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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회사 三養社

풍월 사선암 2019. 10. 19. 08:35

[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55 - 농장회사 三養社

<엄상익 변호사>

 

1924년 봄 어느 날이었다. 김연수는 사무실에서 여러 신문을 읽고 있었다. 도쿄에서 오는 것도 있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있었다. 일본의 정치권은 정우회와 민정당의 2대 정당이 서로 교대해 가면서 정권을 잡았다. 의회에서 최대다수를 갖는 정당지도자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조직했다. 그동안은 메이지(明治)유신의 공신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도쿄대의 정치학 교수인 요시노는 잡지 등에 글을 실어 선거를 통하지 않은, 공신에 의한 정치에 항의했다. 인권문제, 여성해방문제, 보통선거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부자들만 가지고 있는 선거권을 일반 민중에게도 확대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었다.

 

군국주의로 가기 전 일본은 다이쇼(大正)시대의 민주주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산업도 발전해서 일본은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 되어 있었다. 일본은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가해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내용은 열강제국이 중국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균등하게 나눈다는 원칙이었다. 미국 및 구미제국은 일본이 만주, 몽고에서 특수이익을 갖는 것을 암묵리에 승인했다.

 

일본은 중화학공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전기기계, 자동차, 타이어 등의 분야에서 니혼전기, 미쓰비시전기, 닛신 등이 웨스팅하우스, 지멘스, 포드, 제너럴 모터스 등 구미의 다국적 기업과 제휴하고 있었다. 이 협력에는 일본 자회사의 설립, 합병, 주식참여, 기술협력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일본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재벌을 탄생시켰다. 이 신흥재벌들은 조선과 만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공업국가가 된 일본은 해마다 조선에서 쌀을 1000만 석 이상 수입해 갔다. 일본의 상황을 살피면서 김연수는 집안의 땅을 농장회사로 만들어 쌀을 수출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쌀보다 품질도 좋고 가격경쟁력도 있었다. 중화학공업으로 치닫는 일본 국내의 쌀값은 계속 상승할 것이 틀림없었다. 은행은 일정규모 이상의 지주층에게만 농업자금을 대여했기 때문에 그 이하의 땅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지주들은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농업자금은 압도적으로 일본인에게 대출됐다.

 

총독부가 요구하는 개량농법은 비료구입비와 수리사업비 등 많은 자본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조선인 지주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정부가 알선한 저리(低利)자금을 이용해 화학비료를 조달했지만 조선인 지주들은 외상구입으로 인한 고리(高利)의 이자를 부담했다. 과중한 수리조합비의 부담은 조선인 토지소유자를 압박했다. 김연수는 농장회사를 통해 정책적 차별들을 빠져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발빠른 지주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나주의 박씨가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집안의 땅을 지켰다. 박씨가는 토지소유권 보존등기를 해서 소유권을 지켰다. 박씨가는 개인의 전답을 매입하는 외에 하천부지, 삼림과 같은 국유지를 불하받거나 점유함으로써 소유 토지를 넓혀갔다. 박씨가는 1920년대에 들어 호남은행의 주식을 사들이고 금융조합에도 출자하고 전기회사에도 투자했다. 박씨가의 중심인물인 박준삼은 대규모 정미소를 직접 운영했다.

 

김연수가 아버지 김경중과 상의했다.

 

집안의 땅들을 모두 합쳐 농장회사로 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의 전답이나 임야 산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농장회사를 한다면 전망이 어떠냐?”

 

공업은 일본에 뒤지지만 농업부문은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습니다. 집안에 논으로 만들 땅들이 아직 많습니다. 그리고 농사지을 사람도 넘쳐 납니다. 땅이 없어 만주로 유랑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들을 모아 우리 집안에서 만드는 농장에 정착시킨다면 명분도 서고 일거양득일 것입니다. 수출도 문제가 없습니다. 경성방직이 일본의 종합상사들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또 군산이나 인천의 기선회사들과도 운송계약들이 체결되어 있습니다.”

 

이치가 닿는 얘기로구나.”

 

아버지 김경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연수가 계속했다.

 

앞으로는 소작을 주고 마름을 시켜 쌀을 거둬들이는 방법은 없애겠습니다. 앞으로는 농업학교를 나온 똑똑한 인재들을 쓰려고 합니다.”

 

지금 여러 사업을 벌여 놓고 있는데 여력이 있겠느냐?”

 

아버지 김경중이 물었다.

 

해보겠습니다.”

 

아직 20대 말인 김연수는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다.

 

본격적인 농장회사 만들기에 착수했다. 김연수는 인재들을 모았다. 그들을 시켜 집안의 오래된 논문서, 밭문서, 장부, 치부책들을 모조리 사무실로 가져오게 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문서들이 산더미같이 쌓였다. 그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재산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 목록을 토대로 새로 시행된 민법에 따라 작성된 각 군() 면사무소의 토지대장과 지적도 그리고 등기부를 발급받아 하나하나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측량 기사를 고용해 실제의 경작면적과 원래의 토지경계를 농지별로 빠짐없이 측량하도록 했다.

 

장성, 부안, 고창, 정읍, 영광 등지에서 등기조차 되어 있지 않은 채 방치되어온 광대한 면적의 땅을 되찾았다. 서로 인접해 있는 땅을 한 덩어리씩 묶어 장성농장, 줄포농장, 신태인농장, 명고농장, 고창농장, 법성농장으로 이름을 붙였다. 그는 김씨가의 정미소를, 농장을 관리하는 회사의 사무소로 삼았다. 김씨가의 땅 안에는 11개의 면과 80개의 부락이 산재해 있었다.

 

먼저 그는 각 면과 부락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삶을 살폈다. 비참했다. 한겨울이 지날 무렵이면 벌써 식량들이 떨어져 버렸다. 농가의 반수 이상이 좁쌀조차 구할 수 없어 술도가에서 나오는 지게미나 쌀겨가 섞인 풀죽으로 연명하는 판이었다. 그런 처참한 상태는 자작농이나 소작농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풀죽마저 끓일 수 없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구걸을 하거나 유랑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농민들은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삶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가난한데다 게으른 집도 많았다. 아이와 가족들은 굶는데도 가장은 술과 노름에 빠져 있었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퇴비증산, 미곡증산을 외쳤지만 농민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 지주보다 저렴한 소작료를 제시하면서 농민들을 불렀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별 게 아니었다. 술 안 마시기, 노름 안 하기, 가마니 500장 만들기, 내 집 주위 내가 청소하기, 퇴비 많이 만들기, 농사일 서로 돕기, 남자는 스무 살 이전에는 장가들지 않기의 7개 항목이었다. 장가 안 들기는 당시 조혼(早婚) 풍습으로 너무 일찍 결혼을 해서 아이들만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을마다 총대(總代)라는 지도자를 뽑게 했다. 총대는 아침이면 종을 쳐서 그날의 일을 시작하도록 하고, 7개 항목에 대한 주민들의 준수를 지도 감독하게 했다. 그는 또 본부에 상근직원을 두어 각 부락을 순방하며 지도하고 도와주게 했다.

 

그는 소작권의 성격을 달리했다. 농민들은 남의 땅을 부친다고 생각하면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 비료도 주지 않고 땅에 애착이 없었다. 그는 소작권을 준()소유적으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등기부 상으로는 김씨가의 소유이지만 잘만 하면 자기 땅처럼 영원히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었다.

 

농장을 시작하자 혹심한 가뭄이 닥쳤다. 추수 때는 오히려 예년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대흉작이었다.

 

김연수는 아버지에게 말해서 벼 1000석을 내어 농민들에게 구휼곡(救恤穀)으로 나누어주었다. 다른 지주 같으면 이자를 약속하고 쌀을 꾸어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농장에 소속된 부락 외에도 광산군, 순창군, 담양군의 농가들이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 김경중이 아들 연수를 불러 붓글씨가 적힌 한지(韓紙) 한 장을 내어놓으면서 말했다.

 

내가 문관산(文冠山) 선생한테 말을 들으니 회사 이름을 삼양사(三養社)’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문관산은 명당을 봐주기도 하던 당대 유명하던 작명가였다.

 

삼양이란 어떤 뜻이죠?”

 

삼양이란 소동파가 유배지에서 스스로 세웠던 생활철학이지. 제 분수에 만족해 복을 키우고 욕망을 절제해 기()를 키우고 낭비를 삼가서 재물을 키우라는 뜻이다. 삼양의 양()이라는 한자를 풀면 만인의 양식이란 뜻이 된다.”

 

소동파가 황주땅에 있을 때 지은 이런 글이 있었다.

 

나는 오늘부터 아침저녁으로 한 잔 술과 한 접시의 찬으로 음식을 대신하고 이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때에는 한 가지를 더하여 이를 셋으로 하고 주릴지언정 늘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 나를 초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도 미리 이러한 내 뜻을 알린다. 만약 주인이 이 뜻을 따르지 않고 찬을 많이 낼 때에는 이를 말리어 말하되 첫째가 제 분수에 만족하여 복을 기르고, 둘째 욕망을 절제하여 기를 기르고, 셋째 낭비를 삼가 재()를 기른다. 이게 삼양이다.’

 

이때부터 삼양정신은 김씨가의 정신적 토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