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무주, '입수부리'에 걸린 말은 신라네

풍월 사선암 2008. 2. 3. 20:56

백두대간 문화읽기 / 무주, '입수부리'에 걸린 말은 신라네
 글 정희일기자|사진 이한구 기자

◇ 무주군 설천면 남대천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딧불이 서식지다.

무주군에서 관광개발 차원으로 적극 보호하고 있다지만 자연의 청정도를 가늠하는

지표 곤충 반딧불이의 이런 모습을 깨지 않는 개발을 이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무주‘입수부리’에 걸린 말은 신라네


백두대간 너머 서쪽엔 신라가 있다. 나제통문 안에는 무주군 설천면 일대와 무풍면이 들어앉아 있다. 석견산에 뚫어놓은 석굴 나제통문(羅濟通門). 원래는 고갯길이 있었고, 당시는 '나제통도'라 했다. 통문은 일제 때 신작로를 내면서 뚫었다.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된 것은 3∼4세기 경으로 신라의 조분왕과 백제의 근초고왕 때의 일이다.


그 후부터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300여 년 동안 이 일대는 양국의 영토분쟁으로 전화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통문을 경계로 같은 무주군이지만 언어와 풍속이 달랐고, 결혼도 쉽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풍속과 전통이 다르게 유지되어 왔다.


삼국시대에 무주군은 백제 땅인 적천현과 신라 땅인 무산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적천현은 통일신라 때 단천현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인 진예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 주계현이 되었다. 무산현은 경덕왕 때에 무풍현으로 고쳐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인 개령군에 속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1414년(태종 14)에 무풍현과 주계현을 합해 무주현이 되었다가 1914년에서야 무주군이 되었다.


이렇듯 무주군은 예로부터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였기에 이곳 사람들의 생활권도 세 도에 나뉘어져 이어왔다. 동쪽의 무풍면과 설천면은 생활권이 경상남도에 속했고, 북쪽의 무주읍과 부남면은 충청남도에, 남쪽의 적상면과 안성면은 전라북도에 속했다.

또한 역사로나 지리로나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었기에 옛날에는 혼례나 장례의 절차에서부터 모든 예법이 달랐다.


같은 군 안에서도 혼인이나 상거래도 하지 않았을 만큼 서로 다른 삶의 줄기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지금껏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 것이 말씨다.


무풍면과 설천면 일대는 경상도 사투리가 짙다. 독특한 낱말 몇 개를 예를 들어보면 경상도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아리'는 '따뱅이'로, '딸꾹질'은 '껄떡질'로, '졸음'은 '자부름'으로, '입술'은 '입수부리'로, '솔잎낙엽'은 '갈비'로, '서캐'는 '씨가리'로, '추워'는 '추버'로, '어디'는 '어데'로, '하려고'는 '할락'으로 따위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이 접경의 경계는 구천동 33경 중 제1경에 속하는 나제통문이다. 통문 안 무풍 쪽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피난하기에 좋은 땅 열 곳을 일컫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혔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이 나면 이곳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주군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 때 피난 온 사람들의 자손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정도다. 무주군의 대표적인 성씨인 밀양 박씨, 안동 권씨, 문화 유씨를 비롯한 18개의 성씨의 중시조가 모두 이곳에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나제통문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왕래했다 해서 '통일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주 설천에서 나제통문을 비껴 백운산 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백두대간 자락에서 졸졸거리며 흘러내리는 냇물이 만난다. 그 물길을 따라 4㎞쯤을 들어가면 벌한마을이 있다. 지리적으로는 나제통문 밖이지만 이곳 사람들의 말씨도 무풍 사람들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닮았다.


사람들은 마을 서쪽의 거칠봉과 나제통문이 있는 산줄기에서 뻗어온 동쪽 산줄기에 있는 사선암(四仙岩)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마을 쪽으로 차례차례 키를 낮추는 일곱 봉우리인 거칠봉에는 신선이 거하며, 네 신선이 노닐었다는 사선암에는 장기판이 그려져 있는데 신라 김유신 장군의 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남쪽과 마을 입구인 북쪽에 있는 탕건바위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니 두루 평안하다는 것이다.

사선암은 마을 뒷산을 타고 땀 꽤나 흘려야 올라갈 수 있다. 바위 밑에는 십여 년 전에 암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쓰러진 기둥만이 남아 있다. 두부모를 켜켜이 쌓아놓은 듯한 사선암을 돌아나가면 무풍면 철목리와 금평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벌한마을에서는 옛날 무풍에서 며느리를 봤다고 말한다.


옛 신라에 속했다고 믿기에 무주와 통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잿마루는 혼인가마가 넘던 고개였다지만 지금은 그저 오솔길일 뿐이다.

덕유산국립공원 안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적상산이다. 직립한 암벽이 에두르고 숲이 울창하여 가을에 단풍이 들면 마치 붉은 치마를 펼쳐놓은 듯하다 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정상부의 적상산성 안에는 고려 때 세웠다는 안국사라는 절집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선원각이라는 사고 터가 있었다.


광해군 16년에는 묘향산 실록들을 옮겨 보관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전주사고의 실록도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국사는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상부댐인 적상호에 잠기게 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덕유산 서쪽 칠연계곡에는 칠연의총이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한다. 칠연의총은 조선시대 말기 이곳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숨진 왕실 근위대 출신의 군인들이 묻힌 곳이다.


무풍과 설천면에서 무주로 흘러드는 남대천에 있는 특이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제 스스로 빛을 내는 '자연의 등불' 반딧불이. 개똥벌레라고도 부르는 반딧불이의 불빛은 지금 거의 사라졌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지금껏 여름밤을 수놓는다. 반딧불이가 천연기념물로 제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곳은 금강 상류인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남대천이 유일하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322호로 지정된 반딧불이와 그 먹이 다슬기 서식지다.


반딧불이는 120만 종에 이르는 곤충 중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유일한 곤충이다. 금강 상류 남대천에 반딧불이가 살아 남은 것은 다슬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남대천이 아직은 깨끗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설천면 청량리 남대천교에서부터 소천리 소천교에 이르는 3㎞다. 자연의 청정도를 가늠하는 잣대인 지표 곤충 반딧불이.

남대천을 따라 흐르며 진정 인간이 드넓은 자연의 일부임을 깊이 깨달을 때 반딧불이는 우리네 삶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