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바둑,오락

2500대국 대기록 세운 바둑황제 조훈현

풍월 사선암 2008. 8. 23. 10:04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2500대국 대기록 세운 바둑황제 조훈현

 

"변화만 추구하던 나도 이젠 두려워… 세월을 누가 이기겠어요?"

 

성격이 급해서 뭐든 '빨리빨리' 패배의 기억은 빨리 잊어버려 어차피 승패 바뀔 것도 아니고…

바둑황제 조훈현(曺薰鉉·55)은 살 떨리는 승부를 평생 해왔다. 때로 한 판에 몇 억, 때로 몇 백만 원이 걸린 판들이었다. 5살 때 바둑을 배워 9살 때 프로가 되고 1989년 바둑올림픽인 응창기(應昌期)배에서 세계챔피언이 된 그는 칼이 산처럼 빼곡하고 검이 숲을 이룬 세상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가 지난 11일 2500대국(對局)을 넘어섰다. 세계최고기록이다. 프로기사는 실력이 높을수록 많이 바둑을 둔다. 토너먼트 첫판에 탈락하는 '단 칼'들은 제 아무리 용을 써도 1년에 20판 이상을 둘 수 없다. 2500이라는 숫자는 경쟁자들과 비교해 볼 때 더 엄청나다.


국내 2위 서봉수(徐奉洙)는 같은 날까지 2252국을 기록했다. 반(半) 은퇴상태인 일본 1위 임해봉(林海峰)은 2144국이다. 한국이 낳은 또 한명의 바둑천재 조치훈(趙治勳)은 조훈현이 2500국을 기록한 다음날 2000번째 바둑을 뒀다.


살 떨리는 승부는 무엇인가. 식객(食客)들에게 꽤 유명한 서울 마포 냉면집 을밀대 터에는 원래 대폿집이 있었다. 손님들이 그 집 여주인이 권하는 독주(毒酒)와 젓가락 장단에 녹아날 때쯤 그 집 큰아들은 바둑판을 들고 거리로 나와 행인을 녹였다. 기력(棋力)은 7급이었지만 일대의 강자였다.


그에게 바둑을 배워 지금 아마 6단 행세를 하는 기자는 1999년 중국 선양(瀋陽)의 한국주점에서 취객들을 혼내던 60대 백발 고수(高手)와 여명이 밝을 때까지 맞붙은 뒤로는 내기바둑을 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고수는 기자에게 빈털터리가 됐다.


그때 그가 짓던 패배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초췌한 모습에서 오감(五感)을 얼어붙게 만들고 사지(死地)인 줄 알면서 홀린 듯 나락으로 인간을 빠트리는 승부의 마력(魔力)을 보았다. 이런 세계는 인간을 순식간에 패가망신시킨다.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바둑황제 조훈현. 그가 앞마당으로 나서자 집에서 키우는 아프간하운드‘바비’가 주인을 핥으며 재롱을 떨고 있다

 

17일 그를 만나기 위해 평창동 토탈미술관 앞 조훈현의 자택을 찾으면서 그가 보문동, 화곡동, 연희동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생각났다. 하나같이 산을 끼고 있거나 비탈길을 올라가 낮은 곳에 있는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자리다. 이것도 그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인가.


―예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眺望)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더군요. 이 집도 그러네요.


"91년부터 여기 살았는데 참 공기가 좋아요. 아래를 내려다본다기보다는 제가 걷는 걸 좋아해요. 북한산 오르는 데 제격이지요."


―풍수가들은 평창동의 땅 기운이 워낙 세 웬만한 기(地氣)를 지닌 사람 아니고는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하지요.


"제가 기가 약한 편은 아니지요. 제가 점을 본 적은 없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나 집 사람(정미화·鄭美和)이 점을 보면 기가 약하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이기고 지면서 산다는 게 이제 지겨울 때가 됐지요.


"습관이 돼서 그런 지 힘들지는 않아요. 오히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더 힘들 것 같아요. 한창 때 2~3일에 한번 바둑 둔 적은 있지만 매일 두지는 않잖아요. 직장인들은 매일 출근하잖아요. 임원이 되면 새벽 별 보고 회사에 가 저녁 별 보고 집에 온다지 않습니까. 저보고 그런 생활하라고 하면 절대 못하지요. 그 분들하고 비교하면 저는 자유로운 편이지요."


―그럼 프로기사가 편한 직업이란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지요. 시합 있기 전에는 식욕이 없어지죠. 예전에는 하루에 빵 한 조각 먹고 버틴 적도 있었어요. 일본처럼 이틀 동안 바둑을 두면 살이 1~2㎏ 빠진다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요, 감기 몸살에 걸린 것처럼 2~3일 멍해지죠."


―그렇게 정열 기울인 중요한 대국에서 패하면 스트레스가 엄청나겠군요.


"저는 빨리 잊어요. 기억해봤자 승패가 바뀔 리 없잖아요. 신혼시절 아내는 제가 집에 들어오면 '이겼어요, 졌어요?'하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안 물어요. 제가 항상 '졌어'라고 대답하거든요."


―댁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 분에게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죠. 아내나 가족이 제게 매달리고 신경 쓰면 더 힘들잖아요."


―동양의 바둑관(觀)은 기(技)보다는 예(藝)와 도(道)에 가깝다고 하지요. 그런데 왜 스포츠처럼 바둑도 나이가 들면 승률이 낮아질까요.


"기술은 차이가 없을 겁니다. 체력이 문제지요. 나이 들면 변화가 두렵거든요. 젊었을 때의 제 기보(棋譜)를 보면 변화만 찾아 다녔어요. 복잡한 길만 골라 간 거죠. 그런데 어느 때부터 수(手) 읽는 게 귀찮아져요.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고 상상하기 힘든 실수도 튀어나오고…. 기술이 같아도 정신자세가 그렇게 되면 승부에서는 밀리게 되죠."


―남자들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술 마시다가 어느 순간 기억이 딱 끊기지요. 흔히 '필름이 끊긴다'고 합니다만, 그것과 비슷한 현상인가요?


"그렇게 비유할 수 있지요. 저는 40대 후반부터 그런 일이 생겼어요."


―필름 끊겨본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나이가 됐다는 것을 믿지 않죠. 그래서 객기를 부리다 더 큰 곤욕을 치르곤 합니다만….


"저도 믿기지 않아 이겨 보려 했지요. 그런데도 실수를 하니까, 아무래도 세월은 못 이기는구나 하고 체념하게 됐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바둑의 명인(名人)들이 둔 어처구니 없는 수를 보고 '아니, 어떻게 명인이 저런 수를 두지' 하고 의아해한 적이 많았어요. 이제 나이 드니 그런 실수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바둑을 통한 조훈현의 삶은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바둑을 제외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영양사를 하던 아내와의 만남이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연애담이 나와있다. 달콤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1주일이나 한 달에 한번씩 만나 차 마시고 밥 먹다가 헤어졌다는 이야기뿐이다.


그 아내는 결혼 후 조훈현의 매니저이자 운전기사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왔다. 휴대전화가 없는 국수(國手)에게 연락을 하려 해도 정씨를 통해야 할 정도다. 세상에 바둑황제로만 알려진 조훈현이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북한산 등산을 하던 중 조 국수를 몇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무척 빠르게 걷던데 워낙 성격이 급합니까?


"급해요. 저는 산에 오를 때 가급적이면 직선코스를 택합니다. 어차피 올라가야 할 거면 빨리 가자는 거죠. 한국기원 계단을 오를 때도 한꺼번에 네 계단씩 오릅니다. 식사도 빨리빨리, 외출준비도 빨리빨리 하는 식이지요."


―달리기도 무척 잘하겠네요.


"달리는 건 질색입니다. 10m도 안 달려요. 제가 심장이 약해서 걷는 것은 좋아하지만 뛰는 것은 피하지요."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면 부부가 단 둘이 있을 때도 할 얘기만 하고 입을 다무나요?


"둘이 있을 때면 이야기를 많이 해요. 제가 밖에서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집에 들어오면 그렇지 않거든요."


―모든 것이 빨리빨리식(式)이어서 연애시절에도 재미가 없었겠군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저희 세대는 남녀 교제를 하기 힘든 구조였잖아요. 학교에서도 여자 만나기 힘들고 지금은 여성기사가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바둑계에도 남자들만 있었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대학에 들어가서 미팅도 하고 그랬을 텐데 저는 그런 경험도 없었어요. 결혼할 때까지 거의 여자를 못 만났으니까요."


―그래도 바둑황제라면 교묘하고도 꼼짝 못할 수순(手順)으로 여자를 사로잡을 생각을 해야지요. 만나서 차 마시고 밥 먹고 헤어지면 정석(定石)만 두는 것처럼 재미없지 않습니까.


"문 부장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때 정말 괴로웠어요. 이 사람 만나 커피 마시고 식사하는 것까지는 참겠는데 제가 무슨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내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 게 사실입니다."

 

조훈현 국수는“3년 전 골프를 시작했지만 아직 스코어를 말할 수준은 아니다”고 했다. 그는 집에서도 가끔 퍼팅 연습을 한다.


(아내 정씨에게) 조 국수는 집에서 어떤 분입니까.


"굉장히 재미있는 성격이에요. 보기보다 말도 잘해요. 그런데 한 가지 불편한 건 제가 남편을 집에 두고 어디 나갈 수가 없어요."


―왜요?


"자급자족(自給自足)이 안 되거든요. 밥 차려먹으라 해도 굶고 운전도 못하니까 걸어다녀야 하고 양말도 다 준비해놨는데 항상 양복과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색만 골라 신고 가는 식이거든요. 바둑은 천재지만 일상 생활은 아니에요. 집안에 무슨 일도 시키면 꼭 사고를 낸다니까요."


―그럼 결혼을 후회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남편이 사생활에서는 실수가 없으니까요."


―바둑황제의 아내로 산다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까? 본인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승패를 지켜봐야 하고.


"지고 올 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지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어차피 나이도 있고 승패에 연연하던 시기는 지났고요."


조훈현은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이다. 어려서는 부모가 그를 애지중지했고 프로기사로 입문한 뒤에는 고 조남철(趙南哲), 김인(金寅),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같은 한일의 고수들이 그를 아꼈다.


개중에는 정해영 전 의원, 고 박종규(朴鍾圭) 전 청와대 경호실장, 이후락(李厚洛) 전 중앙정보부장 같은 이들도 있었다. 바둑을 좋아했던 그들은 소년 조훈현을 몇 달간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하며 바둑 두고 용돈을 줬다. 조훈현은 "제 집안이 가난해 한 명이라도 입을 덜어야 했다"고 했다.


그중 전설처럼 회자되는 게 스승 세고에(瀨越) 9단과의 인연이다. 73세 세고에는 10세 소년 조훈현과 바둑 두 판을 둬보곤 "죽을 때까지 이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제자가 병역 때문에 귀국하자 몇 달 후 자살하면서 유서를 남겼다.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스승 세고에가 조 국수가 귀국 후 허탈해 자살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제가 있었으면 돌아가셨을 리가 없어요. 당시 세고에 선생 댁에는 선생과 며느리, 저와 개 한 마리만 살았지요. 제가 떠나고 절친했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선생이 자살하자 뒤를 따른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고에 선생에게 두 번 크게 혼난 적이 있지요? 내기바둑 두다 한번, 파친코 하다 한번. 굉장히 성격이 급하다고 했는데 세고에 선생 댁의 분위기며 엄한 가르침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세고에 선생에게는 바둑을 몇 판 배우지 못했어요. 바둑은 오히려 후지사와 선생에게 더 많이 배웠지요. 바둑보다는 인간의 그릇이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았습니다. 선생은 갈 길을 터주는 거지 손 잡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게 아니지요."


―조 국수의 기억을 담은 글을 보면 당시 귀국을 앞두고 일본에서 두 달 동안 심하게 방황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병역이라는 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있지만 그때는 갈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제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4년이나 5년이 걸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한국에 와서 한국인을 키우고 조치훈 9단은 일본에 남아 자기 몫을 하라는, 뭐 그런 운명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세고에 선생은 평생 3명의 제자만 남겼지요. 조 국수 외에 중국의 오청원(吳淸源),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모두 천재라 불리는 분들입니다.


"하하, 저는 천재는 아니고요, 아이큐도 100 겨우 넘길 정도인가요. 바둑사에 유명 인물을 돌이켜보면 진정한 천재는 오청원 선생 정도지요. 그분은 현대바둑의 틀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같은 제자들끼리는 모임 같은 게 있나요?


"가끔 연락은 드리지만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요. 오청원 선생은 지금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요. 다만, 제 사형(師兄)들이 워낙 고참이어서 바둑계에서의 제 항렬(行列)이 나이보다 높은 건 사실이지요. 덩달아 창호(이창호·李昌浩 9단)의 항렬도 높아졌지요."


―이창호 9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자를 키우며 정성을 들인다는 게 말하기는 쉬워도 참 힘든 일이지요.


"사랑은 내리사랑이니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받은 것을 제자에게 돌려준다는 생각 밖에는 한 적이 없습니다. 공부는 사실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환경 만들어주고 이끌어주는 거지요. 스승과 제자라는 것은 내가 100원을 빌렸으니까 다음에 100원 갚을게 하는 식하고는 달라요. 배고파서 죽을 것 같을 때 한끼 준 것과 배터질 때 한 끼 사주는 것이 다르잖아요."


―좋은 스승과 선배, 좋은 후배를 만났으니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하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1남 2녀가 있습니다. 아들은 일본에서 대학 다니고 딸들도 대학원과 대학생입니다만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 운동도 좋아하는 아이들은 자기가 알아서 배우는 것이지 야구는 이렇게 하고 축구는 이렇게 하고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잖아요."


―공부나 가르침이 강요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죠. 강요해서는 잘 안 되지요. 저는 부모 역할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벌어서 다 하라는 것은 부모로서는 너무 능력 없는 거 같고, 최소한 학교 보내주고 먹여주고 입혀준 뒤에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지요. 나쁜 길로 가면 안되니 좋은 방향은 제시해야겠지만 24시간 공부해라 이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끝내고 사진촬영을 하면서 문득 눈썹이 검(劍)처럼 예리했던 젊은 시절 국수의 인상이 많이 부드러워졌음을 느꼈다. '제비'에서 '19로(路)의 마술사'에서 '전신(戰神)'으로 별명이 세월마다 바뀐 그를 보며 얼마 전 홍콩배우 유덕화가 맡은 노년의 조자룡(趙子龍)을 그린 영화가 생각났다.


그런 기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수는 아내와 장난치며 포즈를 취했고 잘생긴 애견을 데리고 포즈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으로도 바둑계를 위해 뭔가를 해야지요. 일선은 이제 안되니까, 거 뭡니까 회사에서 나이 들면 하는 역할 같은 거…."라고 했다.


"고문(顧問) 같은 거요?"라고 하자 그는 "맞아요, 고문."이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기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바둑을 둘 것이며 북한산의 노호(老虎)로 별명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