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명상글

피천득 ‘은전 한 닢’

풍월 사선암 2016. 8. 9. 07:58

피천득 ‘은전 한 닢’


내가 상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좋소.”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 보는 것이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줍디까?”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다양[大洋]’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생긴 은전인가?


작중에서 등장하는 다양(大洋)은 광둥어로 은원(銀圓)의 속칭인데, 이 당시 중화민국의 화폐였다. 이 은원은 무게 26.7g, 품위 880, 순은 함유 23.49g이다. 1933년 발행된 쑨원의 초상이 새겨진 은원은 위와 같은 형태였다. 다양 가운데는 위안스카이가 새겨진 것도 있다. 다만 당시 중화민국의 경제가 혼란스러워서 화폐도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은전이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나?

 

1935년 국민정부가 도입한 고정환율제에서는 다양 한 닢은 영국 파운드화 1실링 2.5펜스와 같은 가치를 가진다. 당시의 1실링은 현재의 2.76파운드와 같은 가치를 가진다. 그러므로 다양 1닢을 현재 원화로 환산하면 약 5,000~10,000원 정도. 내부에 포함된 귀금속 은의 가치로 따지면 20141월 현재 은 1그래뇰(3.75그램)2,500원 정도이므로 15,000원 정도가 될 것이다.

 

대략적으로 생각하면 작중에서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은전 한 닢의 가치는 세종대왕님 한 분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물론 빈부격차, 물가 등을 고려하면 체감 수치는 더 높을 것이다.


피천득(皮千得)


는 금아(琴兒)이다. 19105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上海)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8·15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46 ~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서 영시(英詩) 강의 시작, 195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학생과장을 역임했다. 2007525일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