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문정희 시 - 남편, 부부, 오빠

풍월 사선암 2016. 10. 26. 07:27


문정희 시 - 남편, 부부, 오빠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부부 / 문정희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다




*오빠 / 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려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주지 않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졸업 진명여고 재학시 시집 <꽃숨> 발간.

1969<월간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나옴.

 

1976년 제 21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시극 <납의 탄생>, <날개를 가진 아내>,

산문집 <젊은 고뇌와 사랑> <청춘의 미학> <사랑의 그물을 던지리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