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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을 그린 그림들

풍월 사선암 2006. 2. 26. 03:46

 

96 3/4 x 90 7/8 inches (246 x 231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에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1821년 5월 5일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사망할 때까지 51년간 군인, 황제 그리고 유배인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프랑스 대혁명을 타고 등장한 그는 국내 정치를 정비하고 근대법의 근간이 되는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었으며 개선문을 건립하였다. 그가 황제로 등극할 때의 대관식에서 그의 거만함은 극에 달했는데, 그것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한편 그는 평소에 의사를 믿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당시의 의학이 그가 믿을 만큼 발달되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만성적인 위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항상 손을 명치끝에다 올려놓고 했다. 그리도 도도했던 황제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든 것인데, 이렇게 '나폴레옹 포즈'를 취한 그림이 있어 그림을 보면서 황제의 거만과 순종에 대해 살펴보기도 한다.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화가이면서 자코뱅당의 당원으로 프랑스 대혁명에도 적극 가담하였으며 혁명 후에는 나폴레옹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나폴레옹과 관계되는 그림을 많이 그려 더욱 유명해졌다.

 

 

Empress Josephine, 1805 - 1807, Oil on canvas, 247 5/8 x 385 3/8 inches (629 x 979 cm)Musee du Louvre, Paris, France>

 

루브르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감상하는 작품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그 다음은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 그리고 몰락이라는 역사적인 사실보다도 다비드의 작품에 매혹되어서일 것이다.

가로 10m에 달하는 화폭은 우선 그 크기로 관객을 압도한다. 또 완벽할 만큼 짜임새 있는 구성과 섬세한 빛의 효과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선 나폴레옹이 쓰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왕관이 아니라 월계관인데, 이것은 나폴레옹을 로마 황제와 동일시했음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화려함에 로마의 장엄함을 더하려 했는데 이런 생각은 나폴레옹만이 아니라 히틀러도 그러했다. 즉 유럽의 정복자들은 모두가 미적인 면에서는 로마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또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려 했던 의도를 잘 아는 화가였기에 둘은 호흡이 잘 맞았다. 다비드의 그림에서 나폴레옹은 언제나 카이사르의 이미지로 부각되어 있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거행되었는데 왕관의 제관은 교황 피우스 7세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이 그에게 대관식의 주재를 의뢰하자 화해의 제의로 받아들여 쾌히 승낙하였다. 그러나 막상 대관식날 교황이 관을 씌우려 하지 나폴레옹은 관을 받아들고는 돌아서서 자기 스스로 머리에 월계관을 썼다. 그러고는 조세핀의 머리 위에 자신이 직접 황후의 관을 씌워주어 교황을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며 거만을 떨었다. 자기 스스로 월계관을 쓰고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순간, 교황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비드는 이 순간을 포착하여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서 가로 10m나 되는 그림을, 대관식에 참석한 사람마다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정도록 뚜렷이 그렸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생애에서 가장 거만한 모습을 담은 그림이라 할 수 있다.

 

 

80 1/4 x 49 1/8 inches (204 x 125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다비드가 1812년에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조끼의 단추를 풀고 오른손을 그 속에 넣고 있다. 이 초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오른손을 올려 조기 속에 넣고 잇는 자세가 이른바 '나폴레옹 포즈'이다.


나폴레옹은 어려서부터 몹시 신경질적이었으며 경련을 자주 일으키고 만성적인 위통과 배뇨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1796년에서 1814년가지 군의관을 지냈던 알렉산드르 우르방 이반이 남긴 기록에는 '황제는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감정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럴 때마다 위와 방광의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증상은 전쟁을 앞두고서는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또 피부가 가려운 피부염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도 신경성 피부염이었던 것 같다. 가려운 증상은 주로 다리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장시간 목욕을 하였으며 그래서 목욕탕 안에서 집무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 그는 브러시로 몸을 비비고 목욕이 끝나면 방문을 활짝 열어 놓게 하고는 잠시 동안 잠을 즐겼다고 한다. 1797년 이탈리아 원정 때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기침이 나고 편두통이 생기고, 발열, 배뇨 곤란 그리고 치질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으며 1797년에어 1799년의 이집트 원정 때는 기분이 좋아지고 기침도 가셨다고 적었다.


1802년에 그의 비서가 남긴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에게는 그때까지 없던 증사잉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른쪽 배 위쪽에 격심한 통증이 생겨 그때마다 조끼의 단추를 풀고는 책상에 기대거나 의자에 팔꿈치를 대고 왼손을 윗도리 밑으로 넣어 통증이 있는 부위를 문질러 통증을 가라앉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가 오면 옷을 단정히 하고는 오른손을 조기의 단추가 풀린 사이에 넣고 접견했다고 한다.


다비드가 1822년에 그린 '나폴레옹 초상'은 이러한 그의 독특한 포즈를 그린 것으로 나중에는 이것이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포즈로 되었다. 하지만 그가 위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취한 포즈였다. 아무리 천하를 주름잡는 나폴레옹이었지만 병 앞에서는 손을 들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나폴레옹은 의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시의였던 고르바장 교수의 말만은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어떤 파티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처음 만났다. "의사라는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요"라는 말에 교수는 "내가 그런 무리에 끼어 있다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 오늘부터 나의 시의를 해 주시오"하며 그 자리에서 시의로 명했다고 한다. 어느 날 나폴레옹이 지병인 투간판에 통증이 생겨 시의를 부르자 교수는 옷을 벗게 하고는 양손을 올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아프다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세게 누르자 그 자리에서 통증이 가셨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도도했던 나폴레옹도 병의 고통 앞에서는 옷을 벗으라면 벗고 손을 들라면 드는 등 어쩔 수 없이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두 그림은, 거만한 자도 질병 앞에서는 순종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낸 인상적인 그림이다.


문국진의 <명화와 의학의 만남> 中


병 앞에 장사없다더니... 권력의 무상함...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그의 병 또한 그러한 과도한 집착이 낳은 산물이란 생각을 갖게 합니다. 누구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갖고 있기 마련이기에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흑백으로 가리기엔 너무도 복잡하고 미묘한 파장들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그만큼의 고통은 가진 자의 것이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결국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은 모습이 가슴에 남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