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무주군(茂朱郡) 읍, 면 유래

풍월 사선암 2008. 2. 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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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茂朱郡) 읍, 면 유래

 

무주읍(茂朱邑)은 옛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국(馬韓國)에 속해 있다가 삼국시대(三國時代)는 346년(百濟 近肖古王時) 百濟가 마한(馬韓)을 정복하면서 백제(百濟)에 속한 적천현(赤川縣)으로 신라(新羅)의 무산(茂山)과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후 757년(新羅 景德王 16년) 신라(新羅)가 삼국(三國)을 통일하면서 신라(新羅)의 영역에 들게 되었고 적천(赤川)이라는 지명을 단천(丹川)으로 바꾸어 전주 진례현(全州 進禮縣)의 속현(屬縣)으로 소속되어 있다가 고려(高麗) 건국후 940년(高麗 太祖 23년)에 주(州), 군(郡), 현(縣)을 정비하면서 단천(丹川)의 지명을 주계(朱溪)로 개칭(改稱)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조선(朝鮮)을 개국한 후 1413년(太宗 13年)까지 사용하여 오다가 1414년(太宗 14年) 전국의 행정구역을 팔도제(八道制)로 개혁하면서 무풍(無風)의 무(茂)자와 주계(朱溪)의 주(朱)자를 따서 무주(茂朱)라는 새로운 지명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 茂朱縣이 관할하던 행정구역은 부내면(府內面), 북면(北面), 서면(西面), 신풍면(新豊面), 풍서면(豊西面), 풍남면(豊南面), 풍동면(豊東面), 상곡면(裳谷面), 유가면(柳加面) 등 9개면을 관할했으며 지금의 무주읍(茂朱邑) 부내면(府內面)의 읍내리, 오산리, 차산리, 당산리, 북면(北面)의 내도리, 서면(西面)의 대차리, 용포리, 가옥리에 해당된다.


1674년(顯宗 15년) 조정에서는 조선조실록(朝鮮朝實錄) 봉안지였던 무주현(茂朱縣)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면서 금산(錦山)에 속해 있던 안성현(安城縣)을 무주부에 예속시켜 안성현(安城縣)이 관할하던 횡천면(橫川面), 일안면(一安面), 이안면(二安面)을 편제하여 무주부(茂朱府)에서는 12개면을 관할하는 치소(治所)가 되었다.


그 후 1914년(日政時)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금산군(錦山郡)에 속해 있던 부남면(富南面)과 부동면(富東面)의 일부인 내도리(內島里)가 예속되었고 본읍은 부내면(府內面)과 북면(北面), 서면(西面), 신풍면(新豊面)의 일부인 장백리를 통폐합하여 무주면(茂朱面)으로 편제되었다가 1979년 5월 1일 무주읍(茂朱邑)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풍면(茂豊面)은 옛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변진국(弁辰國)을 맹주국(盟主國)으로 하는 감문국(甘文國)에 속해 있었다. 231년(新羅 助賁王 2年) 신라(新羅)가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무산(茂山)이라 하고, 청주 무산현(靑州 茂山縣)이라 하는 치소(治所)를 두게 되었으며 백제(百濟)의 적천현(赤川縣)과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후 661년(新羅 文武王 元年) 신라(新羅)가 청주를 폐지하고 감문군(甘文郡)을 두면서 무산(茂山)이 감문군(甘文郡)에 속하게 되었으며 757년(新羅 景德王 16年) 삼국(三國)을 통일하면서 전국을 아홉 개의 주(州)로 나누면서 무산(茂山)의 지명을 무풍(茂豊)으로 바꾸어 상주 개령군 무풍현(尙州 開寧郡 茂豊縣)으로 개칭(改稱)되었다가 고려(高麗)가 건국한 후 997년(高麗 成王 14年) 전국의 행정구역을 십도제(十道制)로 대 개혁을 하게 되면서 무풍(茂豊)은 지금의 영남권역(嶺南圈域)에서 벗어나 호남권역(湖南圈域)인 강남도 남원부 진례현(江南道 南原府 進禮縣)의 속현(屬縣)으로 예속케 되었으며 그 후 조선(朝鮮)건국 이후 1413년(太宗 13年)까지 주계와는 서로 다른 소현(小縣)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414년(太宗 14年) 행정구역 개편으로 치소(治所)를 주계(朱溪)로 통폐합하면서 무주현(茂朱縣)에 속하게 된 면(面)으로 바뀌었다.


당시 무풍면(茂豊面)이 관할하던 행정구역은 풍동면(豊東面)의 현내리, 지성리, 금평리, 풍남면 (豊南面)의 칠목리, 증산리, 은산리, 횡천면(橫川面)의 일부인 삼거리, 덕지리 등에 해당되었으며 지금은 경상남·북도(慶尙南·北道)와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설천면(雪川面)은 옛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마한국(馬韓國)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시대(三國時代)는 백제국(百濟國)에 속한 적천현(赤川縣)에 속해 있던 고을로 신라(新羅)의 무산현(茂山縣)과 인접하여 국경을 이루고 있던 최전방지역이었으며 당시 양국(兩國)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제일 많은 시련을 겪었던 곳이기도 하다.


후에 통일신라(統一新羅)때는 단천(丹川), 고려(高麗)때 주계(朱溪), 조선조(朝鮮朝)때 무주(茂朱)에 속했던 설천(雪天)은 우리나라 통신(通信)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역(驛)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소천역(所川驛)으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었으며 1414년(太宗 14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무풍현(茂豊縣)과 주계현(朱溪縣)을 통폐합할 때 설천(雪天)을 풍서면(豊西面)으로 하였고 그 관할구역은 소천리, 대불리, 미천리, 장덕리 였으며, 1914년(日政時)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풍서면(豊西面)과 신풍면(新豊面)의 일부인 기곡리, 길산리, 청량리를 편입하고 1674년(顯宗 15年) 무주현(茂朱縣)의 도호부(都護府) 승격 당시 금산(錦山)에서 무주(茂朱)로 예속된 안성현(安城縣) 소속이었던 횡천면(橫川面)의 두길리, 심곡리, 삼공리를 통폐합하여 설천면(雪川面)이라는 행정구역이 편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설천(雪天)이라는 지명은 옛날 구천동(九千洞)에 구천명의 승려가 살 때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던 쌀뜨물이 이곳까지 칠십리(七十里)계곡을 눈과 같이 하얗게 흘러 내렸다하여 눈 설(雪)자 내 천(川)자를 써서 설천(雪天)이라 했다는 전설도 담고 있다.

 

적상면(赤裳面)은 옛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적천(赤川), 단천(丹川), 주계(朱溪)에 속했던 고을로 고려말(高麗末) 최영(崔塋)장군이 탐라(耽羅)를 토벌하고 귀로(歸路)에 이곳을 지나다가 적상산(赤裳山)을 보고 천혜의 요새(要塞)라고 감탄하여 왕에게 축성(築城)을 건의했다는 명산(名山)이 소재한 고을이다. 1414년(太宗 14年) 행정구역 개혁당시 무풍(茂豊)과 주계(朱溪)가 통합될 때 용담거리(龍潭街)로 알려진 적상(赤裳)을 유가면(柳加面)이라 이름하고 사천리, 삼가리, 방이리, 삼유리 그리고 안성의 진도리를 관할하게 되었었고, 1914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도리를 제외한 유가면과 사전리를 제외한 상곡면의 북창리, 포내리, 괴목리, 사산리를 통폐합하여 적상면(赤裳面)이라 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적상(赤裳)이라는 지명은 고려말(高麗末) 최영(崔塋) 장군이 이곳을 지날 무렵이 마침 가을이라 병풍처럼 깍아 세운 듯한 절벽 산위에 붉게 물든 가을단풍이 마치 여인의 치마폭처럼 아름답다하여 붉을 적(赤)자 치마 상(裳)자를 써서 적상(赤裳)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


안성면(安城面)은 옛 삼한시대(三韓時代)는 마한(馬韓)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시대(三國時代)는 백제국(百濟國)에 속하여 진잉을군(進仍乙郡) 또는 진내군(進乃郡)에 속해 있었으며 757년(新羅 景德王 16年) 신라(新羅)가 삼국(三國)을 통일하면서 진례군(進禮郡)으로 승격시켰다가 983년(高麗 成宗2年)에 진례현(進禮縣)으로 강현(降縣)되었던 지금의 금산(錦山)에 속해 있던 하나의 속현(屬縣)으로서 안성현(安城縣)이라는 치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안성(安城)은 고려(高麗)의 명신(名臣) 김신(金侁)이 이 고장 공진(貢進) 출신으로 왕명을 받고 원(元)나라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하여 조정에서는 큰 상을 내렸고 1305년(高麗 忠烈王 31年) 금산(錦山)은 김신(金侁)의 고향이라 하여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을 시키게 되었던 계기가 되어 안성현(安城縣)은 금주군(錦州郡)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안성현(安城縣)이 관장하던 구역은 일안면(一安面)의 공정리, 죽천리, 공진리, 이안면(二安面)의 장기리, 죽천리 일부, 덕산리, 금평리, 횡천면(橫川面)의 두길리, 심곡리, 삼공리, 삼거리였으나 1674년(顯宗 15年) 적상산성(赤裳山城) 사고(史庫)의 관리문제로 무주현(茂朱縣)이 승격되면서 금산(錦山)에 속해 있던 안성현(安城縣)이 폐현(廢縣)되고 무주부(茂朱府)로 예속하게 되어 안성면(安城面)으로 편제가 되었다가 그후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개편으로 이안면(二安面)과 일안면(一安面), 상곡면(裳谷面)의 일부인 사전리, 유가면(柳加面)의 일부인 진도리를 통폐합하여 옛 금산(錦山)에 속해 있었을 때의 명칭인 안성(安城)으로 하여 면(面)을 편제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남면(富南面)은 당초 대곡소(大谷所)라 하여 옛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국(馬韓國)에,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백제국(百濟國)에 속해 있었다.


백제(百濟)의 웅진시대(熊津時代)와 사비시대(泗批時代)를 거치면서 두시이현(豆尸伊縣) 또는 부시이현(富尸伊縣)에 속했던 한 고을로 660년(新羅 武熱 7年) 신라(新羅)가 백제(百濟)를 멸망시키면서 이성현(伊城縣)을 진례현(進禮縣)으로 개칭(改稱)하였으나 1012년(高麗 縣宗 3年) 금계군(錦溪郡)으로 승격시켰었다.


그후 1173년(高麗 明宗 3年) 금계군(錦溪郡)에서 부리현(富利縣)을 분할하여 치현(治縣)토록하여 부남(富南)은 부리현(富利縣)의 영역(領域)에 들게 되었다.


1305년(高麗 忠烈王 31年) 금계군(錦溪郡)에 속해 있는 안성현(安城縣) 출신의 명신(名臣) 김신(金侁)이 왕명을 받고 원(元)나라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하여 금계군(錦溪郡)을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면서 부리현(富利縣)을 폐현(廢縣)하게 되었다.


이에 부리현(富利縣)에 속해 있던 구역을 부동면(富東面), 부북면(富北面), 부서면(富西面), 부남면(富南面)으로 편제하여 부남면(富南面)은 이때부터 하나의 독립된 행정구역을 이루게 된 동기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부남면(富南面)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가 없으나 이전까지의 부남면(富南面)은 금산(錦山)에서의 상당한 거리에 위치하여 지금의 장안리(長安里) 부근인 대곡(大谷)에 간단한 행정을 수행할 수 있는 치소(治所)를 설치하여 대곡소(大谷所)라 했던 것으로 보이며 옛날에는 이곳에 시장(市場)까지 섰다는 기록도 있다.


그후 1414년(太宗 14年)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금주군(錦州郡)을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하게 되어 부남면(富南面)은 금산군(錦山郡)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14(日政時)년 군·면 폐합의 행정구역 개편시 금산구(錦山郡)이 진산군(珍山郡)을 통폐합하면서 당초 부리현(富利縣)에 속해 있던 4개면 중 부동면(富東面), 부북면(富北面), 부서면(富西面)을 부리면으로 폐합하여 금산군(錦山郡)에 편제되었고 부동면(富東面)의 일부인 내도리(內島里)를 무주군 무주면(茂朱郡 茂朱面)으로 가당리, 굴암리, 대유리, 대소리, 고창리, 장안리를 관장하던 부남면(富南面) 전체를 무주군(茂朱郡)에 편제하고 대소리(大所里)에 면사무소(面事務所)를 설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