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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본 외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풍월 사선암 2018. 12. 14. 11:23

이런 일본 외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가나야마 부른 박정희 한국 땅에 잠든 가나야마 전 주한 일본 대사 한국 대사 역할 한번 해주시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지난 4일 경기도 파주의 천주교 하늘묘원에 있는 가나야마 마사히데 전 주한 일본 대사의 묘비를 살펴보고 있다. 가나야마 대사는 역대 주한 일본 대사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 땅에 묻혔다. "죽어서도 한·일 관계 발전을 지켜보고 싶다"고 했던 가나야마 대사를 위해 최 원장이 묏자리를 마련해줬다. 최 원장 자신의 가묘가 10m 옆에 이웃해 있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 자리 잡은 하늘묘원. 야트막한 구릉 지대에 천주교 묘지가 조성돼 있다. 이곳에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19091997)의 묘가 있다. 묘역 관리는 비교적 잘 돼 있었다. ‘2대 주한 일본국 대사, 金山 아우구스티노 政英님의 무덤이라고 또렷하게 쓴 묘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인물의 묘가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에 들어선 자세한 사연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수교 협상을 전후한 임시대리대사 체제가 끝나고 663월 기무라 시로시치(木村四郞七) 초대 주한 일본 대사에 이어 가나야마가 68715일 제2대 대사로 서울에 부임한다. 722월까지 37개월간 주한 대사로 일하면서 한국의 산업화 초기에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대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재계 총리 이나야마도 두 손 들어

 

특히 그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만나면서 기백이 넘치는 훌륭한 분이라고 평가하면서 각별한 존경을 표시했다. 박 대통령도 그를 격의 없이 대하며 아꼈다. 최서면(89)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은 58년부터 30년간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연구원을 설립하고 독도와 한·일 관계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원로 역사학자다. 박 대통령과 가나야마 대사의 친분 관계를 가까이서 지켜본 최 원장은 포항제철은 박태준씨가 주도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나야마 대사의 숨은 공로도 있다며 비화를 공개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술이나 먹자며 가나야마 대사를 청와대 쪽으로 불렀다. 박 대통령이 돌발 질문을 던졌다.

 

박정희=“가나야마 대사, 당신은 누구요.”

 

가나야마=“, 일본국 주한 특명전권대사입니다.”

 

박정희=“거꾸로는 안 되겠소. 대한민국의 주일 특명전권대사 역할 한번 해주시오.”

 

박 대통령은 이날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나야마 대사에게 건넸다. 친서에는 포항제철소를 만들고 싶은데 일본 측이 기술 협력을 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일본 외무성에는 알리지도 않고 가나야마 대사는 조용히 도쿄로 건너가 사토 총리를 만났다.

 

사토=“(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지원하는) 그 문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또 해달라고 가져왔군.”

 

가나야마=“박 대통령께서 저에게 이 친서에 답이 없으면 한국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한 관계가 끝장납니다.”

 

사토=“이거 큰일 났네.”

 

사토 총리는 그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 겸 일본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에게 전화를 돌렸고 그날 밤 세 사람이 만났다.

 

이나야마=“나사도 제대로 못 만드는 한국이 무슨 제철소야.”

 

가나야마=“그런 말씀 마십시오. 1897년 야하다(八幡) 제철소(신일철 전신)를 만들기 전에는 우리도 나사조차 못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변명보다는 도와줄 방법을 찾아주세요.”

 

가나야마는 마치 주일 한국 대사로 부임한 사람처럼 집요하게 이나야마 회장을 설득했다. 당시까지 일본의 재계 총리로 불리던 이나야마 회장은 결국 마음을 돌렸고 포항제철소 지원의 길이 열렸다.

 

광복절 행사에도 참석 못 할 이유 없어

 

기억할 만한 일화는 또 있다. 대사 부임 이후 처음 맞은 693·1절 기념식에 가나야마는 주한 일본 대사로서 사상 처음 참석했다. 이후 지금까지 어떤 후임 대사도 엄두를 내지 못한 기록이다. 당시 본국의 질책을 받자 가나야마 대사는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한국과 잘 지내기로 해놓고 한국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 문제가 되나. 8·15 광복절 행사에도 못 갈 이유는 없다고 항변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가나야마 대사가 일관성 있게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자 일부에선 창씨개명한 한국인 김씨의 후예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야마 대사가 나는 원래 구보타(久保田) 가문 출신인데 가나야마 가문의 양자가 됐다고 해명하자 해프닝으로 끝났다. 대신 그는 김해김씨 명예회원으로 명부에 올랐다.

 

이처럼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렇다고 대사까지 지낸 일본인이 사후에 한국 땅에 묻힌 곡절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1, 가나야마 마사히데 전 주한 일본 대사(오른쪽)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왼쪽)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영세명(아우구스티노)을 쓴 두 사람이 1970년대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바오로 6세와 함께 만났다. 2, 1969123일 가나야마 당시 주한 일본 대사(오른쪽)가 김학렬 부총리와 포항제철 차관 도입 관련 서명을 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숙원사업이던 일관제철소 건설에 속도가 붙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한 해 전인 1909년 도쿄에서 태어난 가나야마는 97111일 미수(米壽·88)를 넘겨 타계한다. 도쿄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5세 때 외교관이 된 이후 38년간 바티칸 주재 참사관, 칠레·폴란드 대사 등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도쿄의 천주교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 생전 그를 아끼던 한·일 양국의 지인들이 몰려들었다.

 

가나야마의 자녀 12명 중에서 장남은 장례식에 참석하러 한국에서 온 노신사에게 다가가 최서면 원장님이십니까라며 인사를 건넸다. 장남은 부친께서 내가 죽으면 유골을 최 원장께 맡겨달라고 유언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친께서 최 원장님께 말씀 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절친 최서면 원장에게 한국에 묻어달라

 

자신의 유골을 부탁할 정도로 최 원장과 돈독하게 된 사연이 있다.

 

72년 귀국한 가나야마 대사에게 일본 외무성은 유럽일본관장 자리를 대사급으로 격상해 맡기려 했으나 가나야마 대사는 사양하고 바로 은퇴했다. 그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그해 11월 도쿄에 있던 한국연구원으로 최 원장을 찾아갔다.

 

당시의 심정과 각오를 대사는 88년 발표한 최서면과 나라는 글에서 토로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사로 있으면서 일·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품었고 제2의 인생을 일·한 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했다고 썼다.

 

최 원장은 가나야마 대사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사람들은 미국·소련(러시아중국·영국과 외교를 잘하면 일본 외교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일하면서 보니 이들 4개국과의 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한국과의 관계를 잘못 처리하면 일본 외교의 실패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일 관계의 중요성에 공감한 두 사람은 이날 만남을 계기로 의기투합했다. 최 원장은 한국연구원에 국제관계공동연구소를 새로 만들어 가나야마 대사에게 초대 소장을 맡겼다. 같은 천주교 신자인 데다 공교롭게도 영세명(아우구스티노)이 같은 두 사람은 일가(一家)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754, 가나야마는 최 원장의 모친 3주기를 맞아 방한한다. 지금은 가나야마 대사 자신이 묻힌 파주 천주교 하늘묘원을 찾아 참배했다. 차를 마시면서 가나야마 대사가 대뜸 최 원장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가나야마=“나도 죽으면 이 땅에서 묻히고 싶다. 최 원장과 이 세상에서 일·한 관계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최서면=“정말인가. 그럼 내가 여기에 묏자리를 만들 테니 나중에 오시겠나.”

 

최 원장은 자신이 매입한 가족묘지 공간에 가나야마 대사의 가묘(假墓)를 만들어줬다. 그 후 가나야마 대사는 자신의 가묘를 찾아 영혼의 집이 마련됐다고 기뻐하면서 자신의 가묘에 성묘까지 했다. 지금은 가나야마 대사의 묘 바로 옆에 최 원장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유해 봉환식 때 일부 반일 단체 술렁

 

가나야마 대사가 9711월 타계한 뒤 그의 유골이 실제로 한국 땅에 묻히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이듬해인 988월 가나야마 대사의 6남 가나야마 세이기치(金山成吉·NHK 기자)가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방한했다. 하얏트 호텔에서 조촐한 유골 봉안식이 있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날 행사를 주관한 김수한(87)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은 당시 경찰로부터 특이동향 소식을 접했다. 주한 대사를 지낸 일본인이 한국 땅에 묻힌다고 하니 일부 반일 단체가 술렁거린다는 내용이었다. 김 회장은 ·일 관계를 위해 고향도 아닌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가나야마 대사의 정신이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환영해야지 소란을 피워서는 절대 안 된다며 사복 경찰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최 원장은 한국에 유골의 대부분을 묻고 그중 극히 일부를 가나야마 대사의 아들에게 줬다고 비화를 공개했다.

 

시인 구상(具常·19192004)이 쓴 가나야마 대사의 비문에는 나는 죽어서도 일·한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고 다짐했던 가나야마 대사의 유언이 기록돼 있다.

 

·일 모두 기억해야 할 가나야마 정신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 대사는 지난해 11월 최서면 원장, 김수한 회장과 동행해 가나야마 대사의 파주 묘지를 직접 참배했다. 그 자리에서 벳쇼 대사는 한국 분들이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 선배 대사의 유골을 모셔주셔서 뼈에 사무치게 감사 드린다고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김수한 회장은 가나야마 대사는 딸을 한국인에게 시집 보낼 정도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좋아했고,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한국을 사랑한 일본 외교관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일 관계를 큰 각도에서 바라본 가나야마 대사의 정신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이어받아야 한다면서 우리도 종전 70주년을 맞아 과거에 너무 집착하거나 편협한 반일 감정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0년 이라크 부흥대사를 끝으로 은퇴한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 전 주한 일본대사관 문화원장(공사)후배로서 가나야마 대사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 관계와 역사를 잘 모르는 일본인들이 한국을 오해하고 비방한다일본에서는 가나야마 대사의 정신을 잊고 있는데 그분의 정신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서면 원장은 한국에서는 아베는 왜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듣고, 요즘 일본에 가면 한국은 왜 그래라는 말을 듣는다면서 ·일 관계의 중요성을 일찍이 역설한 가나야마 대사의 정신이 요즘 같은 때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출처 : 2015.8.9 중앙SUNDAY 장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