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아름다운 멘토링인 대부 대모 제도

풍월 사선암 2008. 12. 10. 10:36

 

아름다운 멘토링인 대부 대모 제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는 듣는 이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언젠가 자신도 길 잃은 양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길 잃고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나를 찾으러 오실 분이 계시다는 확신은 우리를 안정시켜 줍니다. 숲에서 길을 잃었다면 당황해서 스스로 무너지는 때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 이 비유는 우리에게 길 잃은 양이 생겼을 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찾아 나서라는 명령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선택의 딜레마에서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도 된다.”라는 편의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말씀이 무척 어렵게 느껴지곤 합니다. 산에 남겨 둔 아흔아홉 마리 양은 누가 돌보나 하는 의구심이 솟기 때문입니다. 양은 주인의 말을 잘 따른답니다. 추위를 많이 타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서 서로 몸을 맞대고도 잘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동들은 밤이 되거나 비가 오고 폭풍이 불면 좁은 동굴이나 공간에 가두어 놓고 기른다고 합니다. 그 앞에 사냥개 한 마리 정도 풀어 지키게 하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비유말씀이 나온 상황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양의 수를 세어 보니 한 마리가 부족하다면 목동은 좁은 골짜기에 가두어 놓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는 못 갔을 거로 생각하고 근처 잃어버릴 만한 곳부터 살펴볼 것입니다. 이렇게 양과 목자 사이에는 신뢰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닥치는 가장 큰 문제는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통계를 보면 하느님을 찾아 입교하는 숫자는 꾸준히 늘고 있으나 냉담하거나 쉬는 교우가 그만큼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들이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공동체에 속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친교와 필요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모임쯤으로 생각합니다. 성사생활과 기도도 자신이 필요한 정도만큼만 행하면 되지 일일이 간섭받고 부담을 주는 모임은 사양하려 듭니다.

 

하느님이 필요하고 영성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교회에 나갈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성은 원하지만, 교회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하느님을 향해 순례하는 지상의 나그네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동반자 협조자입니다.

또 교회는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까닭에 작은 갈등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상처를 입는 때가 잦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지.”라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습니다.

나가는 쪽이나 내몬 쪽이나 모두 이 말을 씁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말씀을 들으면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불교 선사의 가르침 중에 “도(道)는 도중(途中)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제록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목적과 수단, 결과와 방법이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동을 살기 위한 방법으로, 좋은 집을 얻기 위한 수단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어렵고 괴롭기만 하다는 지적입니다.

 

노동 자체가 목적이고 수단이 되어야만 삶이 풍요해질 텐데 그렇질 못 하다는 것입니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수행 자체가 깨달음이요 수단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하느님 나라를 향해가는 방법이라고만 여기면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길이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이 목적이며 방법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올바르고 기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대부 대모라는 좋은 멘토링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대자녀이며 또 대부모입니다.

이 말은 서로서로 교회생활을 이끌어 주어야 하며 또 질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묻고 어떤 점을 이끌어 주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지냅니다.

대부 대모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형식주의에 빠졌다는 방증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인 까닭은 하느님을 찾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건,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영적 식별을 키워야 합니다. 이쪽저쪽 선택의 자유 속에서 어느 길이 하느님으로 향하는 길인지 아닌지 식별할 눈을 키워야 합니다.

 

대부대모의 역할은 바로 이 영적 식별을 제대로 이끌어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 혼란 와중에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도 꾸준히 묻고 또 가리켜 보이는 도중에 답을 찾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도는 도중에 있듯이 하느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 순례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 윤경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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