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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최강의군대소유자, 징기즈칸

풍월 사선암 2006. 2. 26. 04:10

역대최강의군대소유자, 징기즈칸

 

요약

1162-1227. 본명은 테무진. 몽골의 군인이자 정복자. 1206년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칸이 돼 중앙 아시아, 중국, 러시아, 서남 아시아, 동유럽까지 정벌하고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건설한다. 그가 이끈 몽골 기마대는 의심할 나위 없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였으며, 또한 가장 잔혹했던 군대이기도 했다. 손자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운 후 원의 태조로 추대됨.


사실들

1162년 소수 민족의 부족장 아들로 태어남. 본명은 테무진. 태어날 당시 몽골은 30개의 유목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전체 인구는 300만 정도였음.


9살 때 아버지가 타타르 족에게 독살 당함. 13살에 부족장이 돼 혼자 힘으로 동지들을 규합, 강력한 부족 세력을 키운다. 그는 거침없는 정복활동으로 주변 부족들을 자신의 세력을 끌어들인다. 원래 몽골 족은 정복당한 부족을 완전히 파괴해 재기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테무진은 정복민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세력을 키워갔다.


아버지를 살해한 타타르 족을 공격해 남자들은 모두 죽였고, 아이들과 여자는 노예로 만들었다. 이때의 살육과 약탈로 타타르는 멸족하고 만다.


그는 자신과 의형제를 맺었던 이들까지 차례로 제압해 1206년 몽골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다. 이때 몽골족의 대집회 쿠릴타이에서 테무진은 "세계의 통치자" 칭기스 칸으로 추대된다.


당시 중국 본토를 다스리고 있던 금 왕조로부터 조공을 받음. 금은 몽골 군의 쳐들어오지 않도록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갖다 바쳤다. 그러나 금은 곧 재정이 바닥나고 내분에 시달려 칭기스칸의 또 다른 정복 대상이 되고 만다. 칭기스칸은 1214년 금의 수도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을 자신의 손에 넣는다.


1209년 최초의 국외 원정을 떠남. 첫 점령지는 서하 왕국(오늘날 중국의 銀川). 칭기스칸은 적들과 맞붙었다가 퇴각하며 뒤 돌아 활을 쏘는 전술을 이용해 적장을 생포했고, 1210년 서하의 황제는 칭기스칸에게 조공과 공주를 바쳐 몽골의 속국이 된다.


칭기스칸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집단은 종교 문화 언어에 상관없이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자신의 민족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친 집단에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조치를 취했다.


칭기스칸은 원래 고도로 발달된 아랍 문명, 화레즘 제국과 평화적인 교역을 원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아랍에 선물 공세를 쏟아 부으며 교역을 청했으나, 그가 보낸 450명의 대상은 첩자로 의심 받아 몰살당했고, 그 뒤에 적법한 처리를 요구하는 사신마저도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처형을 당했다. 칭기스칸은 극악무도한 아랍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속국이었던 서하에 원군을 요청하지만, 그들은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칸의 자격도 없다"는 조롱만 보내왔다. 당시 몽골을 미개인이라 여겼던 문명국들의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당시 몽골 군에 관한 기록화. 

1219년, 칭기스칸은 이때부터 전세계를 상대로 복수의 정벌에 나선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유례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십자군 군대를 격퇴시켰고, 학문과 문화, 경제가 발달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 최대 국가였던 화레즘 제국의 앗딘 무하마드 왕은 자신의 40만 대군을 믿고 몽고 군을 우습게 봤으나 곧 그것이 치명적인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칭기스칸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으나 과감히 병력을 나눠 진격했고, 이슬람의 군대를 조직적으로 격파해 나갔다.


무하마드는 경악했다. 그의 전선은 전복됐고, 세 방향에서 집결한 몽골 군에게 포위 당했으며, 서쪽 땅과의 통신로는 차단됐다. 그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칭기스칸도 오트라르, 부하라, 우르겐치, 메르브 등을 점령하며 서쪽으로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했다.


칭기스칸의 군대에게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정책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했다. 가는 도시마다 약탈을 자행했으며, 투항을 한 도시도 예외 없이 학살했다. 특히 메르브 같은 경우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130만에 달하는 시민을 살육했고, 나중에 죽일 사람이 없어지자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까지 죽여 없앴다.


그는 전쟁에서 극도의 경제성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행군 시 최소한의 물자만 가져갔으며, 전투 시 적에게 허점을 보이거나 여유를 주는 경우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전쟁에 이긴 후엔 반드시 필요한 사람만 데려가고 필요 없는 포로들은 학살했다.


칭기스칸은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무하마드 왕을 제거하기 위해 추격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중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앗딘이 반격해 와 몽고 군에게 전례 없던 패배를 안긴다. 이때 칭기스칸이 직접 나서 잘랄앗딘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잘랄앗딘은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달아난다. 이때 궁수들이 활을 쏴 살해하려고 했으나 칭기스칸은 그의 용맹에 탄복, 살려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저런 아들 하나만 있으면 좋겠군!" (몽골 족에겐 추앙 받는 전사의 피가 땅을 적셔선 안 된다는 전통이 있었다.) 어쨌든, 서남 아시아의 제왕이었던 무하마드 왕은 카스피 해까지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탈진해 죽는다. 그는 하인이 입던 누더기만 걸친 채 왕이 아닌 거지가 돼 죽었다.


칭기스칸의 또 다른 강점은 유능한 지휘관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 중 제베, 수베데이 이 두 사람의 용맹은 동유럽 전체를 두려움에 몰아넣었다. 제베와 수베데이는 유럽 세계를 알고 싶다며 2만의 병사를 이끌고 카스피 해 주변을 돌며 정복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1223년 러시아 공국의 8만 연합군에 맞서 대규모 전투를 치른다. 이들은 활을 이용한 연막전을 구사하며 순식간에 급습, 창과 검, 철퇴로 적들을 섬멸했는데 이때의 전투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기마 전술로 꼽히고 있다.


이들이 휩쓸고 간 땅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당시 러시아 공국의 어느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족들이 쳐들어 왔다… 어디서 왔는지, 무슨 말을 쓰는지, 어떤 인종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당시 동유럽이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떨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몽골 군이 파괴한 도시의 상당수는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 채 멸망했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몽골 군의 잔혹 행위로 수세기 동안 발전이 저해됐다고 보기도 한다.


칭기스칸의 마지막 공격 목표는 자신의 원군 요구를 모욕적으로 거부한 서하였다. 때마침 서하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였고, 칭기스칸은 직접 군대를 몰고 서하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행군 도중 1227년 6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의 사인은 분명치 않으나 발진 티푸스에 의한 병사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서하를 전멸시키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은 그대로 지켜졌다. 서하의 모든 백성은 남김없이 살해당했고, 다시는 서하 땅에 문명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죽어서도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불렀다. 그의 사후 쾌락을 위해서 40명의 처녀들과 40구의 말이 순장 당했고, 그의 장례 행렬과 마주치는 사람들은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비밀에 붙이기 위해서 였다. (지금도 칭기스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칭기스칸의 군대는 모두 합해도 단 한번도 11만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그는 대군을 이끌기 보다는 최적의 수로 최정예 병사를 몰고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본래 영토 이외의 정복지는 제대로 유지하려 들지 않았고 금, 보석, 말, 비단 등의 전리품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칭기스칸은 오직 정복과 살육에 미친 군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몽골 군에 대한 유럽의 묘사는 상당 부분 과장돼 있다. 몽골 족이 인간의 사지를 절단하고 꼬챙이에 꽂아 불에 구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 인간의 사지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은 것은 아랍의 도시들을 점령했던 십자군들이었지 몽골 족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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