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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형전’ 편 청송-약한 백성에게 ‘악법’을 강요하지 말라

풍월 사선암 2019. 10. 1. 00:09

목민심서 형전편 청송-약한 백성에게 악법을 강요하지 말라

 

서울 포함 주요 대도시에서 재개발 사업이 활성화되면서 부작용도 잇따르고 있다. 해당 구역 주변에서는 수시로 먼지가 발생하고, 공사 차량의 도로 불법 점용, 위태로운 안전시설 등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철거 과정에서 갈등도 크다. 상가 세입자 권리금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철거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이들을 대상으로 무작정 법대로 집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재개발 시 목민관 대처 방법은

원칙보다 백성의 사정을 고려해야

 

조선시대는 풍수지리설이 매우 성행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해 묘지(墓地)에 관한 송사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묘지 송사는 단순히 묘지 한두 곳만 이장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간혹 마을 전체를 없애고 묘지를 조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재개발과 다름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당시에도 이 같은 사업은 굉장히 복잡한 내용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목민관의 대처가 중요했다.

 

다산은 묘지로 인해 싸우고 구타하는 살상 사건이 수시로 발생함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특히 남의 묘를 파헤쳐 몰래 자신의 선조 묘를 쓰거나, 가옥을 없애고 묘지로 만드는 문제 등은 목민관조차 쉽게 판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다산은 권엄이라는 관리가 집행한 대표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서 묘지 재개발과 같은 큰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목민관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원칙을 자세히 설명했다.

 

판서 권엄이 한성판윤(오늘의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일이다. 당시의 태의(太醫, 어의·임금 주치의) 강명길이 임금의 은총을 믿고 마음대로 설치니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강명길은 서대문 밖 교외(郊外)에 땅을 사들여 부모님을 이장했다. 그 산 아래에는 민가 수십 호가 있었다. 그는 마을 땅 전체를 사들여 10월 추수 뒤에는 집을 비우고 나가도록 약속받았다. 그런데 그해 가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약속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 이에 강명길이 그의 종들에게 시켜 한성부에 고소했으나 권엄이 주민 몰아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정조가 승지 이익운을 불러, 한성판윤을 달래 다음 고소 때 아전을 풀어 백성들을 몰아내도록 하라고 했다. 그다음 날 강명길이 다시 고소했으나 권엄은 다만 종전의 판결대로 해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이날 임금은 이익운을 불러들여 책망했는데, 우레 같은 임금의 노여움에 모두 목을 움츠렸다. 이익운이 찾아가 그 사실을 전하자 권엄은 백성들이 지금 굶주림과 추위에 뼈가 사무치게 됐는데 몰아내듯 내쫓는다면 길바닥에서 다 죽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죄를 입을지언정 차마 이렇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를 원망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강명길이 또다시 고소했으나 종전의 판결을 따를 뿐 조금도 고치지 않으니 듣는 사람이 모두 권엄을 위태롭게 여겼다. 얼마 시간이 지난 뒤에 정조가 이익운에게 이르기를 내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판윤의 처사가 참으로 옳았다. 판윤 같은 사람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이익운)은 아마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권엄이 이 말을 듣고 감읍(感泣)했다.”

 

권엄의 자세는 훌륭한 목민관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 때의 이른바 용산 참사를 기억한다. 무허가 입주자들이 철거에 반대하며 농성을 하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끝내 몇 명이 목숨을 잃고 경찰관까지 사망한 사건이었다. 법으로 탓할 수 없다 해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올바른 행정은 아니다.

 

권엄 같은 목민관이 용산에 있었다면 그렇게 끔찍한 불상사가 일어났겠는가. 혹한에 오갈 곳 없는 불쌍한 입주자를 강제로 몰아내려다 그렇게 됐다. 서울시장이나 서울경찰청장이 백성을 위한 행정을 했다면 그런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터다.

 

요즘에도 강제 철거와 강압적인 행정 집행으로 수없이 많은 사고가 일어난다. 오늘날 목민관은 재개발 과정에서 갈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권엄의 처사에서 배워야 한다. 권력의 실세가 고소한 사건이라고 법대로만 처리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평한 판결의 중요성

약한 사람 입장에서 판결하라

 

송사를 둘러싼 갈등의 주체는 다양하다. 사족(士族)과 사족 사이는 물론 토족(土族·사족과 농민의 중간 신분)과 하호(下戶·가난한 백성) 간에도 송사가 발생한다. 대등한 권력자 사이의 송사도 그렇지만 상하위 계층 사이의 송사 등 여러 갈등을 봉합하는 문제는 늘 어렵다. 다산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쪽으로 기울임 없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재벌이나 권력자는 가벼운 형벌을 받고 오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만 무거운 형벌을 받는 일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나름 발전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공정의 표본이다.

 

이런 점에서 다산의 법률관이 돋보인다. 법의 근본 취지에서 어긋나지 않으면서 힘없고 약한 사람 편에 서는 관대한 판결을 주문했던 것이 다산의 뜻이었다.

 

당시 가장 많은 송사 중 하나는 노비 관련 문제였다. 노비 관련 송사에 대한 다산의 입장은 다소 원론적이다.

 

노비에 관한 송사는 법전에 실린 것이 번쇄(煩瑣·번거롭고 자질구레함)하고 조문이 많아 의거할 수가 없으니 인정을 참작해 행할 것이요, 법조문에서만 구애될 일이 아니다.”

 

다산은 노비에 대해 인정을 참작해 너그러운 판결을 주문했다.

 

사족이지만 다산은 여러 면에서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선각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노비 문제만큼은 달랐다. 인정에 맞춰 관대한 조치를 바랐을 뿐, 노비제도 폐지는 주장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권력자 이권이나 노비 관련 문제 외에도 많이 발생했던 송사가 바로 체대(債貸) 관련 소송이다. , 곡식이나 돈을 빌리고 갚는 문제에 대한 다툼이 많았다.

 

다산은 체대 송사에 대한 원칙을 말한다.

 

채대에 대한 송사는 마땅히 융통성이 있어야 할 것이니, 엄중하게 빚을 독촉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은혜롭게 빚을 덜어주기도 할 것이요, 굳이 원칙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다산은 사채의 이자를 지나치게 많이 받는 사람은 경국대전의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리대금에 의한 사회적 약자의 파탄은 중요한 사회 문제다. 조선왕조 초기만 해도 사채의 폐단이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 이후로 돈이 널리 유통되면서 사채의 폐단이 날로 증가했다.

 

다산은 일반 백성의 몰락이 사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판결이 공정하고 명확해져야 한다고 했다.

 

소송 사건 심리에 대해 다산은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송사를 판결하는 근본은 오로지 권계(券契·사적인 계약문서)에 있으니 그 깊은 간계(奸計)를 들춰내고 숨겨진 비위(非違)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오직 명석한 목민관이라야 할 수 있다.”

 

공문서(公文書)인 질제(質劑·어음의 일종)야 위조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권계라는 사적인 계약문서는 얼마든지 위조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 다산은 가장 중요한 증거문서인 권계를 잘 살펴보고 진위 여부를 밝혀내는 일이 송사 판결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인 수사가 발전한 오늘날에도 위조문서는 끊임없이 나온다. 200년 전 다산이 제시했던 송사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은 지금 시대에도 여러 시사점을 제공한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매일경제 2019.09.30 09: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