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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반상의 로맨티스트’ 다케미야 마사키 9단

풍월 사선암 2017. 11. 4. 23:29

우주류’...나밖에 둘 수 없는 바둑을 두고 싶었다!

 

영원한 반상의 로맨티스트다케미야 마사키 9()

 

90년대에 접어들 무렵까지만 해도 일본바둑은 바둑을 대표하는 무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두는 현대바둑을 꽃피우고 발전시킨 선진국이었고 당연히 세계최강의 실력이었다. 그랬기에 조치훈 9단이 처음(1980) 일본 명인(名人)을 차지했을 때 크게 환호하고 벅찬 감동에 젖었다. 분명 일본바둑은 배우고 따라잡아야할 선망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축구의 한일전이 그러하듯 일본과 일본선수에 관한 한, 이유불문하고 기어코 이겨야만 하는 상대였다. 조치훈이 도전무대에서 상대한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가 그러했고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를 대하는 감정이 그러했다.

 

그런데 한 사람,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9단에 대해서만큼은 약간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치훈을 맹렬히 응원은 하되 그 상대가 다케미야라면 어쩐지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기사. 일본기사이긴 해도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참말 멋진 바둑을 선보였던 기사. 숱한 기사들 가운데 독보적으로, 일관되게 중앙바둑을 구사한 그의 기풍을 한국팬들은 우주류(宇宙流)’라 불렀다. 감성적으로는 둘 수 있을 것 같아도 이성적으로 감히 둘 수 없는 바둑이었기에 우주류는 시대의 로망이었다.

 

알파고가 등장하기 이전, 20세기 바둑사에서 딱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신포석을 창시한 우칭위안(吳淸源) 9단과 끝내기 영역의 신경지를 개척한 이창호 9단을 꼽겠다. 여기에 한명을 더한다면 다케미야 9단이다.”

 

바로 이 사람을 만나러가는 길. 프로데뷔 때부터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중앙바둑'을 구사하며 1970년대 일찌감치 일본바둑을 호령했고, 바둑무대가 국경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대회를 선보이기 시작한 1988년부터는 후지쯔배(2년 연속 우승)TV아시아선수권(4연속 제패), 그러니까 제한시간 3시간과 속기 양 대회를 양손에 움켜쥐었던 '원조 세계챔프'가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이다. 사진은 197631기 혼인보(本因坊) 도전기 장면. 당시 '컴퓨터 바둑'으로 불리던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9단에게 도전해 4-1로 첫 혼인보에 올랐다.


목진석 국가대표 감독이나 김성룡 9단을 위시해 대다수 기사가 20세기 위대한 족적을 남긴 3명의 기사로 망설임없이 우주류 바둑을 꼽는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군림한 일인자는 있었다. 그렇지만 새롭게 눈을 떠 새로운 길을 열어 바둑의 지평을 양껏 넓힌 일인자는 드물다. 더군다나 인공지능이긴 하지만 알파고를 대면하고 보니 더 절감하게 되는 사실이다. 알파고의 출현 이전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 보이고, 가치를 더 인정하게 된 바둑이 다케미야의 우주류다.

 

◀장남 요코 6단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들 또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낭만과 풍류를 아는 쾌남아다. 부자간 공식대국은 단 한 판도 없었다 한다.


그렇지만 20여 년 이상 일본바둑이 세계대회에서 별 성적을 내지 못하자 우리의 관심은 멀어졌고, 지금은 일본의 타이틀매치에 대해, 명인이 누구인지 혼인보(本因坊)가 누구인지 그런 것들을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최강의 승부사, 그들이 펼치는 무대만이 온통 관심사니까. 그렇지만 예전부터 혹 몇 백명의 일본기사 가운데 딱 한 사람 인터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사람, 다케미야 9단과 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알파고가 등장한 마당이다. 때마침 올여름 방한한 다케미야 요코(武宮陽光, 77년생, 다케미야 9단의 장남) 6단과 저녁식사에 이어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혹 일본에 가게 된다면 당신 아버지를 꼭 한번 인터뷰하고 싶다 넌지시 응수타진했더니 (술김은 아닌 듯한데) 노타임으로 자기가 반드시 다리를 놓겠다 호언장담을 했다. 이 인터뷰는 그때의 약속으로 이루어졌다.

 

도쿄에 도착한 912일은 다카오 신지(高尾神路) 명인과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9단의 제42기 명인전 도전7번기 2국이 친잔소도쿄(椿山莊東京) 호텔에서 시작된 날이었다. 일본의 3대 기전(기성, 명인, 혼인보) 7번기는 1년 전에 이미 예약을 받아 대부분 지방에서 유치하기에 이처럼 도쿄 한복판에서 구경할 수 있는 기회란 좀처럼 잡기 힘들다고 한다. 이 대국의 입회인이 다케미야 9단이었다. 이틀바둑이었으므로 이틀째(13) 오후에 호텔에서 인터뷰하기로 사전 약속이 돼 있었다. 장남 다케미야 요코 6단도 검토실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통역은 일본기원 인터넷사업부에서 일하는 홍근표 씨가 해주었다. 홍근표 씨는 제주도 출신이다.


알파고 출현 이후 재조명 받는 우주류

다른 사람이 둔 바둑을 따라하긴 싫었다

나만의 바둑을 두고 싶었고, 이기기 위해 실리바둑을 둔 적 없다

 

다케미야 9단이 42기 명인전 도전2국을 입회(심판장)한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이날을 인터뷰 날로 잡았다. 다케미야 9단은 종일 검토실에서 젊은 후배기사들과 격의 없이 의견을 주고 받았고, 종국 후에도 대국장에서 대국자들과 오랫동안 바둑내용을 검토하는 열정을 보였다.


-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께서는 많은 한국팬들이 좋아하는 일본기사입니다. 특히 한국기사들이 20세기를 밝힌 3명의 기사로 꼽고 있습니다. 알파고가 등장한 이후 선생의 우주류가 알파고의 바둑과 비슷하지 않느냐. 일찍이 두터움과 중앙세력을 구축한 선생의 바둑이 흡사한 면이 있어서 거기에 대해 꼭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알파고나 딥젠고...인공지능도 몇가지 있긴 하지만 이들이 두는 기풍이 나도 AI 바둑을, 감각적으로 인공지능의 기풍을 좋아합니다.”

 

- 한국에선 우주류로 통합니다만, 이전에 선생은 우주류보다 자연류(自然流)라고 불러달라고 하셨는데...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때 자연류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네요.”

 

- 선생의 중앙바둑이 자연스러운 흐름의 결과여서 자연류라고 하시나요? 자연스런 흐름을 따르다보니 중앙으로 흘러가게 되는 건지...

 

단지 중앙만이 아니라 내 바둑은 뭐랄까, 바둑돌들이 판 전체의 아름다운 흐름을 따라간다고 할까,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거겠지요. 자연스레 흘러가는 모습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중앙이 중시되는, 그런 모습이 되었다고 봅니다.”

 

- 그럼 프로가 되기 이전 연구생시절부터 중앙바둑에 대한 발상이랄까, 개념이랄까. 우주류에 대한 그런 구상을 하셨던 건가요?

 

“13세에 프로가 돼서 14세에 프로 경기에 나섰습니다. 처음 둘 때는, 14~15세 경에는 우주류가 아니었습니다. 프로가 된 뒤 바둑을 공부하면서 중앙 발상이 가장 좋지 않을까, 나만의 감각으로 두는 것이 맞지 않나 싶어 우주류로 가게 된 것이지요.”

 

- 그렇지만 이기는 것만 생각하면 중앙바둑보다는 실리바둑을 두는 쪽이 승률이 높던 때인데...

 

실리로 두면 이길 확률이 높다는 얘길 듣지만 나는 두고 싶은 바둑을 둡니다. 나밖에 둘 수 없는 바둑을 두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둔 바둑을 따라하긴 싫었지요. 나만이 둘 수 있는 바둑을 두고 싶었기에 이기기 위해 실리를 중시하는 바둑을 둔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손종수 바둑평론가 같은 이는 다케미야 9단이 중앙바둑을 개척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의 뒤늦은 기타니 문하 입문을 얘기한다. 1951년 도쿄 생인 다케미야는 8세에 바둑을 배워 13세에 프로 입단을 했고, 14세 중학생 때 기타니 문하로 들어간 색다른 행로를 걸었다. 프로 초단이 된 다음 기타니도장에 들어간 것. 자신도 훗날 내 바둑의 골격과 성향은 최초의 스승 다나카(田中三七一, 7)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고 술회할 정도로, 밖에서 이미 배울 만큼 배운 뒤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기에 그 덕에 실리에 민감한 스승의 바둑과 도장 기풍에 젖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거다.

 

참 상쾌하게 살고, 그리하여 유쾌하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는 거...다케미야 9단을 보며 든 생각이다.


우스갯소리에 가까웠지만, 서봉수 9단이 언젠가 다케미야 9단이 평생 우주류를 고수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의 유복하고 부유한 가정환경을 든 적이 있다. 아버지가 의사였고, 바둑을 처음 배운 계기도 어깨너머로 익혔다거나 뛰어난 재주를 보여 발탁되었다거나 한 게 아니라 여덟 살 생일선물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작했다. 바둑 정도는 교양으로 배워두는 게 나중 아이 삶에 낫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의도로. 집안이 부자였고 일본바둑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만들어진 기사였기에 비장감이랄까 벼랑에 선 듯 처절한 승부욕 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 ‘이기지 못하면 수입이 줄어 당장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은 결코 꿈도 꾸지 못할 바둑(서봉수 9단식 표현)’이 우주류라는 거다.


20대 젊은날의 다케미야 9. 단신을 훌쩍 커버하고도 남을 귀공자풍 풍모로 인기가 대단했다.

 

알파고의 감각을 대단히 좋아하지만 3-수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승부결과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바둑을 두는가가 더 중요

 

- 알파고의 출현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심지어 바둑사는 알파고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거란 말도 합니다. 알파고의 바둑을 보고서 느낀 점이라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감각적으로 대단히 좋아하고,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나와 맞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알파고의 감각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바둑판 전체를 보면서 자유롭게 두는 것이 알파고의 바둑인 것 같습니다.”

 

- 전부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차이점이라면?

 

중앙지향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3-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파고와 나와의 차이점은, 3-은 아직도 좋은 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좀더 확실히 얘기하면 안 좋은 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프로나 아마들이 알파고의 3-을 흉내내고 있지만 나의 직관이랄까, 감각적으로는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수가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만 알파고는 3-을 두고서도 매번 이기지 않습니까?

 

결국은 그게 좋은 수여서 이겼다기보다는 그 후 수의 전개가 잘 돼 이긴 것일 겁니다.”

 

- 프로란 일단 이겨야 빛날 수 있는 존재이지요. 어쩌면 알파고의 3-수법을 따라 하는 것도 그렇게 두어 이겼으니까...본디 승부세계에 발을 디딘 다음에야 그런 숙명을 벗어날 수 없을진대 프로에게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을까요?

 

프로기사는 이기고 지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바둑을 두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이라는 것은 줄곧 좋은 수만을 둘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어딘가에서 악수, 실수가 나오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바둑이 나오고 승부는 여러 면에서 갈리지요.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바둑을 두는가가 대단히 중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어떤 바둑을 두는가에 가장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 바둑의 수법이 워낙 치열하게 연구되고 있고 웬만큼 속속들이 파악되어서일까요? 요즘 기사들은 예전 각양각색의 기풍을 내세우던 선배들의 시대와 달리 자기 개성, 특색 없이 흡사 한 사람의 바둑을 보듯 이기는 바둑에만 골몰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승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야 이해가 갑니다만 일색의 바둑은 재미가 없죠.

 

전반적으로 자기의 생각이 아닌 흉내 내는 바둑이 많습니다. 물론 흉내 내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흉내 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 두는지 생각하고 알고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 전례 없던 알파고나 딥젠고 등 강력한 인공지능 바둑의 등장은 이미 바둑계에 상당한 영향과 파장을 미치고 있습니다. 향후 어떻게 될지 기대와 더불어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선생께서는 인공지능 바둑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알파고의 새롭고 좋은 점들을 참고로 해서 바둑을 배우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생각해본다면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알파고의 출현에 대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인공지능이 나와서 바둑은 더 발전할 것입니다.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에 자꾸 지더라도, 예를 들어 지구력만 놓고 볼 경우 인간은 2시간 계속 집중하는 게 물리적으로 무리지만 알파고의 에너지는 영향을 받지 않잖습니까. 인간과 기계가 100미터 경쟁하는 것은 승부 자체가 되질 않지요. 애초에 인간과 기계는 서로 경쟁할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알파고가 나온 이후 대단히 많은(좋은) 감각을 몸에 익혔기 때문에 이전의 기사들보다 빠르게 공부할 수 있고 진전을 보일 수 있게 되었지요. 알파고의 공헌입니다.

 

단 알파고가 대단히 훌륭하고 나도 대단히 좋아하지만 인공지능도 퍼펙트 하지는 않습니다. 100% 절대적이지 않지요. 알파고는 1초에 몇 천만 건의 수를 일순간에 찾아내지만 그것이 100% 해명되지 않는 것이 바둑의 훌륭함이지요.” (편으로 인터뷰 이어집니다)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 하면 멋진 대결을 펼쳤던 조 프레이저가 떠오르는 것처럼, '다케미야' 하면 조치훈 9단이 따라온다. 극도의 세력 대 극도의 실리로 서로 양 극단에 선 바둑을 보여주었던 두 사람의 대결이었기에, 더없이 짜릿했다. 19851월 서울에서 벌인 9기 기성전 도전1국은 바다 건너 일본이 아닌 지척에서 목도할 수 있는 대결이었고, 그래서 더 짜릿했다.

 

조치훈 9단을 안에서 살기 힘들게 했던다케미야의 우주류!

 

그렇다면 이것이 내 바둑이었다생각한, 그런 바둑이 있었을까요?”란 기자의 질문에 다케미야 9단은 역시 조치훈을 상대해서 둔 7번기 중 몇 국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두 기사의 기풍이 극명하기 때문에, 아마도 조치훈 9단을 상대할 때 우주류의 위용을 더 드러낼 수 있었을 터이다.

 

아래 <장면1>1985116~17일 서울에서 둔 9기 기성(棋聖)전 도전7번기 1국이다. 일본바둑 최초로 해외에서 연 도전기다. 서울을 첫 해외대국지로 선택한 건 아무래도 기성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7번기 결과는 아슬아슬하게(43) 조치훈 9단이 기성 타이틀을 방어했는데, 당시 조치훈 9단은 “4년 전 혼인보(本因坊)전에서 서로 만났을 때와는 다른 바둑으로 변하여 있었다본래 우주는 3차원적이 존재가 아니냐. 무한히 넓은 것뿐만 아니고, 무한한 깊이도 갖춘다. 기성전 일곱 판을 두면서 다케미야의 우주식이 3차원적인 충실도를 더하고 있음을 통감했다고 말했다.


<장면1> 바둑의 관상만 봐도 누가 두었는지 척 알 수 있다.

 

1로 넘었을 때 백의 다음수는 A가 정수일지 모른다. 그런데 다케미야 9단은 여기에 수를 더 소비해서는 대세에 뒤진다고 보고 백2, 과연 그답게 호방한 중앙경영을 들고나왔다. 이 수에 소비한 시간은 고작 8분이었다. 이로써 극도의 실리 대 극도의 세력이라는 두 기사의 본색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런 식이다. 매번 두 사람의 대결은. 그렇기에 관전자로선 한껏 스릴과 쾌감을 맛보게 된다. 드디어 흑45로 뛰어들었다. 첫날 봉수(封手)였다. (240수 끝, 7집반승)

 

상대가 대세력 바둑을 펼치는 다케미야 9단이기에, 두 사람의 대결은 언제나 상대 진영에 깊숙이 침투한 조치훈의 특공대가 살아남으면 이기고 잡히면 지는 양상이었기에, 악전고투 끝에 이 대국을 이긴 직후 조치훈이 한 안에서 살기 어려웠다는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국에서 서전을 장식한 기분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조치훈 기성에게 기자들이 종국소감을 물었을 때 안에서 살기가 어려웠다는 미묘한 말을 던졌고, ‘다케미야의 대세력 속에서 대마를 살리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받아들여도 그만인 이 말은 재일한국인이 일본땅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다는 심정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 ‘일본과 한국 어느 쪽에서도 깊숙이 들어서지 못하는 회색지대의 경계인으로서의 심정을 피력한 것이라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바둑은 고대의 신들이 즐기던 게임, 인간에게 준 선물"

 

영원한 반상의 로맨티스트다케미야 마사키 9()


일본바둑의 부진은 바둑 배우는 어린이 적어진 탓

첫 세계대회인 후지쯔배 우승했을 때 가장 기뻤다

 

- 일본바둑이 예전에는 세계를 대표하는 최강의 무대였지만 근래에는 저조합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중국, 한국에 비해 어릴 때부터 바둑을 공부하는 어린이가 적은 게 원인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은 초등학교 때, 또는 그 이전에 바둑을 많이 공부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어릴 때부터 바둑을 배우는 어린이가 적습니다. 바둑의 좋은 점을 부모들이 인식해 어릴 때부터 바둑을 시작하는 어린이가 늘어나면 한국,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 예전엔 기타니 문하같이 어린 재목들을 발굴, 육성하는 도장(道場) 시스템 있었는데 시대가 달라진 지금은 이런 시스템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최근 젊은 기사들의 연구회가 매우 활발합니다. 중국, 한국에 늘 꺾이기 때문에 맞서기 위해 연구회가 많아졌지요. 기전 대국 이외에도 바둑을 공부하는 연구회가 많아졌어요. 따라잡겠다는 각오도 단단하고...분위기가 좋습니다.

 

1988년 봄(4)에 일본이 주최한 후지쯔배(富士通杯) 세계바둑선수권전은 바둑역사상 최초의 세계대회였다. 이어 그 해 여름(8) 상하이에서 응씨배가 연이어 개막했다. 1988년을 국제대회 원년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당연히 뜨겁게 관심이 쏠렸던, 세계 최고 최강의 기사가 누구인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1회 후지쯔배에서 우승한 사람은 일본바둑을 대표하는 조치훈이나 고바야시도 아닌, 중국의 녜웨이핑이나 한국의 조훈현도 아닌,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중앙바둑을 두는 다케미야 9단이었다. 시상식에서 우승소감을 말하는 '원년 세계챔프' 다케미야 9단.


, 한중일이 이렇듯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발전해 나가는 모양은 좋다고 봅니다. 다만 특별히 국가간, 국적을 구별하고 경계를 구획하고 넘버원을 매기는 건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은 거의 비슷한 인종이라고 할까. 문화나 사고하는 면에서도 공통점이 많습니다. 어떤 국가의 누군가가 넘버원이 되는 게 전혀 분할 것도 이상하게 받아들일 것도 아니지요. 적어도 바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면 더 그렇겠지요.

 

1회 후지쯔배 결승에는, 당시 전성기를 넘기지 않았나 여겼던 다케미야와 린 하이펑(林海峯) 9단이 올랐다. 그런데 이들은 이듬해 2회 대회에서도 또 한번 약속이나 한 듯 결승에 올라 제한시간 3시간짜리 세계무대의 판도는 국내무대와 다르다는 걸 보여주었다.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 시대에 점차 짧아져가는 제한시간 등, 시대의 흐름을 읽고 준비한 승부사들이었다. 사진은 1회 후지쯔배 결승 장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한국의 조남철, 조훈현...특히 조훈현은 내 친구이기도 하고 바둑도 세지만 정말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조훈현 같은 한국의 일인자가, 지금은 국회의원이라 바쁘지만...이러한 훌륭한 분들이 일인자가 되어 끌어왔던 게 한국에게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한국도 중국도 대단히 좋아합니다.”



다케미야 9(사진 중앙)19892회 후지쯔배도 석권했다. 2년 연속 우승함으로써 명실상부 세계바둑챔프임을 만천하에 고했다. 왼쪽은 3위를 차지한 조훈현 9단이고 오른쪽은 준우승한 린하이펑 9.

 

여담 하나 덧붙인다면, 특히 후지쯔배는 예전부터 항아리 모양의 고급 도자기를 트로피로 줘 눈길을 끌었는데, 이창호 9단을 모델로 그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최택이 여자친구 덕선이에게 바로 이 항아리 트로피를 선물로 준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덕선의 반응이 이랬다. "답답해 미치겠어. 바보 아니야? 대회에서 받은 거 아무거나 하나 가져오랬더니 저거 가져왔어."

 

- 조훈현 9단 얘기를 하시니 갑자기 여쭙고 싶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선생께선 1988년과 891~2회 후지쯔배를 연속 우승했습니다. 세계대회를 석권한 최초의 챔피언이었고요.

 

조훈현 9단은 이어 19891회 응씨배를 우승했지요. 당시 세계대회라곤 후지쯔배와 응씨배 두 개뿐이었는데 이 양대 챔피언을 한번 붙여보자, 누가 더 센지...당시 분위기를 타고 급조한 이벤트대회가 19903월 서울에서 열린 효성에바라배였지요. 말하자면 통합챔피언전 같은 것으로 3번기로 두었는데 그때 조훈현 9단을 2-0으로 눌러 한국팬들에게 낙담을 안겨주었지요. 기억하실 겁니다. 하하. 월간바둑 기자로 현장 취재했기에 생생합니다.

 

19903월 서울에서 열린 효성에바라배 세계바둑정상대결 3번기는 후지쯔배 우승자인 다케미야 9단과 응씨배 우승자인 조훈현 9단의 통합타이틀매치 격이었다. 전야제에서 기자들의 요구로 악수 포즈를 취한 두 대국자.


그런데 이 대결 말고도 조훈현 9단에겐 역대전적 93(비공식 포함)로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조훈현 9단이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86년부터의 대결만 따져도 63패로 강했습니다.

 

그런데 조치훈 9단에게는 후배에게 쫓기는 처지라 부담스러우셨는지 좀 졌습니다(통산전적 3362). 타이틀전에서는 기성, 명인, 혼인보 3대 기전(도전7번기)에서 네번 다 졌고, 랭킹4위 기전인 십단전(도전5번기)에서만 두 번 이긴 바 있습니다. 조훈현에겐 좀 강했고, 조치훈에겐 열세를 보였는데 일종의 기풍 차이 같은 게 작용했을까요?

 

3번기 결과는 2-0으로 후지쯔배 우승자가 이겼다.


호오~ 그런가요? 하하...조치훈은 꽤 장고파고 독특한 기풍으로 대국 때 기세가 당당하고, 기합이 대단해 눌린 면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치훈하고 나는 바둑이 아주 다르지만 내가 없는 면이 많아 존경하고 있습니다. 조훈현에게는 어쩌다 이긴 것입니다.”

 

- 기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 텐데요, 아무래도 우승했을 때일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렇군요. 무엇이었을까. 역시 세계선수권인 것 같네요. 후지쓰배 우승 당시 모두 기뻐했으니 역시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저것 다 좋았긴 하지만.

 

바둑은 고대의 신들이 즐기던 게임, 인간에게 준 선물

바둑을 두면 인간의 마음이 대단히 아름답게 되는 게 매력

 

여기까지 인터뷰가 꽤 길게 이어졌다. 슬슬 마무리를 해야할 시간. 그런데 이 대목에서 다케미야 9단이 할말을 자청했다. 여러 기회가, 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얘길 모처럼 한국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이니만큼 이번에도 꼭 하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여러 곳에서, 바둑은 신이 보낸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NHK 방송해설 등에서도 하는데...바둑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온 것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 상식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바둑은 적어도 몇 만년 전, 몇 십만년 전 지구상에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고대문명이 지금보다는 더 발달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문명 때부터 바둑이 본격적으로 발달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거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둑은 고대의 신들이 즐기는 게임이지 않았을까. 몇 만년 전, 몇 십만년 전인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이어진 바둑이 지금까지 두어지는 게 기적적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고대 발달한 문명 가운데 하나, 고대의 신들이 즐기는 게임이 바둑이다는 말씀, 참 인상적이군요. 이렇게 오랜 세월 존속해 왔다는 게 기적이라면 생명력을 이어올 만한 매력이 있었을 것인데,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바둑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지요?

 

바둑의 가장 큰 매력은, 신들이 즐기는 게임이어서일까. 바둑을 두는 사람만 알겠지만, 바둑을 두면 인간의 마음이 대단히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승패가 있어 승부를 만끽하는 재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바둑의 가장 좋은 점은 마음을 닦을 수 있고, 정화된다는 거지요. 또 바둑을 두면 처음 만난 사람도 곧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 게 세계평화에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신이 하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바둑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최고의 게임입니다.”


기자가 [월간바둑] 재직 때 일본기자에게 선물받아 보관해 온 다케미야 9단의 음반 테이프. 앨범 타이틀이 '백로와 까마귀의 러브게임'...그러니까 까마귀()와 백로(), 즉 오로(烏鷺)는 바둑을 달리 칭하는 말이니까 '바둑 러브송' 같은 것이려나. 이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다케미야 9단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승부사입니다. 승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있을지...가령 질 수 없다는 오기, 상대를 제압하는 기백, 평정심을 유지하는 자세랄까 뭐 이런 다짐 같은 게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바둑은 무한한 가능성, 수들이 있기 때문에 나로서도 그 어떤 다짐을 다졌다한들 어떤 바둑이 될지, 흘러갈지 전혀 상상이 안 됩니다. 물론 두면 이기고 싶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진짜는 자신의 기분대로, 의지대로 둔다면 그것이 행복한 것이고 이상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대목에선가 꼭 이기고 싶다든가 안전하게 이기고 싶다든가 하는, 욕망의 감정이 나오는 순간이 있고 흐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가 자신의 바둑을 두는 게 중요합니다. 어쩌면 그런 싸움...자기자신과의 싸움이 바둑이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일본기원 창립 90주년 기념식에서 다케미야 9단은 댄스 특별공연을 펼쳤다. 무대에서 댄스 공연팀을 소개하고 있는 다케미야 9.


- 그렇다면 이것이 내 바둑이었다생각한, 그런 바둑이 있었을까요?

 

역시 조치훈을 상대해서 둔 7번기 중 몇 국 있는 것 같습니다. 패한 바둑도 있겠지만, 패한 바둑은 여러 가지 실수가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긴 대국일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요즘은 어떻게 소일하시는지? 바둑 외에도 다재다능하신 걸로 유명합니다. 예전 음반도 취입한 걸로 아는데...그 중 테이프 하나를 아직도 제가 보관하고 있답니다. 어떤 여자분과 함께 불렀던 것인데...요즘은 댄스를 즐긴다고 들었습니다.

 

◀흥겨운 춤사위가 느껴지시는가? 다케미야 9단의 댄스 실력은 프로급이라고 한다.

 

"앗, 그런가요? (호탕하게 웃음) 듀엣으로 노래 부른 건 예전의 일인데...지금은 춤추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매일 하고 있습니다. 바쁘실 텐데, 일부러 멀리 오셔서 이런 애기들을 할 수 있게 해줘서 오히려 고맙습니다. (이 대목에서 느닷없이 어설픈 한국말로 한국팬에게 인사를 한다. 역시 멋진 마무리, 볼수록 유쾌하고 멋있는 기사다.) 안뇽~하세요~감싸~합니다!"


이것이 우주류!

 

다케미야 9단은 조치훈을 상대하면서 원없이 자기의 우주류를 펼쳐 보았다 생각한 바둑 중, 바로 이 판이라고 꼭 집어주진 않았지만, “패한 바둑은 여러 가지 실수가 있기 때문에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긴 대국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해서, 기자가 나름 한 판 골라 보았다. 1985, 서울에서 도전1국을 내준 뒤 일본으로 돌아와 보름 뒤 나고야에서 재개한 9기 기성전 도전7번기 2국이다.

 

<장면2>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바둑은, 굳이 대국자 이름을 찾아볼 것도 없이 흑이 다케미야 9단임을 알겠다.

 

로는 흑의 대세력을 예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고개를 치켜들 때조치훈 기성은 역시 실리의 화신답게 마이 웨이를 고집했다. 국후 어디에 두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지만 애초 이것이 조치훈 바둑의 본령. 어쨌거나 흑1, 이 한수로 우주류가 확연해졌다. 256분을 장고했지만 기실 다음 중앙 삭감수를 고심한 시간이었을 터. 다시 59분이나 숙고하다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한 거냐” “안되겠다. 시간이 없다며 결행한 수가 백4였다.

 

여기서 도전자는 1시간이나 장고하고 다음수를 봉수(封手)했다. 어디였을까?

다음날 오전9, 입회인의 시간이 됐으므로 시작해 주십시오라는 소리와 동시에 양 대국자가 첫날의 수순을 한수 한수 바둑판에 놓은 뒤 봉투를 열어 봉수점을 확인했더니, 다음수는 예상치 못했던 흑A 붙임수였다(어딘가 알파고 냄새가 난다).

 

흑은 B로 집차지를 했어도 좋았을 법한데 과연 다케미야였다. “세력을 집으로 만드는 데 급급하지 않고 백4를 역습하겠다는 노림을 내포한, 자유자재한 기풍이 엿보인다. 백의 허점을 찌른 것인지도 모르겠다(하네 야스마사 9)”는 평을 들었다. 결국 이 바둑은 흑이 백대마를 잡고 109수 만에 단명국으로 끝났다. [참조/9기 위기명인기성전(법문사 발행)]

 

또 하나의 기록, 5시간 7분의 장고(長考)


<장면3> 3 한수에...

 

<장면3> 1에 두고 백2로 받자 이 다음수(3)에 다케미야 9단은 물경 5시간 7분이나 생각했다. A에 둘 것이냐 흑3을 택할 것이냐, 단 한수를 결정하는데 제한시간 8시간 중 5시간 7분을 썼다면 곧장 이해하시겠는가.

 

19886, 43기 혼인보(本因坊)전 도전5국에서 도전자 오타케 9단을 맞아 둔 바둑이다. 이 한수의 갈림길로 승부가 좌우되진 않았겠지만, 다케미야 9단은 이 바둑을 불계로 이기고, 결국 종합전적 4-3으로 혼인보 타이틀을 방어하며 4연패를 이뤘다. (다음 기에서 조치훈 9단에게 타이틀을 빼앗긴다.)

 

이것은 일본이 3대 기전(기성, 명인, 혼인보)에서 제한시간 8시간의 이틀바둑을 도입한 이후 아마도 최장의 장고기록일 것이다. 국후 다케미야는 "저는 정석을 잘 모르고요, 게다가 수읽기하는 게 즐거워져서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속기대회에서도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그 세계가 단연 넓고 깊었다. 그의 우주에 자칫 휩쓸리게 되면 다들 블랙홀에 빠지는 운석과도 같았다. 19924TV바둑아시아선수권전 결승에서 다케미야 9단이 한국의 조훈현 9단을 꺾고 대회 4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장고(長考), 하면 우리는 조치훈 9단을 먼저 떠올리지만 다케미야 9단도 이렇듯 단 한수에 몇 시간이고 들였다. 그러면서도 속기에도 천부적인 감각을 발휘했다. TV바둑아시아선수권전에서 4년 연속 우승한 게 그 증거다. 장고면 장고, 속기면 속기, 세계대회에서 양쪽 대회 우승타이틀을 한꺼번에, 동시에 죄다 움켜쥔 기사는 다케미야 9단이 유일했다. 진정한 원년챔프였다.


[기획/특집] 정용진 2017-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