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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 "일본 애들 아무 것도 아니예요"

풍월 사선암 2008. 12. 21. 10:41

장정구 "일본 애들 아무 것도 아니예요"

[조선닷컴 주말특집] 스타를 넘어서다 <제2편> - 장정구

이학준 기자 arisu01@chosun.com 


소파에 몸을 처넣은 남자는 잔뜩 도사린 들짐승 같았다. 뜨거운 햇살이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한여름의 정오다.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어놓은 건축 설비사무실. 남자는 ‘사장’이라 찍힌 명함부터 내밀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는 급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형님, 1000만원이 필요한데 보내주세요.” 큰 돈이지만 부탁의 말도, 승낙의 말도 짧았다. 남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난 돈 빌려달라는 말은 못해요. 실패하면 못 갚는 거니까, 그냥 달라고 하죠. 물론 빌려줄 때도 받을 생각은 안해요.” 161㎝의 체구가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전 WBC(세계권투평의회)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장정구(46)다. 프로 통산 38승(17KO) 4패.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제패했던 그에게선 ‘숫놈’ 냄새가 진하게 났다.


싸움의 기술


“누가 그렇게 큰 돈을 쉽게 내주나요?” “그런 데가 있어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착하게 살면 된다”고 대답했다. 더 물어보려 하는데 손사래를 친다. 대화는 어린 시절로 넘어갔다. 부산 아미동은 그의 고향이다. 60년대 아미동은 대표적인 빈촌(貧村)이었다. 험한 사람이 많아서 택시기사도 가길 꺼려했다. “차비는 안주고 때리고 도망가니까.”


동네 사람들은 시비가 붙으면 ‘지붕을 날아다니며’ 주먹질을 했다. 어린 장정구는 작지만 강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말로 대화하는 것보다 주먹으로 표현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초등학교 다닐 때, 세살 많은 형들이랑 싸운 적이 있어요. 결국 박살 내뿌렸죠. 도망가길래 집까지 따라가서.” 그날 이후 아이는 유명해졌다. 당시 절친한 선후배 가운데 일부는 부산의 유명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다. “영화 ‘친구’ 있죠? 그거 실화예요, 조금 포장을 해서 그렇지. 거기 유오성이 연기한 사람이 내 4년 후배라니까.” 간담이 서늘해졌다.


작고 강한 아이가 몸에 익힌 싸움의 기술은 간단했다. 상대방이 움직이는 리듬을 읽을 것, 몸에 힘을 빼고 가볍게 움직일 것, 주먹으로 치는 순간에 힘을 넣을 것. 몸의 리듬을 읽는 남자, 그는 천부적인 싸움꾼이고 복서였다.


일본 킬러, 장정구


초등학교 5학년에 시작한 권투는 아이의 모든 것이 됐다. 뭐든지 독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했다. 일년치 아마츄어 권투시합 일정을 방에 커다랗게 붙여놨다. 준비는 철저했다. “권투는 막 때리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니라니까요. 비디오를 보면서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는 거죠. 여러 번 돌려보면 그 사람이 무의식 중에 움직이는 (몸의) 리듬이 보여요.”


권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다. 그만큼 시합도 많았다. 내로라 하는 권투경기를 휩쓸었다. 프로 전향 제의가 들어왔다. 1980년 프로로 데뷔해 신인왕이 됐다. 그리고 2년 만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도전했다. 상대는 파나마 일라리오 사파타. 아쉬운 패배. 그는 시합을 마치고 피오줌을 흘렸다. 1년 뒤 같은 선수에게 재도전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세계챔피언이 됐다. 장정구는 벼락스타가 됐다. 돈도 벌었다. “프로 야구선수 최고 연봉이 2000만원이었어요. 근데 나는 경기당 7000만원을 받았죠. 강남에 32평 아파트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6년 동안 15차례 방어전을 치렀다. 유난히 일본 선수와 자주 싸웠다. 4명의 선수와 5차례 방어전을 치러 모두 이겼다. 그것도 4차례의 KO승. 결국 일본권투협회가 그를 누르기 위해 멕시코 출신 헤르만 토레스를 수입했다. 그와 경기는 모두 3차례. 전부 승리했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두번 만난 일본의 천재 복서 오하시 히데유키(大橋秀行)는 15차 방어전에서 7번 쓰러졌다. “일본 선수라고 하면 이상하게 힘이 났어요. 일본 애들은 특별한 기술도 없지, 파워도 없지. 근성이라고 해봐야 아무 것도 아니예요.”


가장 기억 나는 경기는 1984년 4차 방어전이다. 상대는 도카시키 가쓰오(渡嘉敷勝男). 쉽게 본 것이 화근이었다. 1라운드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맷집이 좋았다. 두들기다 지친다는 말이 떠올랐다. “돌아서서 포기하고 싶었죠. 근데 여기서 지면 내일자 신문에 뭐라 나올까 생각하니 치가 떨리더라고. 결국 KO로 이겼지.” 신문 덕분에 승리한 셈이다. 뛰어난 재능에, 극일(克日)본능까지. 그는 한국 권투의 살아있는 신화가 됐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


15차 방어전 직후, 정정구는 돌연 타이틀을 반납했다. 1988년의 일이다. 가정문제가 원인이었다. “장모와 아내가 모든 재산을 자기 명의로 빼돌렸어요. 그때까지 모은 재산으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5채를 살 수 있었어요. 근데 모두 사라진 거지. 나는 머리 아프면 운동을 못해요.”


틀어진 인연은 다시 짜맞출 수 없었다. 무일푼이 됐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돈이 필요했다. 다시 글러브를 꼈다. 세계챔피언에 세 번 도전해서 모두 실패했다. 화려했던 신화는 무너졌다. “다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교하자면 100 뛰다가 스톱하고 다시 달린 거죠.”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나는 아내를 사랑해요. 모아놓은 돈하고 지금 아내하고 맞바꿨다고 생각해요.”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제자는 한국 권투의 마지막 스타라 불리는 최요삼 선수. 장정구는 2003년 최요삼의 세계챔피언 재도전을 위해 트레이너 역할을 맡았다. “정말 열심히 운동하는 후배였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자는 지난해 경기 중 쓰러져 식물인간이 됐다. 지난 1월 숨을 거뒀다.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목에 핏대가 선다. “그 정도 맞고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아마 몸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세계챔피언 경기 전엔 지정 병원에서 뇌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빼먹은 건 아닌지.” 제자가 떠난 다음, 권투협회 건강보조기금이 텅 비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에이, 어쩌다 한국 권투가 더럽게 돼가지고.”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추성훈에 비교해?”


정상에서 내려오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구선수 장윤창, 마라톤선수 황영조 등과 ‘함께하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는 까닭이다. 왕년의 스포츠 스타들이 모여 장애인시설도 방문하고 독거노인에게 연탄도 날라준다. 한 달에 한번씩 모인다.


주먹으로 사는 남자, 전 WBC 세계챔피언 장정구씨의 도전은 진행형이다.

장씨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최근 복싱 도장, 건축 설비사업을 시작했다.

 

“밑으로 떨어져 보니까 여러 가지가 보이더라구요. 내가 받았던 사랑을 돌려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면 일찍 참석해서 조용히 일만 하다 사라진다. “국회의원이라고 와서 사진만 찍고 가고 그러거든요. 우리는 그런 사람 보면 짜증 납니다. 이왕 할거면 표 안나게 해야죠.”


이제는 장정구 이름을 건 권투도장도 운영하고 건축 설비업도 시작했다. 종종 선배나 친구가 부르면 달려가 일을 돕고 돈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권투가 아닌 사회 일은 여전히 그에게 낯설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을 생각이다. “두 아이의 아빠예요. 앞으로 돈 필요할 일이 많은데. 주위 분들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밤하늘에 빛나던 별에서 땅으로 내려온 기분은 어떨까. “아쉬운 건 없어요. 현실에 맞게 살아야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오랜 인터뷰를 마칠 쯤. 그가 뜬금없이 옷맵시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리 생겼어도 한때는 남성복 광고모델 한 거 알아요? 권투 선수들이 옷 입혀 놓으면 멋있거던.” 그럼, 요새 20대 여성에게 인기 있는 추성훈 같은 스타셨군요? 그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추성훈이 누구요? 우린 50억 인구 가운데 1등인 사람이라니까.” 아차, 그는 이종격투기로 따지자면 효도르 급이구나. 얼른 사과를 하는데 장정구의 반박이 이어졌다. “난 WBC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복서 25인 중에 한 명이란 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