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무풍면(茂豊面)의 유래

풍월 사선암 2008. 2. 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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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면(茂豊面)의 유래 

 

무풍면(茂豊面)은 옛 삼한시대에는 변진국(弁辰國)을 맹주국(盟主國)으로 하는 감문국(甘文國)에 속해 있었으며 231년(신라 助賁王 2년) 신라가 감문국을 토벌하여 무산(茂山)이라 하고 청주 무산현(茂山縣)이라 하는 치소를 두게 되었으니 백제의 적천현(赤川縣)과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후 661년(신라 文武王 元年) 신라가 청주를  폐지하고 감문군을 두면서 무산(茂山)이 감문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757년(신라 景德王 16년) 삼국을 통일하면서 전국을 아홉 개의 주(州)로 나누면서 무산(茂山)의 지명을 무풍(茂豊)으로 바꾸어 상주 개령군 무풍현(尙州 開寧郡 茂豊縣)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가 건국한 후 997년(고려 成宗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십도제(十道制)로 대 개혁을 하게 되면서 무풍은 지금의 영남권역에서 벗어나 호남권역인 강남도 남원부 進禮縣)의 속현으로 예속케 되었으며 그 후 조선건국 이후 1413년(太宗 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치소를 주계로 통폐합하면서 무주현(茂州縣)에 속하게 된 면(面)으로 바뀌었다.


당시 무풍현(茂豊縣)이 관할하던 행정구역은 풍동면(豊東面)의 현내리, 지성리, 금평리 풍남면(豊南面)의 철목리, 증산리, 은산리, 횡천면(橫川面)의 일부인 삼거리, 덕지리 등에 해당되었으며 지금은 경상남,북도와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남사고비결]의 삼풍지지에 대하여

 

남사고 비결은 첫째, 둘째 구절에 이어 세 번째로 대를 이어가는 법, 생명줄을 이어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사상에는 생명의 성스러움과 존중이란 매우 중요한 생명철학이 잠재해 있다. 인간을 神이 창조한 자연의 개체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의 진리가 속속 담겨있다는 자아발견에 의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요즘 들어서 불임증 환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생명을 초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절박함, 그들에게 이 문귀는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창생들아! 너희가 생명을 이어가려면, (네가 태어날 때 네 부모님들에게 한 無言의 약속, 이상 命이라고 함, "부모님의 인연으로 내가 사람으로 탄생하였으니 나 역시 자식을 낳아  생명이 가야하는 길을 열겠노라는 약속) 길한 별이 비치는 곳, 진리의 마을, 신천촌으로 가라. 이게 무슨 말일까. 즉 대를 잇고자 한다면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라는 주문이다. 인간의 참된 사랑은 학문이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이 귀감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십승지인 신천촌에 갈 수 있을까? 그 방법이 양백삼풍이란 진리다. 이 진리는 지식이나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알 수 없다고 했으니 욕심이 많거나 관념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지식에 병든 사람들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글이다.

 

대를 잇는데 삼풍과 양백이라니,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양백과 삼풍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 같으면 진리적 삶을 살아가는데도 지식, 사랑하는데도 지식, 대를 잇는데도 지식, 모든 면에서 지식과 정보로서 해결하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서는 해결책이 없다. 만약 해결책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을까. 방황하는 사람, 질병으로 공포에 떠는 사람, 수많은 정신질환자들, 아무리 발전된 과학이 있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문제이다. 과학이 생명의 비밀을 밝혀냈다고 홍보하지만 그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편파적으로, 상업적으로 사용될 것이 분명하고 또한 학문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백삼풍이란 진리는 무엇일까? 비결에서 말하길 양백양백 하양백 선후천지 시양백 하도낙서 영구수 심령의백 시양백 삼풍삼풍 하삼풍 비산비야 시삼풍 세인부지 화우로 무곡대풍 시삼풍이라고 했다. 다음에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터, 여기는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양백양백하는데 무엇이 양백인가? 선후천지가 양백이고 하도낙서의 신령한 수리 양백이고 신령한 마음과 깨끗한 몸이 양백이다. 삼풍삼풍하는데 무엇이 삼풍인가? 산에도 없고 들에 도 없는 것이 삼풍이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불과 비와 이슬이 삼풍이고 씨가 없어도 대풍을 얻는 것이 삼풍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兩白이란 두 개의 흰 것이란 말로서 신령의백시양백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신령한 마음과 깨끗한 몸을 말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선후천지와 하도낙서에 관한 것은 다음 설명으로 미룬다, 삼풍 역시 세상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불과 비와 이슬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씨앗이 없지만 늘 대풍을 거둘 수 있는 것이라고 첨언하였다. 화우로에 대한 것도 다음에 설명키로 한다.

 

구궁은 아홉 개의 궁전이란 의미다. 이것은 인체의 궁전, 즉 단전을 의미한다. 인체의 내부에는 9홉개의 장기들로 되어있다. 그것들은 자연에 있는 수많은 것들과 조화할 수 힘을 가진 장기로서 우주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을 가질 수 있음도 9개의 단전 때문이다. 독립심, 자립심, 일치심, 포용심, 조화심, 초월심, 청정심, 관음심, 창조심등 인간의 성품, 역시 단전에서 나온다고 보아진다. 가령 신장과 심장은 물과 불을 담당하고 간과 폐는 금(金)와 목(木)을 관장하고 장과 두뇌는 기(氣)와 토(土)를 관장한다. 이들은 모두 음양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생명체로서 항상 中의 기능을 지킨다.

 

가일십승리(可一十勝理)는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이것이 십승의 이치가 된다는 뜻인데 一이 문제다. 일은 하나란 뜻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이란 의미로서 우주 또는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생명, 불교적 용어로 나의 本來面目이란 뜻으로 보아야 한다. 즉 사랑과 진리적 삶을 살아가려면 거짓된 나가 아닌 진실한 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첨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춘만건곤복만가라고 했다. 건곤(乾坤)은 하늘과 땅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인체와 정신을 말한다. 즉 인체는 땅에서 정신은 하늘에서 온 것임을 비유하는 것이다. 몸과 정신이 봄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그렇게 될 경우 복이 넘치는 가문이 된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흔히 쓰는 말로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이 있다. 이 글귀는 입춘대길(立春大吉)과 상통하는 말이다. 봄이란 생명이 활짝 피는 계절이다. 즉 춘만건곤은 인체와 정신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화(禍)와 액운은 멀어지고 복이 충만해진다는 뜻이다.

 

屋은 육체가 거하는 집이고, 家는 정신이 거하는 집을 의미한다. 우리말에 衣食住란 말이 있다. 衣는 생명의 옷으로 몸이며, 食은 생명이 먹는 음식인 깨달음이고, 住는 생명이 거하는 집으로 곧 정신이다. 몸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 생명이 먹는 음식인 깨달음이 중요하고 마지막으로 정신이 중요하다. 衣을 육신이 입는 옷으로 해석하고 食을 육신이 먹는 음식으로 해석하고 住을 육신이 사는 집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欲識蒼生保命處 吉星照臨眞十勝(욕식창생보명처 길성조림진십승) 兩白三豊眞理 眼赤紙貨人不睹(양백삼풍진리 안적지화인부도)

九宮加一十勝理 春滿乾坤福滿家(구궁가일십승리 춘만건곤복만가)

(설명)

창생이 命을 보존할 곳은 길한 별이 비치는 참된 십승지다. 양백삼풍의 진리는 지식이나 재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볼 수 없다.

아홉 개의 단전과 나를 합한 것이 십승의 이치다. 몸과 정신에 봄기운이 가득하면 복이 충만한 家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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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내(縣內)리 현내(縣內)마을 

 

무풍(茂豊)은 옛날 신라때는 무산현(茂山縣)라고 불렀었다.현내라는 뜻도 원래 현(縣)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으므로 현내리라고 했다. 현내리는 또 상리(上里), 하리(下里), 고도(古島), 원촌(院村), 두평(斗坪), 문평(文坪), 지동(地東),신촌(新村), 북리(北里), 9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우리의 옛 마을 이름이 그러하듯이 모두가 한문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상리(上里)나 하리(下里), 북리(北里)등과 같이 윗쪽에 있는 마을이 상리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 하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 북리라 불렀을에 틀림이 없다.무풍은 특히 유학으로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이곳에 은거해 많이 살았으므로 지명(地名) 또한 그런 연유에서 온 것들이 대중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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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평(金坪)리  

 

금척(金尺)마을

이조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 7가구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래 피난처로 유명했던 곳이라 한말(韓末)에도 서울등지 등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다. 금척마을 뒷산엔 옥녀봉(玉女峰)이란 아름다운 산이 있다. 이 산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 등이 마치 금으로 만든 잣대와 같다 해서 금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곡(馬谷)마을

마곡마을은 3백여년전에 창녕조씨(昌寧曺氏)와 화순최씨(和順崔氏),행주기씨(幸州奇氏)가 차례로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그 뒤 밀양박씨(密陽朴氏)도 이곳에 이거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마곡마을 뒷산엔 죽전산(竹田山)이 말의 형체를 하고 있다. 대밭날이라고 부르는 이 산의 모습이 마치 말이 우뚝 서있는 형상이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마실'이라고도 부른다. 마곡(馬谷)이라고 부르는 것도 말의 곡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해방후 번성기에는 54가구까지 이르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겨우 32가구가 한 집안 식구들처럼 사이좋게 살고 있다.


덕평(德坪)마을

덕평마을은 이조 조선왕조 철종(哲宗) 11년(1860년) 진주하씨(晋州河氏)등이 이곳에 이거해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덕평마을도 대덕산밑에 있는 마을 중의 하나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도 대덕산(大德山)의 '덕'자와 넓은 평원이라는 뜻의 '坪'자를 붙여 덕평이라 부른다. 이마을도 마곡리와 마찬가지로 한때는 3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20여 가구가 농사를 주업으로 살고 있다.


부평(富坪)마을

경상북도 금능군 대덕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평마을은 조선왕조 선조13년 1580년에 경주이씨가 당시 풍동면 오금산(지금의 부평앞산) 밑 안터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당시의 안터에는 겨우 7가구가 살았으나 1936년 병자(丙子)년 대홍수때에 6가구가 떠내려가고 겨우 1가구가 지금의 마을로 이거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마을이 한창 번창할 때는 50가구가 넘었으나 지금은 22가구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계당(桂堂)마을

계당마을 역시 경상북도 금능군 대덕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계당마을은 3백여년전 조선왕조 숙종(肅宗)때 재령강씨(載寧康氏)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 마을도 한창 번성할대는 30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18가구만 남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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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리(池城里) 율오(栗烏)마을 

 

이 마을은 처음 기씨(奇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이거해 오면서 마을이 되었다. 그 뒤 1백여년이 지난 후(지금부터 2백년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입주했고, 이어서 전주최씨, 달성서씨가 차례로 이거해 살고 있다. 오동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대덕산엔 범바위가 있다. 이 범바위와 마주 바라보이는 동네 뒷산엔 까마귀바위가잇다. 옛날 대덕산 호랑이가 칠개재에 있는 개 일곱 마리를 보고 산에서 내려와 잡아먹으려는데 까마귀바위에서 난데없이 "까욱까욱"하고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입곱마리의 개는 그때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호랑이 먹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 마을을 오동, 다시 말하면 까마귀마을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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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목(哲木)리 철목(哲木)마을 

 

철목리가 마을이 형성된 것은 거의 5백여년이 된다. 조선왕조 세종(世宗)대 원주이씨 이여공(李汝恭)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머물면서 마을을 이뤘다. 그 뒤 안동권씨 권칭(權稱)이 서울에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선조(先祖) 11년 순흥안씨인 안호(安豪)라는 사람이 이거했고,   전주최씨인 최영보(崔永甫)가 보성에서 무주현감(茂朱縣監)으로 왔다가 이곳에서 머물러 살게 되면서 마을이 크게 번창했다. 철목리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자연부락 5개부락으로 나뉘어졌다. 원철목(元哲木), 신기(新基), 우암 , 우평, 온월(溫月), 신기(新基)는 원철목이 생긴 후에 됐다고 해서 새터라 했고 우암은 괴상한 바위가 있다 해서 우암이라 불렀다. 온월은 달빛이 솟아나면 온 마을이 고루고루 비친다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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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리(曾山里)  

 

석항(石項)마을

1519년(조선왕조 중종임금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신세령(申世寧)이라는 사람이 거창(居昌)현감으로 부임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신세령이 잠시 이곳에서 쉬는 동안 사방을 바라보다가 이곳이 살기 좋은 곳임을 알고 관직을 그만 두고는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이 이마을이 형성된 시초가 되었다. 지금의 도로가 나기 전엔 이 마을 입구엔 커다란 바위가 쌍벽을 이루며 서 있었다. 이 바위가 살기가 좋은 마을의 목이 되었다 해서 석항(石項)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바위가 목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이 마을 밖엔 옛날에 섬밭이라는 마을과 쟁이(白丁)마을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모두 논밭으로 변하여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원증산(元曾山)마을

원증산마을 앞엔 시루를 옆어 놓은 것 같이 둥글둥글하면서도 완만한 경사의 시루봉이 펑퍼짐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이 증산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시루봉(甑峰)의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증산(甑山)이 차츰 증산(曾山)이라고 불러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원증산마을은 석항(石項)마을에서 평산신씨(平山申氏), 지성(池城)마을에서 달성서씨가 입주해 살면서 마을이 형성돼 지금은 34가구가 평화롭게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동(砂洞)마을

이 마을은 경상북도에서 도마치를 거쳐 삼남지방을 잇는 큰 길가에 위치해서 본동에 주막담이 있었고 갈마골(曷馬)은 농가가 살고 있었으나 폐허가 되었다 . 망덕산(望德山) 밑 연못에서 이 마을 앞을 지나 월해평(月海坪)까지 모두 모래땅으로 되었다 해서 모래사(砂) 마을동(洞), 사동이 되었다. 이 마을은 대대로 부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마을 앞에 있는 큰 나무를 벤 후부터 차츰 빈촌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지금부터 60여년전 일이었다. 당시 면장이었던 최학준(崔鶴準)이라는 사람이 면사무소를 짓는데 쓰려고 나무를 베려는 며칠 전 나무위에서 집을 짓고 살던 까치가 옆에 있는 나무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다. 최면정은 이상히 생각하면서도 끝내 나무를 베고 말았다. 그러자 난데없이 큰 구렁이 두 마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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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銀山)리

 

은일(銀一)마을

은산리는 속동(俗洞), 은고(銀庫), 한치(寒峙)마을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법정리이다. 속동은 원주이씨가 2백여전 전에 벌써 정착해 살았고 은고는 남원양씨가 같은 시기에 정착해 살았다.. 또 한치마을은 이미 그 보다 1백여년 전에 해주오씨가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아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어떤 풍수(風水)가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 보니 산세가 마치 은(銀)으로 파묻힌 커다란 광맥으로 보였다. 그러나 풍수는 자기의 힘으로는 그 많은 은을 어찌할 수가 없으므로 그냥 그 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부터 이 마을을 은산(銀山), 은으로 묻힌 산이라는 뜻으로 불렀다. 또 은으로 가득 찬 창고라 해서 은고(銀庫)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은고마을은  서기 1620년대 남원양씨가 정착 하면서 은고뱅이(隱古方) 라 부르다가 숲이 울창하여 동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은고(隱古) 라고 불렀다. 그 당시 어느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살펴보고 거대한 은맥(銀脈)이 묻힌 곳이라고 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은고(銀古)를 은고(銀庫) 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또한 이곳의 지형이 마치 늙은 개의 등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노구지리(老拘地里)라 부르는 곳과 절이 있던곳이 있어 불당골(佛堂谷)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은고 마을은 산세가 좋아 선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지금도 살기좋은 곳이다. 한치는 한재 혹은 큰재로 부른다. 옛날 이름은 대현(大峴). 삼거리로 이르는 괴목령(槐木嶺)을 큰재 혹은 차운재라고 부른 것은 항상 찬바람이 분다 하여 찰 한(寒) 재 치(峙) 두글자를 합하여 한치라고 한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마을은 은으로 이룬 산이라는 것과는 달리 은과 비슷한 광물은 한 점도 발견할 수가 없다.


오방(吾芳)마을

오방마을은 망덕산(望德山)을 주봉으로 하여 마초봉(馬超峰), 비래봉(飛來峰), 고봉(高峰), 시루봉으로 에워싸인 오산(吳山),방곡(芳谷) 2개 마을로 이루고 있다. 오산마을은 당초 밀양박씨 맹시 강씨가 정착해 살았다고 하난 확실한 것은 아니고 다만 위와 같은성씨의 묘비가 여러곳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권(權),김(金),최(崔),안(安)씨 등이 살고 있다. 오산이라는 뜻은 원래 이 마을은 망덕산을 비롯 높은 산이 5개로 둘러싸인 마을이라 해서 오산(五山)이라 했다는 이야기와 옛부터 오동나무가 어찌나 많았던지 오동나무로 산을 이루었다고 해서 오산(梧山)(, 혹은 오동실,오무실로 이름을 지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방곡(芳谷)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항상 아름다운 꽃과 울창한 숲으로 싸인 마을이란 데서 연유한다. 지금도 마을 앞에 3백여년 전에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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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지(德地)리 

 

상덕(上德)마을

경상남도 거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 대덕산(大德山)과 삼봉산(三峰山)을 중심으로 북수(北首), 부흥(富興), 도마(道馬) 3개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북수마을은 2백여년 전 안동권씨와 화순최씨가 차례로 입주해 마을을 형성했고, 부흥마을은 하동정씨가 3백 40년전에 정착했고 이어 남원양씨가 이거하면서 마을이 되었다. 또 도마마을은 인동장씨가 거주했다 하나 그 후손은 한 사람도 없고 마을 뒷산엔 임자 없는 묘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후 중종(中宗) 14년 1519년 기묘사화때 평산신씨인 신세령이 거창현감으로 부임하다가 장차 이 마을이 복된 땅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살았다. 대덕산(大德山)과 망덕산(望德山)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해서 덕지리라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덕(下德)마을

덕동(德同), 외갈마(外葛馬), 내갈마(內葛馬), 안실(安實) 등 4개 마을이 흩어져서 덕지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3백 80년 전에 남평문씨가, 그리고 뒤 이어 김해김시, 영천이씨가차례로 들어와 살면서차츰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다. 덕동이라는 이름은 대덕산(大德山)과 망덕산(望德山)의 덕(德)자와 그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동(洞)자를 붙여 덕동(德洞)이라 했다고 한다. 갈마(葛馬)는 마을 뒷산에 갈마음수혈(葛馬飮水穴)이라는 것이 있어 갈마라 불렀고, 안실(安實)은 가을에 오곡백과가 풍요를 이루고 튼튼한 열매를 맺게 해달 라는 뜻에서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해방 후 이 마을이 한창 번창할 때는 1백여 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많이 이거를 하고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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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三巨)리 

 

상오정(上梧亭)마을

원래 삼거리는 상오정(上梧亭), 중오정(中梧亭), 삼거(三巨)리 3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중오정은 전답으로 변하고 상오정과 삼거리만 남게 되었다. 이 마으리이 이루어 진 것은 지금부터 3백여년 전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왕조 태조 임금을 도와 1등공신이 된 안동김씨 김사형(金士衡)의 10대의 손인 김 광열(金光烈)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부터다. 그 뒤 해주오씨화 선산곽씨도 이곳에 이거했다. 당시 나라에선 이 마을이 양반들의 마을이라 해서 세금도 내지 않게 했다. 울창한 나무로 경치가 아름다워 놀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 해서 정자(亭子)란 글자가 붙여졌다. 상오정, 중오정은 윗 마을과 아랫마을의 이름이다. 삼거리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과 은산(銀山), 덕지(德地)로 가는 세갈레 길이라 하여 삼거리라 불려오고 있다. 6 25후 이곳에 도로가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 야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산간 마을이라 벼농사는 없고 밭농사가 주업이며 옥수수와 고랭지 채소가 많이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