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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풍월 사선암 2019. 9. 8. 07:50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을 빌린 사람보다 훨씬 기억력이 좋다.

-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 한 명


개요

18세기 미국의 정치인이자 계몽사상가, 발명가.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프랭클린의 어린시절

아버지는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17명의 자녀 중 10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글 읽는 법을 배웠고, 그가 받은 정식 교육은 초등학교를 1년 다닌 뒤 개인 교수에게 1년을 더 배운 게 전부였으며, 그나마 10세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 제임스의 인쇄소에서 인쇄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718~23년에 인쇄술을 완전히 익혔는데, 이것을 평생 동안 자랑으로 삼았다. 같은 기간에 그는 책을 열심히 읽어 글 쓰는 법을 사실상 독학으로 배웠다.


처음에는 시에 열정을 쏟았다. 도제 시절 초기에 그는 이야기체 시를 2편 썼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평생 거지"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뒤, 시에 대해서는 이따금 관심을 갖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산문의 경우는 달랐다. 조지프 애디슨과 리처드 스틸이 편집한 유명한 평론 잡지 스펙테이터 The Spectator1711~12년에 영국에서 간행되었는데, 프랭클린은 거의 평생 동안 이 책들을 끈기있게, 그러나 이따금 모방했다.


그는 평론을 읽고 각 문장의 뜻을 요약한 다음, 며칠 동안 공책을 옆으로 밀쳐 두었다가 자신이 평론을 다시 써보곤 했다. 원래의 평론과 자신이 쓴 평론을 비교해 본 그는 어휘를 늘려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스펙테이터에 실린 평론을 운문으로 바꾸는 작업도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1721년에 형인 제임스 프랭클린은 스펙테이터와 비슷한 주간지 뉴잉글랜드 커런트 New England Courant를 창간하고, 독자들의 기고문을 받아 실었다. 16세가 된 벤저민은 독자들이 투고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도 글을 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1722년에 그는 '조용한 공산적 사회 개량가'라고 서명한 14편의 연작 평론을 썼다. 뉴잉글랜드의 장례식 때 부르는 만가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유식한 말에 대해 입으로만 공치사하는 것을 풍자한 이 글들은 뒷날 프랭클린이 사용한 문체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1722년말에 제임스는 식민지 당국과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커런트의 인쇄 및 발행을 금지당했다. 그는 신문을 계속 발행하기 위해 도제일을 하던 동생을 신문사의 명목상 발행인으로 만들었다. 제임스는 벤저민과 새로운 도제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공표하지는 않았다. 몇 개월 뒤 제임스와 말다툼을 벌인 벤저민은, 형이 함부로 자기를 계약 불이행죄로 법정에 고소하지는 못하리라(그랬다가는 형 자신의 책략을 폭로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신하고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형의 약점을 이용한 것은 공정하지 못했다. 나는 이것을 내 인생 최초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다."


프랭클린의 젊은시절 모험들

보스턴과 뉴욕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벤저민은 필라델피아로 갔다. 일요일 아침에 지치고 굶주린 채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그의 모습은 자서전에 묘사된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빵가게를 찾아간 그는 빵을 3페니어치만 달라고 부탁하여, '커다란 퍼피 롤빵 3'를 얻었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빵을 하나씩 끼고 나머지 하나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마켓가를 따라 올라갔다. 그가 마침 리드 저택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뒷날 그의 아내가 된 데버라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데버라는 그를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꼴사납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몇 주 뒤, 그는 리드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인쇄공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1724년 봄에 그는 이미 독서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교재를 즐기고 있었고, 펜실베이니아 총독인 윌리엄 키스 경은 그에게 독립하여 사업을 시작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키스의 제의에 따라 프랭클린은 자금을 모으려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가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키스는 자신이 사업자금을 제공할 것을 제의했고, 프랭클린이 인쇄소에서 쓸 활자를 고르고 런던의 출판업자나 서적상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의 영국 여행을 주선해주었다.


프랭클린은 리드 양과 '모종의 약속'을 교환했고, 제임스 랠프라는 친구를 길동무로 삼아 11월에 '런던의 희망호'에 올라탔다. 그는 키스가 약속한 신용장과 소개장을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배가 바다로 멀리 나간 뒤에야 그는 총독이 약속을 어긴 것을 깨달았다. 퀘이커교도인 토머스 던햄이라는 상인이 키스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프랭클린은 나중에 가서야 다음과 같이 너그럽게 말할 수 있었다. "키스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했다. 그런데 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대'를 주었다."


런던에서 프랭클린은 당장 인쇄공으로 일자리를 얻었고, 작가로 출세하려고 애쓰고 있던 랠프에게 돈을 빌려줄 수도 있었다. 두 젊은이는 런던의 연극과 그밖의 즐거움을 함께 즐겼다. 오래지 않아 랠프는 여자용 모자를 파는 여자를 애인으로 삼았다. 랠프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면, 그녀는 이따금 프랭클린을 찾아와 돈을 빌려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프랭클린은 회고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종교적인 자제심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또 내가 그녀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점을 이용해서 그녀에게 추근거렸다(이것은 또 하나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화를 내며 나를 거절했고, 랠프에게 내가 한 짓을 알렸다."


그가 고백한 또 하나의 '잘못'자유와 빈곤, 쾌락과 고통에 관한 논문 A Dissertation on Liberty and Necessity, Pleasure and Pain(1725)이었다. 그는 윌리엄 울러스턴의 도덕론인 묘사된 자연의 종교 The Religion of Nature Delineated3판을 조판한 뒤 이 논문에서 착상을 얻어 그 논문을 썼는데, 여기서 프랭클린은 인간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인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동안 프랭클린은 데버라에게 1번밖에 편지를 쓰지 않았고, 이처럼 데버라를 홀대한 데 대해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726년에 프랭클린은 이미 런던에 싫증이 나 있었다. 그는 수영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순회 수영 교사가 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영국으로 오는 배에서 만난 토머스 던햄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신의 가게에 와서 사무를 보라고 제의했다. 그의 가게는 서인도제도의 무역을 대행하여 많은 이익을 얻게 될 전망이었다. 던햄의 제의를 받고 프랭클린은 귀국을 결심했다.


프랭클린의 성공

던햄은 프랭클린이 점원으로 들어간 지 몇 개월 뒤에 죽었다. 약관이 된 젊은이는 이전의 직업으로 돌아갔고, 1728년에는 친구와 동업으로 인쇄소를 차릴 수 있었다. 2년 뒤에 그는 돈을 빌려 독립해 인쇄소의 단독 경영자가 되었다. 그가 독립했을 당시 그의 사생활은 극도로 복잡했다. 데버라 리드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프랭클린에게도 중매가 들어왔지만 그가 사업으로 진 빚을 갚아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혼담이 깨졌다.


'통제하기 어려운 젊음의 열정'인 강렬한 성적 충동은 그를 '천한' 여자들한테 보냈고, 1730~31년 겨울에 그의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윌리엄의 생모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데버라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나' 173091일에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프랭클린은 다른 여자가 윌리엄을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민법상 결혼은 1774년에 데버라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데버라는 두 자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4세 때 죽었고, 딸 세어러는 나중에 리처드 배치 부인이 되어 부모보다 오래 살았다. 사생아인 윌리엄은 프랭클린의 집에서 자랐다.


프랭클린이 인쇄업으로 거둔 첫번째 성공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지폐 인쇄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프랭클린은 지폐의 본질과 필요성에 관한 연구 A Modest Enquiry into the Nature and Necessity of a Paper currency(1729)를 써서 이 일감을 얻는 데 일조했다. 그후 몇 년 동안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뿐 아니라 뉴저지와 델라웨이 및 메릴랜드의 공인 인쇄업자로 일했다.


돈벌이가 된 또 하나의 사업은 1729년에 창간하여 가장 훌륭한 식민지 신문의 하나로 널리 인정받게 된 펜실베이니아 가제트 Pennsylvania Gazette였고, 또하나는 1732~57년 해마다 출판된 가난한 리처드 연감이었다. 물론 몇 차례 실패도 맛보았다. 독일어 신문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폐간되었고, 월간지는 1741년에 제6호까지 발간한 뒤 폐간되었다.


그래도 사업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그는 부동산에 투자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었고, 캐롤라이나와 뉴욕 주 및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인쇄업자들과 동업하거나 제휴할 수도 있게 되었다. 1748년에 그는 프랭클린 홀 인쇄소에 자본을 출자하여, 그후 18년 동안 해마다 거의 500파운드에 이르는 수익을 올렸다.


공공 노력으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그가 처음 계획한 일은 '가죽 앞치마 클럽'(Leather Apron Club)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1727년에 조직된 이 클럽은 도덕과 정치 및 자연철학 문제를 토론하고, 보다 진취적 기상을 가진 회원들에게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사업 지식을 교환했다. 회원들이 좀더 쉽게 책을 입수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1731년에는 필라델피아 도서 조합이 조직되었다. 이 클럽을 통해 프랭클린은 시()에서 봉급을 받는 경찰대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클럽에서 낭독한 논설은 의용 소방대 결성으로 열매를 맺었다. 1743년에는 식민지 전역에 걸쳐 과학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끊임없는 서신 교환'을 하자고 제안했고, 이듬해 아메리카 철학 협회가 결성되었다. 1743년에는 펜실베이니아에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1749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청소년 교육에 관한 제안 Proposals Relating to the Educatin of Youth in Pennsilvania을 발표했다. 1751년에는 필라델피아 아카데미가 세워졌으며, 이 기관은 나중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로 개편되었다. 프랭클린의 사업 추진력이 너무가 뛰어났기 때문에, 훌륭한 명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았다.


프랭클린은 또한 정치에도 일찍부터 개입했다. 그는 1736~51년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서기로 일했고, 1737~53년에는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1748년 이전의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델라웨어 강에서 약탈 행위를 일삼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 해적에 맞서서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민병대 조직에 참여한 것이었다. 퀘이커교도를 포함하여 펜실베이니아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이익 집단에 호소하는 그의 수완은 명백한 진리 또는 필라델피아 시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현재 상황에 관한 진지한 고찰 Plain Truth : or, Serious Consideration on the Present State of the City of Philadelphia and Province of Pennsylvania(1747)에서 뚜렷이 드러나 있다.


1740년대에는 전기학이 새롭게 유행하는 학문이었다.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전기를 처음 소개한 것도 프랭클린이었다. 프랭클린과 서신을 교환하는 영국인 한 사람이 필라델피아 도서 조합에 발전기 1대를 보내왔다. 1746~47년 겨울에 프랭클린은 3명의 친구와 함께 전기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의 기후가 그들의 연구에 유리했고, 재능있는 기구 제작자들도 인근에 살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독창적인 실험과 기계를 고안하여 영국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것을 설명했다.


이 편지들은 친구들을 통해 런던의 왕립 협회나 젠틀맨스 매거진 Gentlemans Magazine에 전달되었다. 이 논문들은 1751년에 전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 기록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Electricity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고, 1752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1769년까지 영어판은 4, 프랑스어판은 2번 증보되었으며, 독일어(1758)와 이탈리아어(1774)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프랭클린의 명성은 급속히 퍼졌다. 그가 번개와 전기의 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제안한 실험은 프랑스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프랭클린은 프랑스에서 실험이 이루어진 뒤에야 그보다 더 간단하지만 위험한 방법, 즉 심한 뇌우 속에서 연을 날리는 방법을 시도해 본 것으로 여겨진다. 프랭클린과 그의 친구들은 전기의 불이 다른 물질, 특히 물과 금속 사이에서 확산되고 그런 물질에 끌리는 요소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렸다.


전기를 많이 가진 물체가 전기를 적게 가진 물체에 접근하면 방전 현상이 일어나 두 물체의 전기량이 같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유체' 이론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을 이전의 어떤 가설보다 더 많이 설명해주었고, 건물에 뾰족한 쇠막대를 세우면 벼락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그의 제안은 실제적 방법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입증되었다(피뢰침).


프랭클린은 그의 숭배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독창적인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협력자들은 그들이 제공한 도움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지금도 전기를 논할 때 쓰이고 있는 용어들(양전기, 음전기, 전지, 도체 따위)의 대부분을 만들어 냈고, 실험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프랭클린의 공직 생활

1753년에 프랭클린은 북부 식민지 전체의 우편물을 담당하는 체신장관 대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식민지 전체의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1754년에 그가 제시한 '연방안'은 올버니 의회에서 채택되었는데 이 안은 불법 침입하는 프랑스인에 대한 공동 수비대를 조직하고 새로운 정착촌과 인디언의 관계를 감독하기 위한 식민지 대표들의 전체 회의를 창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의회는 물론 영국 국왕의 조언자들도 이런 연합체에 대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성은 프랭클린 편이었지만, 권력 구조는 그에게 불리했다. 학자들 중에는 이런 갈등이야말로 그의 정치 경력 전반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1755년에 프랭클린은 파산할 뻔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에드워드 브래덕 장군의 뒤켄 요새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농부들이 제공한 말과 마차의 손실을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2개월이 넘도록 그는 2만 파운드에 가까운 금액을 자기 주머니에서 지불해야 할 처지에 직면했다. 그러나 결국은 정부가 그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변경을 지키기 위한 기금이 필요해지자, 펜실베이니아의회는 식민지 설립 특허에 따라 펜실베이니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펜 일가의 땅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펜 가족이 과세에 동의하거나 정부 형태가 바뀌어야 했다. 1757년 봄에 프랭클린은 이 문제를 해결할 식민지 의회 대표로 선발되어 17628월까지 영국 런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가 마련한 타협안에서 펜은 개간된 토지에 대한 과세에는 동의하지만 측량되지 않은 토지에는 세금을 내지 않기로 했다. 이 첫번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영국에서 친구들을 사귀는 한편, 영국 식민지와 캐나다 및 과달루페 획득과 관련된 영국의 이익에 대한 고찰 The Interest of Great Britain Considered with Regard to Her Colonies and the Acquisitions of Canada and Guadaloupe(1760)을 썼다.


이 책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이 캐나다를 병합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에는 날로 세력이 커지고 있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견제하기 위해 캐나다를 프랑스인들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프랭클린은 식민지에 산아제한을 실시하여 어떤 집안에 3번째나 4번째 아이가 태어나면 당장 목졸라 죽이라고 산파에게 요구하는 법률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키면, 식민지 세력이 커지는 것을 훨씬 더 간단하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7년전쟁을 끝낸 파리 조약(1763)으로 캐나다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이 무렵 프랭클린은 의회와 식민지 소유자들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필라델피아에 돌아와 있었다. 의회는 펜실베이니아가 국왕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1764년말에 프랭클린은 런던으로 다시 가서 이런 내용의 새로운 특허장을 얻으려고 협상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의 시련은 이른바 인지세법(Stamp Act) 위기를 둘러싼 감정의 홍수 속에 파묻혔다.


프랭클린은 인지세법에 반대했지만(그는 '연방안'에서 과세는 식민지 주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특권이어야 한다고 단언했음), 막상 인지세법이 통과되자 아메리카인들의 감정을 과소 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프랭클린 훌 인쇄소를 위해 인지를 주문하는 한편, 필라델피아 인지국장 자리에 자신의 친구를 추천한 것이다. 필라델피아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킬 만큼 분개했다.


프랭클린의 아내 데버라는 폭도들이 집으로 몰려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총으로 집을 지켜 달라고 친척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프랭클린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증오의 대상인 이 조례의 철회를 요구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영국 하원에 극적으로 출두함으로써 명성을 되찾았다.


여기서 그는 일부는 우호적이고 일부는 적대적인 청중으로부터 쏟아진 174개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 대화의 속기록을 보면, 식민지는 자신의 입법부를 통해서만 세금을 부과받을 권리가 있다고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다. 프랭클린은 새 특허장을 얻지는 못했지만, 펜실베이니아의 대리인으로 계속 런던에 머물러 있었고, 그밖에 3개의 식민지 조지아(1768)·뉴저지(1769)·매사추세츠(1770)도 프랭클린을 대리인으로 삼았다.


그는 이런 지지와 영국 휘그당(의회주의에 입각한 인도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산업가와 비국교도들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잇따른 위기를 헤쳐나갔다. 이런 위기는 결국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로 끝났다. 그는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사실과 여러 개의 자치 국가로 이루어진 대영제국에 대한 희망도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깨달았다. 그는 친구들과 영국 대중들에게 식민지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765~75년에 그는 당시 벌어지고 있던 논쟁에 관한 126편의 논설을 신문에 발표했다. 1773년에 퍼블릭 애드버타이저 Public Advertiser에 발표된 거대한 제국을 작은 제국으로 환원할 수 있는 몇 가지 규칙프로이센 왕의 칙령같은 논설에서, 그는 영국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논설들을 종합하면 오랫동안 계속된 논쟁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17741월에 프랭클린은 매사추세츠 총독인 토머스 허친슨이 영국 상관들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한 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신부에서 해임되었다. 17753월에 그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을 떠났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이튿날 그는 제2차 대륙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여 우편제도 조직과 독립선언서 작성을 위한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캐나다를 아메리카의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임무를 맡았지만 실패했다.


17769월에 대륙회의는 프랑스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요청하기로 합의했다. 프랭클린을 포함한 3명의 대표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파리에 도착하여, 당장 프랑스의 외무장관인 베르겐 백작 샤를 그라비에와 비밀 회담에 들어갔다. 첩자와 밀정들이 그의 집에 들끓었지만, 프랭클린은 곧 동포들을 봉건적인 과거에서 끌어내어 자유로 인도하는 소박한 신대륙 귀족 계급의 화신으로서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코담배갑에서 요강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예술품'에서 볼 수 있었고, 외교관, 과학자, 프리메이슨 단원, 그리고 상류 계층의 귀부인들이 모두 그와 사귀려고 애썼다. 이런 아첨은 프랭클린 숭배로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털모자와 안경을 쓴 프랭클린은 재치와 사교적인 우아함으로 능숙하게 대처했다.


존 버고인 장군이 이끄는 6,000명의 영국군이 뉴욕의 새러토가에서 항복하고, 영국이 반란을 쉽사리 진압할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뒤인 17782월에야 프랑스는 미국이 요구하는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는 혁명군을 위해 상당한 액수의 차관을 제공했고, 1781년에 미국이 요크타운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쯤에는 12,000명의 육군과 32,000명의 해군이 조지 워싱턴 장군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를 떠났다(프랑스-미국 동맹). 이런 강력한 동맹 세력을 얻었는데도 평화는 좀처럼 얻기 어려웠다.


1779년 스페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전쟁에 개입했지만,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에서 이해 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에 미국의 독립은 승인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영국과 개별 강화조약을 맺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프랭클린은 동료 대표인 존 애덤스와 존 제이가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와 사전 협의도 없이 1781년 말에 영국과 예비 협정을 맺을 때까지 베르젠 백작과 함께 일했다.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정식 조약은 178393일에 맺어졌다(파리 평화조약).


프랭클린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맺기 위해 2년 더 파리에 머물러야 했다. 프랑스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그는 최초의 기구를 띄우는 광경을 지켜보았고, 루이 16세가 임명한 위원회에 참여하여 '동물 자기(磁氣)', 즉 최면술에 관한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독일의 의사 프란츠 안토 메스머는 최면술로 모든 질병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많은 질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말년과 평가

방광에 큰 결석이 생기는 바람에 마차 여행이 어려워진 79세의 프랭클린은 들것에 실린 채 르아브르 항구로 운반되었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그는 계속 사회 생활에 참여했지만 되도록 조용히 살았다. 그의 가장 중요한 봉사는 1787년의 제헌회의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대통령보다 집행위원회를 국가 원수로 삼는 것이 더 좋고 의회는 양원제보다 단원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견해를 동료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이 중요한 회의가 끝나는 날 한 동료가 프랭클린을 대신해서 호소문을 읽었다. 이 글에서 프랭클린은 자신의 반대를 포함하여 새 정부 형태에 대한 반대 의견을 모두 잊어버리고, 마침내 제정된 헌법을 모든 대표들이 만장일치로 지지하자고 호소했다. 만장일치로 헌법을 채택하자는 프랭클린의 동의는 당장 통과되었다(미국연방헌법).


생애의 마지막 해에 그는 줄곧 병석에 누워서 지냈고, 아편을 사용해야만 통증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1790417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필라델피아는 그 도시가 생긴 이래 가장 인상적인 장례식으로 그를 떠나 보냈고, 루이 16세를 튈르리 감옥에 가둔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들에게 계몽과 자유의 상징이었던 인물에 대한 찬사가 끝없이 쏟아졌다. 유럽인들은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튀르고의 경구를 상기했다. "그는 하늘에서 벼락을 낚아챘고, 폭군들한테서는 홀()을 낚아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의 미국인 가운데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저명한 인물일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공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일상 생활의 편리와 안전에 이바지한 공로도 그에 못지않게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프랭클린이 발명한 난로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는데, 열량이 벽난로보다 훨씬 많다. 피뢰침과 복초점 안경도 프랭클린의 착상이었다.


프랭클린은 하나의 공동체가 합심하여 노력하면 소수의 부자만이 얻을 수 있는 쾌적함을 다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설들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이중에는 북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것도 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생각이 넓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널리 존경을 받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동시대에도 미움을 받은 경우가 있었고, 후세에도 종종 물질만능주의자니 위선자니 하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는 프랭클린을 미국인의 국민성 가운데 가장 나쁜 특징들을 한데 모아놓은 인물로 보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본보기로 여겼는데, 베버에게 있어 '프로테스탄트 윤리'란 근대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조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정신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오해에서 생겼다는 것이 프랭클린을 존경하는 이들의 생각이다. 즉 프랭클린과 '가난한 리처드'를 동일시하거나, 프랭클린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 Autobiography의 불완전한 자화상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 세계 최대의 PC통신 서비스회사인 AOL과 디스커버리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중 벤저민 프랭클린은 5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