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승무 - 조지훈

풍월 사선암 2019. 1. 31. 20:22


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시어풀이

* 승무 : 인간의 고뇌를 상징하는 춤.

* () : 비단 옷감. 비단 옷.

* 나빌레라 : 나비 같아라. '나비일레라'의 준말.

* 박사고깔 : 얇은 비단으로 된 고깔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역설적 표현. 관능미를 드러내고 있다.

*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 : 빈 무대(적막감 공허감의 표현)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소매를 돌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표현. 시적 허용의 표현.

* 외씨보선 :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신으면 맵씨가 나는 버선

* 별빛 : 염원의 대상. 동경과 해탈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 두 방울 : 세속의 번뇌눈물

* 세사 : 세상사

* 번뇌는 별빛이라 : 번뇌의 종교적 승화역설적 은유

* 삼경 :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동안. 병야(丙夜)

*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 : 시간의 경과와 춤이 끝난 후의 정적감이 나타남.

* 얇은 사 하이얀 ~ 나빌레라 : 수미상관(맨 앞의 시구와 맨 뒤의 시구가 똑같음)의 구성으로 

  균형감과 안정감이 돋보인다.

 


|세속과 탈속의 경계


여승이 춤을 춘다. 머리에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하얀 고깔을 쓰고 있다. 시인은 여승의 모습에서 나비를 본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너울너울 날 듯 여승은 춤을 춘다. 고깔로 채 덮이지 않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보인다. “빈 대()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이다. 오동잎 잎새마다 달빛이 묻어 있다. 달빛을 받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여승을 보며 시인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는 대목에 승무(僧舞)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춤을 추는 여승의 두 볼에 달빛이 흐른다. “복사꽃 고운 뺨에 나타나듯 젊은 여인이다. 젊은 여인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한밤에 춤으로 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고와서 서러워라는 역설로 시인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고운 얼굴에 서린 서러움은 여승이라는 말에 새겨진 시적 울림과 어울려 이 시를 세속과 탈속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로 이끈다.

 

여승이라는 존재는 세속과 탈속의 경계에 놓여 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정신은 항상 저 너머를 꿈꾼다. 여승은 춤을 추면서 저 너머로 가는 꿈을 꾼다. 까만 눈동자를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는 행위에는 세속을 사는 서러움과 함께 깨달음을 향한 지독한(?) 열망이 스며들어 있다. 깨달음이란 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한 열망과 그 열망을 내려놓는 깨달음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심연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은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을 본다.

 

번뇌는 별빛이라


실제 여승이 눈물을 흘렸는지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여승의 얼굴에서 번뇌(煩惱)를 보고 있다. 번뇌에 빠진 여승이라고? 그럼 여승이 이 한밤에 춤을 추는 이유는 그 번뇌를 떨쳐내기 위함인가?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라는 구절에 이르면, 번뇌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세속에 있으니 세사(世事)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세사에 시달리지 않고 세속에 머문다면 그()는 이미 깨달은 이가 아니겠는가? 세사에 시달리는 사람의 마음속은 당연히 수많은 번뇌들로 들어차 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여승이라고 해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여승은 춤을 추고, 시인은 시를 쓴다. 몸짓으로 표현되는 여승의 춤에서 시인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별빛으로 이어지는 번뇌를 느끼고 있다. 번뇌라고? 시인만큼 번뇌에 빠진 이들이 있을까? 언어를 향한 지독한(?) 욕망에 빠진 이 사람들 또한 여승처럼 세속과 탈속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시어에 새겨진 경계, 그러니까 일상 언어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시어로 시인은 여승이 춤을 추며 바라보는 별빛을 묘사한다. 여승이 추는 춤 동작 하나하나가 시인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여승의 춤을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온몸으로 여승이 추는 춤을 느낀다. 번뇌에 찬 여승이 눈물을 흘리며 별빛을 보면 시인 역시 눈물을 흘리며 별빛에 시선을 모은다. 여승이 움직이면 시인도 움직이고, 여승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멈추면 시인도 숨을 멈추고 합장을 한다.


고행하는 나비 한 마리


귀뚜라미가 우는 삼경(三更)이다. 사람들은 진작 잠에 빠져든 시간에 여승은 춤을 추고, 시인은 시를 쓴다. 춤을 추고 시를 쓰는 일로 이들은 깨달음을 추구한다. 깨달음이라고? 도대체 깨달음이 무엇이기에 이 늦은 밤에 이들은 춤을 추고 시를 쓰는 것일까? 깨달음은 한 마리 나비일까? 여승의 머리에 앉은 나비 한 마리가 여승을 별빛으로 이끄는 것일까? 땅과 하늘을 잇는 나비 한 마리가 깨달음을 표현한다면, 장자가 꿈속에서 본 나비는 무엇이 될까? 물론 장자가 꿈꾼 세계와 부처가 꿈꾼 세계를 같은 맥락에 놓을 수는 없다. 허망하고 허망한 세계의 바깥으로 두 사람은 뛰쳐나갔지만, 장자는 인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무위의 길로 나아갔다. 이로 보면 번뇌는 인위=유위이고 번뇌는 별빛이라는 생각 또한 인위가 될 수밖에 없다. 나비는 하늘을 날고 여승은 춤을 추고 시인은 시를 쓸 뿐이다. 나비가 춤을 추고, 나비가 시를 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시인은 춤을 추는 여승에게서 하늘을 나는 고운 나비를 본다. 장자의 꿈에 나타난 자유로운 나비가 아니다. 번뇌에 매여 눈물을 흘리는 나비를 그는 보고 있다. 한없이 곱지만 한없이 서러운 나비는 이렇게 탄생한다.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안다고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다. 깨달음은 무언가를 아는 게 아니다. “번뇌는 별빛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누군가는 깨닫고 누군가는 어둠속을 헤맨다. 이 몸에 욕망이 남아 있는 채로 어떻게 깨달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승은 춤을 춘다. 아니, 몸에 새겨진 번뇌를 춘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온몸으로 시를 쓴다고 말한 어떤 시인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고행에 고행을 거듭하던 부처는 어느 날 고행을 끝내고 여인이 주는 죽을 먹었다. 고행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남아 있다.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이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행하()는 마음조차 내려놓음으로써 부처는 비로소 부처가 되었다. 그리고 죽을 먹었다. 춤을 끝내고 경계에 선 여승을 본다. 번뇌에서 별빛을 느끼는 여승을 본다. 새로운 고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비는 그렇게 또 새로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