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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붕 세가족' 유비 촉나라 멸망, 바른미래 닮아가나

풍월 사선암 2019. 4. 28. 09:47

'한지붕 세가족' 유비 촉나라 멸망, 바른미래 닮아가나

 

제갈량이 유비, 관우, 장비에게 '찬하삼분지계'를 설명하는 상황을 나타낸 그림 [중앙포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로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의 삼국시대는 유비의 촉한(蜀漢) 건국을 시작으로 동오의 멸망까지 약 70년에 걸친 기간입니다. 촉한은 221년에 건국돼 263년 위나라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40여년간 지속했습니다.


한지붕 세가족, 촉나라의 멸망 바른미래 닮아가나

 

삼국지연의의 영향 덕분에 한··일 독자들로부터 가장 응원을 받았지만, 실상 촉나라는 위··오 삼국 중 가장 약체였습니다. 영토라고 해봐야 익주(益州) 한 개 주에 불과했고, 인구는 90만명 정도였습니다.

 

반면 양주(揚州)와 형주 일부를 차지한 오나라의 인구는 230만명, 유주·기주·병주·청주·서주·연주·예주·사주·옹주·양주(凉州)와 형주 북부를 차지한 위나라는 44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송 시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촉한 정통론이 제기되기 전까지 촉나라는 그다지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북송 시대만 하더라도 학자들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죠.

 

삼국의 세력 분할. 관우의 패배로 형주를 내준 촉나라의 영토는 익주로 한정됐다. [중앙포토]

 

하지만 촉나라의 진짜 약점은 영토와 인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위(()보다 복잡한 세력 구도로 구성되어 있어 좀처럼 힘을 하나로 결집하기 어렵다는 점이 늘 촉나라의 발목을 붙잡았고, 급기야는 패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의 한계

 

蜀道之難難於上靑天 촉나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다.

一夫當關 萬夫莫開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뚫지 못한다.” (이백蜀道難(촉도난))


촉한이 건국된 익주는 험준한 지형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유비는 214년 익주목 유장을 1년간 포위한 끝에 항복을 받아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명분 하나만 쥐고 평생 떠돌이와 더부살이를 했던 유비가 처음으로 독자적 세력기반을 만드는 데 성공한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상황은 그리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촉나라는 유비 그룹+유장 그룹+익주 그룹 등 3개 집단의 연합체였습니다.

 

유비 그룹 (도원결의부터 입촉 이전까지 합류한 그룹. 제갈량·관우·장비·조운 등)

유장 그룹 (유비의 입촉 후 합류한 익주의 구주류. 법정·이엄·동윤 등)

익주 그룹 (익주의 토호 세력)


촉나라가 자리잡은 익주는 폐쇄적 지형이기 때문에 지키기엔 좋지만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주황색 원으로 표시된 지역이 익주. 일본 코에이(KOEI)사의 게임 '삼국지 13'에서 캡쳐

 

익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토착 세력의 지배력이 강한 곳입니다. 폐쇄적이고 고립된 지형 덕분에 중앙권력의 통제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난세였습니다. 익주의 토호들도 조조나 손권 같은 강력한 군벌들의 침공으로부터 이해관계를 보호해 줄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변방인 익주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리더가 배출되긴 어려웠기에 외부에서 명망가 세력을 끌어들여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가 시작하기 직전까진 황실 종친인 유언-유장 부자를 내세웠습니다. 유장 그룹은 정치권력을, 익주 그룹은 지역 기득권을 나눠 가지며 적당한 공생을 이루고 있었던 셈입니다.


삼국지연의를 다룬 중국 CCTV 드라마 '삼국(三國)'에서 장비, 유비, 관우(왼쪽부터) [중앙포토]

 

그런데 유비 그룹이 들어오면서 정치 지형에 균열이 생기고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유비 그룹이 신주류로 나타나면서 기존 주류였던 유장 그룹은 비주류로 밀려났고, 익주 그룹은 3등으로 떨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유비의 촉한은 불안정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위나라나 오나라는 정치 지형이 덜 복잡했습니다조조가 차지한 하북 지역은 수도인 낙양에서도 가깝고 평야 지대입니다. 한나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했기 때문에 토호 세력이 주류를 견제할 만큼 성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강남에 자리 잡은 오나라는 토호세력이 강했지만, 지배세력인 손씨 집안이 강동의 호랑이라고 불린 손견을 시작으로 아들 손책-손권을 거치며 일찌감치 통제력을 확보했습니다.


영화 '적벽대전'에서 조조 [중앙포토]

 

반면 유비 그룹은 2개의 비주류 그룹을 억제하면서도 협조를 끌어내 위·오와 경쟁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었습니다. 유비가 사망하면서 2명의 고명대신을 지명한 것에서도 이런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주(유비)는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고 상서령 이엄이 이를 돕게 했다.” (정사 삼국지』「촉서-선주전)


즉 제갈량(유비 그룹)을 정(), 이엄(유장 그룹)을 부()로 세워 양 그룹의 연대를 도모했던 것입니다. 청나라 학자 하작은 의문독서기(義門讀書記)에서 “(유비가 이엄을 택한 것은) 촉의 옛 신하들을 격려하고 위무하기 위해서였다고 단언했습니다.

 

유비 그룹과 유장 그룹이 힘을 합쳐 익주의 토호 그룹을 견제해 정권을 유지한다는 것이 유비의 구상이었습니다. 비록 이엄은 8년 뒤 권력 다툼 과정에서 축출되긴 했지만, 제갈량은 정권을 잡은 내내 이 구상을 크게 흔들지 않고 고수했습니다.



제갈량은 왜 북벌을 멈추지 않았나

 

삼국지연의를 다룬 중국 CCTV 드라마 '삼국(三國)' 에서 북벌을 추진하는 제갈량 [중앙포토]

 

222년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내걸고 무리하게 강행한 이릉대전에서 육손이 이끈 오나라 군대에 대패를 당했습니다. 이 충격으로 유비는 8개월 뒤 백제성에서 숨을 거둡니다.

 

촉나라엔 권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서로 다른 3개 세력을 묶은 것은 유비의 정치적 카리스마였습니다. 따라서 유비가 사라진 이상 촉한은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위나라의 중신인 화흠, 진군 등은 제갈량에게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진수가 지은 정사(正史) 삼국지에는 유비가 사망한 뒤 촉나라 남부 지역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18년부터 250년까지 익주에서 토호들이 9번이나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삼국지연의를 다룬 중국 CCTV 드라마 '삼국(三國)' [중앙포토]

 

이렇게 불안정한 상황에서 촉나라의 전권을 물려받은 제갈량은 최강 위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추진합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7년간 다섯 차례나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촉나라의 국력은 위나라의 5분의 1에서 6분의 1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벌인 북벌은 촉나라의 국력을 소진해 결국 망국으로 가게 했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줄기차게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학자 이중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하면 약할수록 강해지려 분발해야 한다. 약함을 강함으로 삼아야 자신을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지 않으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작은 나라일수록 더 강대함을 추구하고, 내부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외부와 싸워야 한다.”


삼국시대 위((()의 실제 세력 영역. 지역 토호가 강성했던 촉한은 중앙 권력이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자료=나무위키]

 

, 북벌은 촉한 정권을 보전하고 유비 그룹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투쟁이었습니다. 외부에 명확한 적을 설정해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는 것입니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이런 정치적 어젠다의 설정입니다.


북정중원(北定中原) 양제간흉(攘除姦凶) 흥복한실(興復漢室) 환어구도(還於舊都): 북으로 중원을 평정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몰아내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며 옛 수도로 돌아간다.’


제갈량은 유비와 달리 형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오나라와 다시 손을 잡았습니다. 타깃은 위나라 하나로 분명히 했습니다. 이에 따라 목표도 북벌을 통한 중원 진출로 고정됐습니다. 정치적 메시지는 간단하고 선명할수록 효과가 높은 법입니다.

 


익주 그룹의 불만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당 무후사. 원래 유비의 시호 소열제에서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廟)였지만, 공명의 지혜를 높이샀던 사람들이 그의 시호인 충무후(忠武侯)를 본떠서 무후사라 부르게 되었다.[중앙포토]

 

흔히 2대 황제 유선의 무능과 환관 황호의 전횡을 촉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꼽습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익주 그룹의 분탕이야말로 촉나라의 운명을 이해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사실 익주 그룹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비 그룹은 익주 그룹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일에 국력을 소모했으니까요. 실제로 위나라는 너무나도 강력했고, 익주 그룹 입장에선 계속 투자만 강요당한 셈입니다. 이 때문에 북벌에 대해선 거리를 뒀습니다.

 

이들로서는 지역 기득권을 인정해주면 나라의 주인이 꼭 유비 세력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조라도 상관이 없었죠. 그래서 유장 그룹은 익주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 정치적 야심을 접었습니다. 외부 세력의 간섭을 막아주며 익주에서 조용히 안주하면 서로가 좋았던 셈입니다.

 

일본 코에이(KOEI)사의 게임 '삼국지 13'에서 도원결의를 다룬 장면

 

하지만 유비 그룹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애초에 역적(조조) 타도와 한나라 재건이라는 명분 하나를 내걸고 전국을 떠돌았던 유비입니다. 이 명분을 내려놓는 순간 익주를 차지한 명분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 때문에 촉한 정권에서 두각을 드러낸 법정, 허정, 양의, 위연, 마속, 장완, 비위 등은 유비 혹은 유장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이해관계가 다른 익주 그룹은 배제한 것이죠이런 인사 원칙도 유비와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균열이 일어났습니다. 노쇠한 유비 그룹이 하나둘 퇴장하면서 익주 그룹이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 인사가 초주입니다

 

제갈량 사후 정계의 유력인사였던 그는 구국론(仇國論)이라는 글을 통해 이 시대에서는 비록 한 고조(유방)일지라도 어떻게 칼을 쥐고 말에 채찍질하여 천하를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았던 강유의 북벌 추진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촉나라 시대 대표적 요새인 검각. 촉나라는 험준한 지형으로 1명이 1만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초주는 투항과 저항 사이에서 고민하던 황제 유선에게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지금 강대한 적군은 가까이 접근했고 재화와 멸망이 도래하려고 하니 소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지킬 수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후퇴하더라도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할 것입니다오나라가 아직 굴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위나라는 틀림없이 투항을 받을 것이고 우리를 예우할 것입니다”(정사삼국지』「촉서-초주전)


또 밖에서는 이런 참언을 퍼뜨렸습니다유비의 ()’완결하다는 뜻이고, 유선의 ()’은 양보한다는 뜻이다. , 유씨가 국통을 완결해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삼국지』「촉서-두경전)


그래도 초주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촉나라의 권력과 여론이 익주 그룹에게 넘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벌의 동력이 약화된 촉나라는 익주 그룹의 이반으로 이렇게 내부에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위나라의 등애·종회 등이 군사를 일으킨 뒤 촉나라의 수도인 성도를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달입니다. 유비가 유장을 굴복시키는 데 1년이나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급속한 몰락입니다촉나라가 무너지고 익주 그룹은 원하는 바를 얻었습니다. 위나라가 실시한 구품중정제는 지역에서 추천한 인재를 중앙에서 임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지역 토호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행정권을 맡기는 것이죠


끝까지 저항했던 것은 투항 권고를 거절하고 전사한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 위장 투항을 한 강유 정도입니다. 모두 유비 그룹의 2세대였습니다.



바른미래당의 미래는?

 

유의동·지상욱·유승민·오신환·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장실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유승민 의원은 '오신환 의원에 대한 사개특위 사보임에 이어 권은희 의원에 대한 사보임까지 이뤄졌다', '국회법을 2번이나 무시하는 법안처리는 무효'라고 말했다.[뉴스1]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바른미래당의 상황을 보면 촉나라가 내리막길로 가는 상황을 보는 듯합니다. 바른미래당은 본래 바른정당계(유승민계), 안철수계, 호남 세력의 3개 집단 연합체입니다. 사실 이들은 이해관계도 다르고 이념적 지향성이나 정체성도 다릅니다.


유승민계와 안철수계가 반문재인 성향이 선명하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견제를 전면에 내걸고 있다면 호남 세력은 여권과도 연대 가능하다는 입장이죠. 대북 정책 등 주요 이슈에서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불거졌고 결국 호남계의 지지를 기반으로 강행한 패스트트랙 파동은 이런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또한 유승민계가 개혁보수라는 기치 아래 세력을 모아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보는 반면, 호남계는 지역 기반만 보장이 된다면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을 하는 것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른미래당을 위한 바른 미래는 어떤 것일까요.

 

지방선거 패배 후 한동안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유승민 의원이 패스트트랙을 기점으로 다시 전면에 나섰습니다. 어쩌면 유 의원이 그리는 바른미래당의 북벌이 무엇인지에 따라 바른미래당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중앙일보] 입력 2019.04.28 05:00 / 유성운 기자


이 기사는 이중톈 삼국지 강의 2, 자오융 삼국지와 게임이론, 최석원·김보경 南宋 문인의 三國 역사관 고찰蜀漢 정통론과 인물 담론을 중심으로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