데 구토를 하고 그러니까. 연주하는 분들이 그러더군요. ‘사익이 형, 완전히 맛 갔다.’ 근데 공연을 시작하니까 온 몸이 가벼워지더라군요. 그렇게 두 시간 반을 서서 공연을 했어요. 끝나고 나니 아픈 게 싹 없어지더군요. 일종의 씻김 굿이었던 거죠.”


6집을 내놓은 중견가수 장사익(59). 늦게 데뷔했지만, 그는 인생에 소리라는 집을 차곡차곡 쌓았다고 했다.

 

◆“여러분도 꿈을 꾸세요.”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찔레꽃. 기자는 궁금했다. 찔레꽃을 보면서 통곡했던 까닭은? 그 슬픔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음악 공부도 하지 않은 이가 뒤늦게 소리꾼으로 빛을 본 비법은? 장사익은 또박또박 설명했다.


“찔레꽃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세상에 나왔다면 먹고 사는 건 기본 아닐까. 모든 식물도 꽃을 피우는데. 우리 사람들도 먹고 사는 일 말고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게 바로 세상에 나온 이유 아닐까. 먹고 사는 궁리만 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슬프더군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어머니 탯줄을 부여잡고 나온 이상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도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은 계속됐다. “빙 둘러오긴 했지만, 저는 인생에 노래라는 집을 차곡차곡 짓고 있었어요. 아버지의 음악을 듣고 시골의 정서를 담았고.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았고. 직장생활 하면서 넘어지고 깨지면서 세상을 배웠어요. 다시 국악을 접하고. 저는 그것들이 탄탄한 벽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정규 수업만이 음악인을 기른다는 건 어리석은 편견에 불과하다.


그는 내달아 말했다. 이번엔 장사익의 인기 비결이다. “마음을 담는 거예요. 애인이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안주가 없이 밤을 지새도 즐겁지 않나요? 그건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죠. 사랑한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마음이 맞는 게 중요해요. 그런 건 말 안해도 알듯이 노래도 그래요. 마음을 담았는지 아닌지는 듣는 사람이 다 알더라구요.”


장사익(59)의 공연은 연일 매진이다. 입석을 끊고 들어와 즐거워하는 이도 많다. /사진=김영관

 

◆장사익의 마지막 공연


그의 꿈을 물어볼 차례다. 그는 몇년 전에 보았던 노대가(老大家)의 마지막 공연을 떠올렸다. 죽음을 앞둔 어느 한국 무용가가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연에 나섰다. 막이 오르자 조명이 들어왔다. 무대 가운데 의자가 놓였다. 제자들이 무용가를 부축해 무대로 올려놓았다.

관객은 숨 쉬기 힘들었고 무용가는 서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결국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음악이 흘렀다. 대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움직임도 못했다, 관객이 웅성거리고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노대가는 고개를 번쩍 하고 들었다. 그리곤 양 손을 날개처럼 쭉 하고 펴더니 아름다운 춤사위를 단 한번, 덩더쿵 하고 보여줬다. 보는 이들이 아! 하고 탄식을 내지르는데 무용가는 의자를 붙잡고 무대에 쓰러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장사익은 공연을 보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70살이 넘고 80살이 넘으면 꼬부랭이가 되고 힘도 없겠죠? 그래도 욕심은 90살까지 하는 거예요. 무대에서 비틀비틀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노래를 부를까 생각하면 너무나 신비롭고 기대됩니다.” 이게 바로 소리의 바다, 그 깊은 곳에 빠져 행복한 장사익의 꿈이다.

 

장사익의 ‘찔레꽃’

장사익의 ‘봄비’


장사익의 ‘국밥집에서’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


장사익의 ‘희망 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