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청록집’ 산실… 50년前 詩人도 ‘낙화’처럼 이곳에서 졌다

풍월 사선암 2019. 1. 31. 10:09

청록집산실50前 詩人낙화처럼 이곳에서 졌다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 있는 방우산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 옛 집터 부근 도로변 건축조형물 시인의 방’.

 

50주기 조지훈의 서울 성북동 放牛山莊’ 

좋아했던 성북동서 30년 살아  / 우이동 연봉 보던그림같은 곳  / 옛집은 안타깝게 98년에 헐려 

서재 갖고 싶어했던 그를 위해  / 조형물 방우산장’ 4년전 조성  / 한옥의 현대적으로 되살려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해방되던 해 겨울, 어느 눈 오는 밤, 젊은 시인 셋이 서울 성북동의 자그마한 집에 모였다. 소중히 품고 온 각자의 시 원고들을 신중한 얼굴로 서로 돌려보며 고르고 있었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으로 문단 활동을 할 수 없던 암흑기에 남몰래 우리말로 써뒀던 것들이다. 그 밤, 그렇게 탄생한 시집이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3인 합동시집인 청록집(靑鹿集)’이다.

 

첫눈에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단박에 뜻이 맞아 시심(詩心)을 나누었던 오랜 시우(詩友)들이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제 되찾은 조국에서 그동안 애써 간직해왔던 시들이 묶여, 마침내 자신들의 첫 시집을 내게 됐다는 기쁨에 그 겨울밤은 마냥 짧았을 테고, 때로 웃음소리는 낮은 담을 넘어 좁은 골목길까지 채웠을 것이다. “‘청록집이 우리 세 사람의 시의 고향이라는 것은 모두들 안다. 그러나 청록집간행을 을유문화사로부터 요청받고 이를 연락한 이는 두진이요, 청록집 원고를 서로 뽑아 주던 것은 어느 눈 오던 밤의 성북동 지훈의 집에서의 일이요, ‘청록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목월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우리 세 사람뿐이다.”(조지훈, ‘내 시의 고향, 나의 시작 노트’)

 

세 시인은 모두 1939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청록집에 수록된 시는 총 39편이며, 박목월의 시가 15편이고 조지훈과 박두진의 경우는 각각 12편씩이다. ‘청록집은 해방 직후의 극심한 이념적 혼란기 속에서, 자연을 시의 중심 주제로 삼아, 생명 감각을 되살리고 순수 서정을 탐구하여, 한국 전통 시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1940년대 한국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성취로 손꼽힌다. “자연의 발견이라는 공통점에 비하면, “목월의 향토성, 지훈의 고전 정신 그리고 두진의 종교적 세계관이란 차이점은 크지 않다. 그저 훗날 한국 시단에서 각기 독보적인 일가를 이룬 세 시인의 특징 하나씩을 억지로라도 그들의 첫 시집에서 찾고자 하는 평자(評者)들의 말일 뿐이다.

 

고려대에 있는 조지훈 시비. 전면 승무’, 후면에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가 새겨져 있다


한양 도성의 북쪽 마을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지어진 성북구 성북동은 예로부터 문인들이 사랑한 동네다. ‘청록집의 산실인 시인 조지훈의 예전 집 주소는 성북동 60번지 44호이다. 조지훈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30여 년을 살았던 이 개량 한옥을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1998년쯤에 그 집이 헐리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시인의 옛 집터임을 나타내는 작은 안내 비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청록집에 수록된 시인의 대표작 승무와 함께 간략한 내력이 적혀 있다. 뒤쪽 높다란 깃봉에는 늘 태극기가 걸려 있지만, 그저 이곳을 찾는 초행자를 위한 배려라고 짐작할 뿐이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조지훈은 바로 서울로 올라왔고, 명륜동 전세방에 잠시 머물다가, 부친 조헌영이 성북동에 이 집을 마련하자 옮겨와 함께 살았다.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岩石美)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繁華)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思想史)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돌의 미학’) “산골 맛에 사는성북동을 조지훈은 좋아했다. 특히 혜화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올라서서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과 삼선교에서 성북동 뒷산을 보며 황혼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맛은 동양화의 운치마저 있어 그만이었다. 시인의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 ‘운예의 한 구절이다. “성북동 넘어가는 성벽 고갯길 우이동 연봉은 말 없는 석산 오랜 풍상에 깎이었어도 보랏빛 하늘 있어 장엄하고나.” ‘운예햇빛을 가린 구름의 그늘을 뜻한다.

 

조지훈은 성북동이란 동네는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막상 성북동의 이 집에는 영 정을 붙이지 못했다. 말년에는 이 집을 떠나 살면 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조지훈은 운치라곤 한구석도 없는 집 장사가 지은 이 작은 한옥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 했지만, 평생 이 집을 떠나지 못했다. 큰아들 조광렬의 전언에 따르면, 6·25 전쟁 때 납북된 시인의 부친이 돌아올 때까지 이 집을 지키고 살아주기를 바라던 고모 조애영(시집 슬픈 동경을 남긴 시조시인)의 간곡한 뜻을 조지훈은 차마 거스르지 못했다(‘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 “자연과 가까운 곳에 네 평()이면 족한 서재는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고(‘나의 서재’), 결국 조지훈은 평생 자신 명의의 집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유독 밤비 오는 소리가 듣기 좋아 침우당(枕雨堂)”이라 불린, 그 사랑방과 문간방은 그런 탓에 청록집의 산실이었고, 조지훈 작품의 주된 창작 공간인 셈이다.

 

2014, 성북동 시인의 옛 집터 인근 도로변에 오롯이 조지훈 시인만을 기리는 서재가 생겼다. 성북동 조지훈 기념 건축 조형물, ‘시인의 방, 방우산장(放牛山莊)’이 그것이다. 조지훈의 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해서 조성한 공간이다. 전통 한옥의 처마와 벽, 창살 문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형상화했고, 그 뒤편에는 작은 잔디밭을 조성하고 그 위에 몇 개의 의자를 넉넉히 배치, ‘시인의 생각이라는 공간을 마련했다. 격자무늬 문은 시인의 예전 집터가 있는 북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고, 그 오른쪽 벽에는 시 낙화를 새겨 넣었다. 조형물 뒤쪽으로 작은 쉼터와 버스 정거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불교에서 ()’는 마음을 상징하며, 깨달음 혹은 거기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본심(本心)을 잃은 범인(凡人), 즉 실우인(失牛人)이 선()을 수행하여 자신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열 단계의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 그린 선화(禪畵)가 곧 십우도(十牛圖). 그 첫 번째 단계가 소를 찾는 심우(尋牛)”이며,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성북동 북향집심우장(尋牛莊)’이라 이름한 것도 그런 뜻이다. 하지만 방우(放牛)’십우도어디에도 없다. “방우는 곧 방우이목우(放牛而牧牛).” 소 한 마리를 곧 내 마음속에 풀어 놓고 기르면, “내 소, 남의 소를 가릴 것 없이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방우산장기’) 따라서 방우산장이란 특정한 장소나 일정한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시인이 머물고 거쳐 간 모든 곳을 뜻한다. 작은 선방에 그 이름을 처음 붙인 오대산 월정사, 시인의 탯줄이 묻힌 고향 마을과 이곳 성북동에도 있다는 말이다. 떠돌아다니다가 찾아든 차운 여관의 낯선 방과 따뜻한 친구의 집일 수도 있고, “피난 종군(從軍)의 즈음에는 야숙(野宿)의 담요 한 장이 될 수도 있다. “실상은 나를 바로 나이게 하는 내 영혼이 깃들인 고(), 이 나의 육신이 구극(究極)에는 나의 산장이기도 하다.”(‘방우산장기’)

 

시인의 마지막 방우산장을 내친김에 찾아간다. 올해는 마침 조지훈 시인의 사후 50주년이 되는 해다. 봄부터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기일(忌日)도 한참 지나 한여름이 돼버렸다. 시인의 유택은 6·25동란 중에 사망한 모친의 묘역 가까이 묻히고 싶어 했던 생전의 뜻에 따라, 고향 영양의 선산이 아닌 경춘선 마석역 뒤편 나지막한 야산(송라산) 기슭에 있다. 마석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왼쪽에 2012년 세운 풀잎 단장시비가 있다. 이듬해 흉상도 그 옆에 세우려 했다지만 여전히 빈 좌대(座臺)만 남아 있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연이야 새삼 말할 가치도 없다. 돌아가신 이를 위한 추모보다 살아 있는 자를 위한 업적이 우선한 탓이다. 시인의 일갈(一喝)이 불현듯 떠오른다. “두려운 일은 곧 뒷날 내 죽은 뒤 어느 사람이 있어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노라는 제 정성으로 방우산장이란 묘석을 내 무덤에 세워 줄까 저어함이다.” 역사(驛舍) 뒤편으로 나가면 시인의 묘소로 갈 수 있다. 여전히 돌아가야만 하는 길이지만, 이정표 삼아 나무에 매달아 놓은 작은 시구 판들 덕에 이젠 길 잃을 걱정은 없다. 승무가 적힌, 높이가 허리춤쯤 되는, 비목(碑木)을 찾으면 도착한 셈이다.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다. 이미 여러 곳에 있는 커다란 승무시비 중에서, 시인의 뜻에 가장 맞는 듯하다.

 

조지훈은 낙화를 자신의 작품 중에서 시로서는 어떨지 모르나 가장 애착이 가는 시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래서인지 낙화청록집에 수록된 이후에도, ‘풀잎 단장(斷章)’(1952)조지훈 시선(詩選)’(1956)에서도 빠짐없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시선의 경우는 같은 제목의 시가 바로 뒤에 이어진 탓에 제목을 낙화 1’로 바꾸었다. ‘낙화 2’도 그 창작 시기와 꽃이 지는 밤을 노래한다는 점만이 다를 뿐, 주제나 내용은 영락없는 판박이다. “피었다 몰래 지는/ 고운 마음을// 흰 무리 쓴 촛불이 / 홀로 아노니// 꽃 지는 소리/ 하도 가늘어// 귀 기울여 듣기에도/ 조심스러라// 두견(杜鵑)이도 한 목청/ 울고 지친 밤// 나 혼자만 잠들기/ 못내 설어라”(‘낙화2’ 전문).

 

낙화는 조지훈이 일제의 폭정과 창씨 개명 강요를 피해서, 고향인 영양에 은둔하고 있을 무렵에 써 내려갔던 작품이다. 그때의 시인은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라고 탄식하며,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줄 사람이 없고 발표할 지면도 없어, 결국 동물원 쇠창살 안 이국(異國)의 짐승들에게 여기 나라 없는 시인(詩人)이 있다고 속삭이듯 읽어주며 눈물지어야 했다.(‘동물원의 오후’) ‘낙화는 이른 아침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느낀, 자연의 섭리와 삶의 무상함과 비애를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노래한 절창이다. 몇 해 전 영양 주실마을을 찾았을 때, ‘지훈문학관에서 시인의 육성 시 낭송을 헤드폰을 통해 들었던 경험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코스모스는 일부분만이 남아 있어 아쉽지만, 여동생(조동민)과 함께 낭송한 낙화는 덤으로 시인의 육필로 만든 자막까지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조지훈이 투병 중에 녹음한 것이라 그 낭랑한 음성은 비록 많이 쉬었지만, 그 울림은 묵은 잡음을 충분히 덮을 만큼 힘차다. 곡을 붙여 노래라도 하듯, 남매가 함께 읊는 마지막 구절의 여운은 여태껏 귓가에 남는다.

 

정치인들이 쫓겨나듯 물러가며 함부로 시 낙화를 입에 올려 비난을 받곤 했다. 제 딴엔 바람탓을 하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미화하고 싶었나 보다. 시의 속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한 구절만을 제멋대로 인용하는 그 천한 술수가 놀랍다. 조지훈의 낙화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유명한 시구(詩句)로 시작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와 함께 현재의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다. 제목도 같고 유사한 주제를 다룬 탓에, 이 두 편의 시를 서로 비교하는 문제가 자주 시험에 나오지만, 우리네 어린 학생들도 그 깊은 뜻과 내력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웬만하면 틀리지 않는다.

 

·사진 = 박광수 / 불문학자·문화평론가 

문화일보 :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