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십승지의 무풍

풍월 사선암 2008. 2. 5. 17:00

[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역사지리

‘수십 군(群)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

십승지(十勝地)의 무풍은 현 무풍면, 피장처 원학동은 금원산과 남덕유 사이

 

새벽 별빛처럼 짧은 인생살이에서 누구라도 가슴 깊은 곳에 꿈꾸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고향일 수도 있고, 산모롱이 어느 양지바른 토담집일 수도 있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에 그리는 그 어떤 곳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곳일지라도 내 생명이 온전히 보전되고 가족들과 길이길이 오순도순 정 나누며 살고픈 곳일 게다. 박목월 시인은 그 오롯한 순심(順心)을 다음과 같이 절창하였다.

 

▲ 대덕산.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예부터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희구하였던 곳,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이 다르고, 시간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적으로 문화 속성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우리가 아는 이상향의 뜻과 유사한 용어 중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에덴동산 혹은 천국, 도교와 신선사상의 무릉도원, 삼신산, 청학동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라고 치더라도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吉地), 낙토(樂土), 혹은 낙원(樂園),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의 용어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는 말이다.


덕유산과 삼도봉에 에워싸인 무풍

 

▲ 백두대간 삼도봉 연맥.


승지라는 말은 뜻 그대로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 정감록이라는 기서(奇書)에서 국토의 열 곳을 구체적으로 지점하여 십승지(十勝地)라고 일컬었으며, 이것은 민중들에게 강력한 공간적 영향력을 끼쳤던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민중들은 정감록의 십승지론을 신봉하여 실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현지를 답사해 보면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었다. 그 열 곳의 십승지 중에는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골도 여럿 있는데, 덕유산과 삼도봉에 에워싸인 무풍 역시 십승지의 한 장소로 꼽혔던 곳이다.


그러면 공간적으로 동양과 서양에서는 각각 이상향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그 이상향이 되기 위한 구비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서양의 이상향에 해당하는 용어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어원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장소(Topia)가 아닌(U) 땅이었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제시된 이상향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이며 인위적으로 건설된 이상국가로서, 이것은 서양인의 이상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 월성계곡의 하류와 모암정.


반면 동양의 이상향에는 무릉도원이라는 아이콘이 대변하듯이 반드시 자연경관이 심미적으로 뛰어나고 주거환경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곳은 산으로 에워싸인 지역이라는 지리적 영역성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동아시아 이상향의 지도에서 산이라는 영역은 심리적인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의 핵심이자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조선조의 십승지 역시 모두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장소였음은 물론이다.

 

▲ 거창읍 학리.

 

그러면 정감록에서는 승지 열 곳을 어디라고 하였을까? 정감록이라는 책은 여러 문서들을 편집하여 구성한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명인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동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위에서 열거한 열 곳 승지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말하였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사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 만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십승지는 우선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오지에 위치한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란 및 호란 등의 전란과 정치적 혼란이었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다.

 

택리지에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기록


한편, 정감록의 본문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십승지는 또 오랫동안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도 요구되었으며, 아래에 나오는‘십승보길지지(十勝保吉之地)’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풍수적인 명당길지 조건 역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십승지가 대체로 경작이 양호하고 풍수가 좋은 배산임수의 자연 조건을 지니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 무주 나제통문.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이며 행정구역은 전라도이나 경상도 문화권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 역시 조선시대의 도로교통 조건에서 대로(大路)와의 접근성이 떨어져서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란과 정치적 환란의 굴곡에서 피폐하였던 민중들은 정감록이라는 책을 믿고 무풍 지역의 골짜기에 찾아들어 피난, 보신(保身)의 삶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정감록에 지점된 열 개의 승지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 십승지에 관련된 내용은 위에서 말한 정감록의 감결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우선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에 기록하기를,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역시 정감록의 한 편명인 ‘피장처(避藏處)’에는 ‘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에 원학동(猿鶴洞)이 있는데 숨어 살 만한 곳이다’는 내용도 있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무풍은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영역임은 분명하고, 다만 피장처에 소개된 원학동은 현재 금원산(金猿山)의 북쪽 골짜기에 해당하는 북상면 월성계곡 주변, 혹은 거창읍 학리(鶴里)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월성계곡은 남덕유산에 둘러 싸여 산수미가 장쾌하도고 빼어난 곳으로, 이 계곡 인근에는 많은 산간 마을이 입지하여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피장처에서 ‘덕유산 남쪽’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원학동은 금원산과 남덕유산 사이의 골짜기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거창읍 학리는 4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세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아늑하게 둘러싸인 산자락을 등지고 넉넉한 하천을 끼고 있어서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입지로 알려져 있는데, 정감록에 나오는 승지적 개념의 가능성 보다는 후대에 의미가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 덕산재에서 바라본 대덕산과 백두대간의 덕유산 연맥.

 

그러면 십승지 무풍의 역사지리적 입지조건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지리적으로 무풍은 서쪽으로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삼도봉 구간, 남쪽에서 동쪽에 걸쳐서는 덕유산 연맥, 북쪽으로는 민주지산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곳에 위치하여 있다. 수계(水系) 조건으로는 남대천의 지류가 주위의 산복에서 발원하여 구불거리면서 흐르다가 무풍에 이르러서는 합류하여 면소재지를 에워싸면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형국을 하고 있어 풍수적인 좋은 조건도 구비하고 있다.


선조들이 추구했던 승지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무풍은 원래 현이 있었던 곳으로서 행정구역명은 무풍현(茂豊縣)이었다. 현재의 무주(茂朱)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14년에 무풍(茂豊)과 주계(朱溪)를 합쳐 생겨난 이름인데, 무풍현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이었고, 주계현은 원래 백제의 적천현이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 무풍은 전라도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권으로 보자면 경상도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곧 무풍 지역은 백두대간의 마치와 주치(덕산재)를 넘어 경상북도의 지례, 김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것이다.


무풍이 지리적인 오지라는 사실은 반대편 덕유산 서사면 자락의 적상산에 사고(史庫)가 있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세기에 국가에서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침략하였을 때 근방의 수십 군(群)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무풍면 소재지 전경.

 

정감록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는 위에서 언급한 열 곳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장소가 추가되고 있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이상적인 주거지의 위치와 모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재구성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생명이 처한 총체적인 위기 상황의 사회 현실에서 생태환경적 가치에 대한 각성과 본연적인 삶의 질에 대한 지향은 옛 선조들이 추구하였던 승지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돌이키게 한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