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무주군(茂朱郡)의 연혁(沿革)

풍월 사선암 2008. 2. 5. 22:33

무주군(茂朱郡)의 연혁(沿革)


1.변천 개요

무주군은 예로부터 서로 다른 부족국가(部族國家) 또는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가 병합(倂合) 또는 통폐합(統廢合)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구역을 이룬 고장이다.

 

즉 삼한시대는 현재의 무주읍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주계(朱溪)가 마한 국(馬韓國)에 속해 있었고 현재의 무풍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무산(茂山)은 변진국(弁辰國)에 속해 있었는데, 삼국시대에 와서도 주계는 백제, 무산은 신라에 속하여 각기 다른 국가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신라나 삼국을 통일하게 된 소위 통일신라시대부터 주계와 무산은 비로소 같은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계는 전주(全州)의 진례현(進禮縣, 지금의 금산(錦山))에 속하게 되었고 무산은 상주(尙州)의 개령군(開寧郡, 지금의 금릉(金陵))에 속하게 됨으로서 서로 다른 행정구역으로 분리 되었다가 고려에 이르러서야 주계와 무산은 같은 행정구역인 강남도(江南道)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두 고을은 서로 다른 소현(小現)으로 각각 분리되어 조선초까지 이어져 왔다.

 

조선초 행정구역 개편시 주계와 무풍을 통폐합하여 무주현(茂朱縣)으로 개칭하게 되었고 후에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게 되었던것이 계기가 되어 금산에 속하고 있던 안성(安城)과 구천동(九千洞)을 본군에 편입하면서 무주도호부로 승격하여 오늘날 무주군으로의 기틀이 잡혔다.


2.시대적 변천

가.삼한시대-(상고-231년)

주계(朱溪, 지금의 무주읍 지역 중심)는 마한국에 속해 있었고 무산(茂山, 지금의 나제통문(羅濟通門) 동쪽지역)은 변진국을 맹주국(盟主國)으로 하는 감문국(甘文國)에 속해 있었다.


나.삼국시대-(231-660년)

백제는 346년(근초고왕 원년)에 마한을 평정(平征)하면서 주계를 정복하고 지명을 적천(赤川)이라 하였고, 신라는 231년(조분왕(助賁王) 2년)에 변진의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한 후 무풍의 지명을 무산으로 바꾼 다음 현(縣)을 설치했다.


다.통일신라시대-(660-937년)

신라는 660년(태종무열왕 7년)에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므로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다. 그때부터 적천(赤川)은 사실당 신라에 속하게 되었는데 757년(경덕왕 16년) 전국을 상(尙), 양(良), 강(康), 한(漢), 삭(朔), 웅(熊), 명(溟), 전(全), 무(武)의 9주(州)로 나누는 행정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때 주계는 백제때의 지명 적천(赤川)을 단천(丹川)으로 바꾸고 전주 진례현(進禮縣) 속현(屬縣)으로 삼았고, 무산(茂山)은 무풍(茂風)으로 고쳐 상주(尙州) 개령군(開寧郡)에 속하게 했다. 그러나 신라의 말기인 920년(경명왕 4년)이 고장에서는 대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진성여왕때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본고장 진례성(進禮城)을 공략할 때 신라가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청한데서 비롯하여 삼국의 군사들이 한데 모여 싸움을 벌임으로서 수많은 피를 흘렸던 사건이 있었다.


라.고려시대-(937-1392)

왕건에 의하여 고려가 건국되고 신라가 멸망된 후, 고려 940년(태조 23년) 주(州), 군(郡), 현(縣)을 개정하면서 진례현(進禮縣)에 속했던(丹川縣)을 주계현(朱溪縣)으로 개칭하였으나 개령군(開寧郡)에 속했던 무풍현(茂豊縣)은 지명을 그대로 두었다. 그후 15년이 지난 995년(성종 14년) 전국을 10도제(十道制)로 개혁하면서 주계(朱溪)와 무풍(茂豊)을 같은 행정구역인 강남도 남원부 진례현(江南道 南原府 進禮縣)에 속한 속현(屬縣)으로 편제하여 두 고을을 각기 다른 소현(小縣)으로 분리해 놓았었다. 그러다가 1018년(현종 9년) 10도제(十道制)를 폐지하고 5도제(五道制)를 실시하면서 주계와 무풍을 전라도에 예속하게 했으며, 1172년(명종 2년) 소현의 감무제(監務制)를 실시하면서 주계와 무풍 두 현에 감무(監務) 1인으로 겸임케 하여 1391년(공양왕 3년)까지 같은 행정체제에 합병하게 되었다.


마.조선시대-(1392-1910년)

고려가 34대 공양왕을 끝으로 멸망하고 이태조에 의하여 조선왕조가 건국 되면서도 고려때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조선 1414년(태종 14년) 전국을 8도제(八道制)로 바꾸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이때 주계와 무풍 두 현을 통합하고 무풍의 무(茂) 와 주계의 주(朱) 자를 따서 무주(茂朱) 라는 새로운 지명을 만들었다. 이에 본군은 이때부터 비로서 단일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같은 현민(縣民)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1614년(광해 6년) 분군의 적상산(赤裳山)에다 사고(史庫)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평안도 묘향산에 있던 조선조실록이 옮겨졌고, 1641년(인조 19년) 선원각(璿源閣)이 설치가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1674년(현종 15년) 2월에는 무주현이 도호부로 승격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까지 금산군에 속하고 있던 안성과 구천동이 본군으로 편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조선말기 1895년(고종 32년) 부사제(府使制)가 폐지되고 군수제(郡守制)로 바뀌면서 잠시나마 전라도남원부에 속해 있다가 그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년) 전라도를 남, 북으로 나누면서 전라북도 전주부 무주군 (全羅北道 全州府 茂朱郡)으로 편제되었다.


바.현대-(1910년 이후)

구한말 1910년(순종 4년) 한일합방으로 인한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4년 째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관찰사의 관청을 도청으로 바뀌면서 본군의 관할 12개 면과 금산군에 속하던 부남면을 편입하여 6개 면으로 개편, 전라북도 무주군이 되었다. 그후 1979년 5월 1일 전국의 군청 소재지의 면을 읍으로 승격하게 됨에 따라 종전의 무주군이 무주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본군의 행정구역은 1읍, 5 면, 3개 출장소로 구획되어 있다.

 

년대

시대별 서기년역 역사

    삼한시대

       주계는 마한국 무풍은 변진국에 속함

    삼국시대

    신라조분왕

      231

   신라의 무풍을 무산이라 명함

    백제근초고왕

      346

   백제의 주계를 적천이라 명함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 년

      757

   무산현을 무풍현, 적천현을 단천현으로 개칭

    고려시대

    태조 23 년

      940

   단천현을 주계현으로 개칭

    조선시대

    태종 14 년

    1414

   무풍과 통합, 무주현으로 개칭

    현종 15 년

    1674

   무주현이 도호부로 승격 금산의 안성현 편입

    고종 32 년

    1895

   부사제폐지 무주군으로 개칭

    구한말(현대)

 

    1914

   금산의 부남면 무주로 편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