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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흔들리는 이창호… 세계 바둑 군웅할거 시대로

풍월 사선암 2007. 6. 2. 15:46

   [Why] 흔들리는 이창호… 세계 바둑 군웅할거 시대로


현재 지구촌 바둑 최강자는 누구일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창호(32)라는 거목이 워낙 월등한 성적으로 세계를 휩쓸었기 때문이었다. 이창호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려 22회(비공식 기전 2회 포함)에 걸쳐 세계 정상을 정복했고, 총 62개의 메이저급 대회 우승 트로피 중 27%가 넘는 17개를 독식했다. 하지만 그런 이창호가 몇 년 전부터 약간씩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세계 바둑계는 어느 새 군웅 이 할거하는 격전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 “이세돌·구리 양강체제 2~3년 갈 듯”

 

현 시점에서 세계 최고수를 가리는 가장 객관적인 방법은 국제대회 성적을 계량화해 보는 것이다. 되도록 최근의 실적을 비교하기 위해 대상 기간을 2004년 1월 이후 현재까지의 약 3년 반 사이로 압축하고, 국제대회의 규모와 진출 라운드 별로 가중치를 부여했다. 집계 결과 1위는 49점을 얻은 이세돌로 나타났다. 이창호는 이세돌보다 8점이 뒤진 41점으로 2위에 랭크 됐고 중국의 창하오(常昊)와 구리(古力)가 그 뒤를 이었다 <별표 참조>.


하지만 현역 플레이어(프로 기사)들이 느끼는 체감(體感) 랭킹은 이 집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현재의 세계 바둑계는 이세돌과 구리의 각축장이라고 거의 대부분 프로들이 진단한 것이다. 후지쓰배 현역 보유자인 박정상(23) 九단은 “기량과 기세 양면에서 두 사람이 쌍두마차를 형성중”이라며, “둘 중 1위를 꼽는다면 역시 이세돌 九단일 것”이라고 했다. 둘 간의 패권 싸움이 앞으로도 2~3년 정도는 더 계속되리란 게 박 九단의 예상이다.


물론 이 같은 진단엔 ‘이창호 九단이 지금과 같은 부진에서 탈피하지 못할 경우’란 단서가 붙는다. 최근의 이창호는 확실히 난조다. 올 들어 5할이 간신히 넘는 승률도 승률이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책이 빈발하고 있다는 게 심상치 않다. 귀신 같은 종반 능력으로 역전시키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는데, 요즘엔 거꾸로 우세하던 바둑을 허무하게 내주기 일쑤다. 그 과정에서 세계 전관왕에 육박하던 위상이 요즘엔 국내 무관(無冠)으로의 전락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창호의 부진 이유에 대해 떠도는 여러 가지 풍문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건강 이상’설이다. 대국 후 잠깐씩이나마 정신을 잃거나, 탈진해 상대의 부축으로 퇴장하는 일이 몇 차례 발생한 것. 하지만 병원으로부터는 “병리학적으로 이상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오랜 승부사 생활로 인한 긴장 누적’설, ‘노총각 생활로 인한 권태’설, ‘집안 우환(부친이 중풍 증세로 와병 중이다)’설 등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창호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정상 九단은 “이국수가 지난 날의 컨디션을 회복한다면 그만한 안정마(馬)도 없다”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바둑계에서 지금의 이창호는 ‘잠 자는 호랑이’쯤 되는 셈이다.


이세돌과 구리는 비슷한 점이 꽤 매우 많다. 우선 24세 동갑내기이고 똑같이 95년에 프로가 됐다. 난전을 즐기는 기풍도 동류항이다. 둘은 무적의 주먹을 휘두르다가도 종종 약수(弱手)들에게 물린다. 기분파란 얘기다. 하지만 큰 승부에선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최근 3년 반 사이 이세돌은 네 차례, 구리는 두 차례 결승에 올라가 모두 이겼다. 결승 승률이 높다는 건 당대 최고의 승부사를 가림에 있어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중국의 창하오(31)가 이번 통계에서 구리를 앞섰는데도 더 낮은 ‘체감 평점’을 받은 것도 ‘마지막 한 방’에서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하오는 지난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네 차례 결승에 올라 우승은 그 중 절반인 두 차례에 그쳤다.


국내 최연소 프로인 박정환(14) 초단의 생각도 이세돌이 1위, 구리가 2위다. 박초단은 올 연초 국내 프로 기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가장 유망한 미래 스타’ 설문에 1등으로 뽑혔던 유망주다. 그의 설명이 재미있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선 강력한 전투력이 가장 중요한데 그 방면의 대표적 강 펀처가 이세돌과 구리 2명이라는 것. 한 때는 이창호 류의 정밀한 계산력이 승부를 좌우한 시대도 있었지 않았느냐는 반론에 대해 박 초단은 이렇게 답했다. “요즘 프로 기사들에게 계산이나 끝내기 실력은 기본일 만큼 쎄요. 그것만으론 최고 자리에 갈 수 없어요.”


# 한·중 양국 패권다툼 양상


이세돌과 구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스타성도 남다르다. 이세돌의 반외(盤外) 행동은 번번이 화제가 되곤 한다. 초, 二단 시절 승단대회를 장기 보이콧, 만년 저단자로 머물던 그는 국내외 성적을 단위로 연동하는 제도가 도입되자 단숨에 최 고단인 九단으로 직행했다. 국제대회나 바둑리그 시상식 때 “내가 피곤하면 안 나갈 수도 있는 게 아니냐”며 불참해 주최측을 난감하게 만든 일, 대다수 동료들이 불리하지 않다던 바둑을 중도 기권했던 일 등 이세돌이 움직이는 곳에 화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언제나 말썽만 일으켰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귀염성스런 얼굴과 재치 있는 화술을 겸비한 이세돌은 한 때 방송에 출연하면서 천부의 ‘끼’를 과시하며 인기를 모았다. 그 과정에서 톡톡 튀는 말솜씨로 ‘이세돌 어록’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23세였던 지난 해 결혼한 그에겐 벌써 8개월 된 딸이 있다. 발상이 자유분방하고 수읽기가 깊어 ‘조훈현 이래 최고의 천재’로 불리곤 한다. 팬들은 “이세돌의 기보(棋譜)를 보다 보면 다른 기사 기보는 재미없어 못 본다”고 할 정도다. 만 12년에 불과한 기사 생활 동안 무려 7차례나 세계 정상을 밟았다.


구리 九단은 탁월한 감각으로 유명하다. “그는 과감하게 잡으러 가고, 과감하게 죽이며, 과감하게 포기한다.” 중국기원 왕루난(王汝南)원장의 구리에 대한 촌평이다. 2004년 삼성화재배 준결승서 이세돌에게 패한 뒤 3시간이나 침묵하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떨군 일화가 있을 만큼 투지도 대단하다. “이세돌도 나만큼이나 싸움을 즐기는 변태바둑 과(科)”라고 했다니,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셈일까. 충칭(重慶) 출신으로 현재 중국 내에서 3관왕 톱 스타로 군림 중인 구리는 중국 프로 기사들 중 축구 실력이 가장 뛰어난 기사로도 유명하다.


세계 바둑계 패권다툼이 한·중 양국의 전면전 양상으로 접어들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이세돌과 구리를 랭킹을 통해 자국 간판 스타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이세돌은 올해 초 3개월 연속 한국 랭킹 톱에 올랐다가 지난 달 이창호에게 선두를 내주었으나 6월 랭킹에서 다시 1위를 되찾았다. 구리는 2003년 4월 처음 톱 랭커로 선정된 이후 단 한 차례 2위로 밀렸을 뿐, 무려 8분기째 톱을 지키는 중이다. 한국이 매달 랭킹을 선정해 발표하는 반면 중국은 4개월을 주기로 새 명단을 내놓고 있다.


# 이세돌·구리 국제대회 3승3패


그렇다면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이들 양웅은 몇 차례나 맞대결을 가졌고 누가 얼마나 더 이겼을까. 국제대회에선 모두 6회에 걸쳐 칼을 섞은 결과 쌍방 3승 3패를 기록 중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세돌이 용병으로 참가한 중국 리그가 또 있는데, 여기서는 통산 3승 2패로 구리가 앞서 있다. 그러나 ‘안방’에서 편히 대국한 구리와 매번 먼 거리를 오가며 원정 핸디캡을 겪어야 했던 이세돌의 성적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긴 곤란하다. 맞대결 성적에서도 둘은 난형난제의 승부를 이어가고 있다는 뜻. 한편으로 중국 리그와 관련해 일부 선배 기사들은 이세돌의 ‘지나친 의욕’을 우려하기도 한다. 양재호 九단은 “이세돌이 지금처럼 중국 리그와 한국 리그, 국내외 타이틀 사이를 곡예하듯 강행군해선 체력적으로 무리가 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양 九단 역시 이세돌을 현역 세계 1위로 꼽는 기사다.


하지만 바둑계 1인자 자리가 언제까지나 이세돌 또는 구리의 두 사람 전용무대(?)일 수는 물론 없다. 최근 3년 여 동안 실적표에서 가장 유망한 추격자로 나타난 기사가 한국의 최철한(22) 및 박영훈(22)이다. 하지만 최철한은 잦은 해외 입상이 무색하게 우승 경험은 아직 마이너 기전 1개 뿐이란 점이, 박영훈은 두 차례 세계 정복을 이루긴 했으나 8강 이내 진입 횟수가 빈약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세계 1인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둘 모두 한 차례 더 탈각(脫殼)을 이뤄내야 하리란 의미다.


# “이창호식 1인 독재는 없을 것”


이 밖에 일본의 독보적 존재인 장쉬(張?羽·27), 중국의 꾸준한 스타 저우허양(周鶴洋·31)과 위빈(兪斌·40), 가장 최근 국제 대회를 정복한 대만 저우쥔쉰(周俊勳·27) 등도 10위권 이내에 들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서 40대 나이에 이른 이들이 세계 최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자고 일어나면 새 얼굴이 출현해 발군의 실력으로 기성 강자들을 호령하는 게 요즘의 바둑계다.


이런 이유로 현재 20살 전후에 포진한 각국 예비스타들의 ‘2~3년 후’가 주목 받고 있다. 한국의 윤준상(20)을 비롯해 강동윤(18) 김지석(18), 중국의 천야오예(陳耀燁·18) 리저(李喆·18) 구링이(古靈益·16) 저우루이양(周睿羊·16), 일본의 이야마(井山裕太·18) 등이 눈 여겨 봐야 할 재목으로 꼽힌다. 하지만 누가 바통을 이어받든 그 기간은 길 것 같지 않다는 게 일치된 분석. “과거 이창호 식 1인 독주는 앞으로 절대 재현되지 않을 것”(구기호 월간바둑 편집장)이라는 단정적 예언까지 등장할 정도다. 결국 국제 바둑계 1인자 재위 기간은 갈수록 단축되면서 열강들의 물고물리는 난타전도 한층 더 치열해져 가리란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