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99간 한옥 명례궁

풍월 사선암 2008. 9. 24. 23:57

 

 

 

 

 

 

그거 아세요? 99간 한옥은 불법건축물이었다는 사실.

 

조선시대는 계급제의 영향도 있었지만, 유교를 근간으로 하면서 검약과 수행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왕의 자손인 대군과 군조차도 66간밖에 집을 지을 수 없었답니다. 한 간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하는데, 1.818미터이므로 한 간이 한 평이 됩니다.

보통 한옥 한 채가 7간에서 10간정도이므로, 99간 한옥은 10여 채의 한옥이 모여있는 것이 되겠죠.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텐데요. 예전에는 대가족이 살았고......집을 관리해 줄 종(하인)들도 살았으니, 66간 한옥도 작게 느껴졌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신분에 따라 그 아래는 44간, 22간으로 규제를 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집을 크게 지을 수 없었답니다. 실제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한다면 같은 간수를 가지고도 넓은 집을 지을 수 있었겠지만, 도량형을 지키는 데 엄격한 사회였기 때문에 아마 그런 편법은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중문 선문화원은 하얏트 호텔에서 99간 한옥을 복원한 것인데, 차이가 있다면 여기서는 한 간을 2.4미터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넓고 시원한 맛이 있습니다.


한옥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과 기와가 만나는 선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인사동에 있을 때는 마당이 있는 한옥도 적었거니와 높다란 빌딩이 보여서 좀 별로였죠. 제주 오시면 구경오세요.

 

 

 

99간 한옥 명례궁

 

무주의 명례궁은 무풍면 현내리에 소재한 행궁이다. 본궁은 철종 9년에서 1940년사이의 인물 민병석이 건립한 궁실이다. 민병석은 고종때의 척신으로 행서를 잘하던 서도가로 명성이 있어 양반들의 비문을 많이 남긴 인물이기도 했는데 벼슬이 내부대신에 올랐던 그는 한ㆍ일 합방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고 망국내각의 궁내대신까지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말기 우리나라에는 미국, 일본, 청국등 여러나라 군대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전국 각처에서 민란까지 일어나 정국은 시끄럽기만 했다. 이때 민병석은 이곳 무주의 무풍동을 무릉도원의 땅이요. 십승지지 중 하나라는 남사고의 비결을 생각한 후 난세의 피난처로 삼기 위하여 집을 지을 결심을 했다.

 

민비의 친척으로 척신이 된 그는 상당한 권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고종 27년 당시 무주부사 서완순의 협력을 받아 건평 99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이때 공사에 쓰인 사업비는 본군에서 상납해야 할 공물을 대납하고 거기서 얻어진 이익금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그 후 민병석은 토지 300두락(150두락은 서면에 있었다고 함)을 부속시킨 다음 쌀 1500석을 확보한 후 민비에게 상납한 후 명례궁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로써 이 고장에도 유사시 임금이 거동할 수 있는 이궁, 즉 행궁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궁이 건립됨으로써 이 고장 백성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민병석이 국가에 대납한 상납의 대가로 무주 국민들은 그 몇배의 세금을 낼 수 밖에 없던 관계로 한 가족이, 더러는 한 동네의 주민 모두가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고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굷주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건립한 명례궁은 민비가 받아들이자 조정에서는 구모승지를, 초대 관감으로 부임시키면서 제원찰방을 겸임토록 했다. 그 후 2대 관감으로는 민병석의 사촌 민병형이 부임했다가 회덕군수로 전출하면서 전기 구승지의 양자이던 구일모가 3대 감관으로 부임했는데 명례궁의 관감으로서는 구관감이 마지막이었다.


무풍의 명례궁에 3대째 관감이 부임해 오는 동안 수 많은 정국의 변화가 일어났다. 고종 32년(1895)에는 민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있었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광무9년(905)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의 권력하에 들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명례궁의 관감을 폐지하고 이 별궁은 민병석에게 다시 환부하여 개인 소유가 되게 하였다. 이로써 명례궁은 임금이 한 번도 거동하지 못한채 행궁으로써의 기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풍에 거주하던 하인환 이라는 사람이 10여년간 관리하다가 이장우라는 사람에게 매각되어 버렸었다.


8.15 해방후부터는 이궁에 딸렸던 토지마저 금융조합 농지가 되어버렸고, 건물은 강순열이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일부는 경북 금릉군 대덕면 정각으로 팔려갔으며 일부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경찰지서 건물로 팔려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 고장 주민들의 살림집으로 전락되어 수십 가호가 살기도 했으나 일정이 지나는 동안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던 관계로 결국은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근래에는 단 한칸의 건물만이 남아있을 뿐이나 그것마저 변형된 채 개인이 사용하고 있고 그 주변에는 천주교회와 민가가 어지럽게 건립되어 옛 궁터는 흔적을 잃었으며 그 앞으로는 무풍시장 장옥이 들어서서 이 지역 주민들의 교역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註)행궁은 왕이 본궁 외에 행차시 이용하는 궁전을 말합니다.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기에 온양행궁이 유명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