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도 떨게했을 이휘소박사 천재성
[특별기획] 이휘소 박사 천재성 비결과 죽음의 진실, 제1편
◀이휘소 박사는 물리학자이면서도 타고난 수학천재였다. 그것이 이휘소 천재성의 한 중요한 기초였다. 우리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인 것 같다. © 자주민보
◐위키백과 ‘표준모형’ 설명에 이휘소박사 이름이 없다니!
우연한 기회에 뿌리 출판사에 나온 책 ‘핵물리학자 이휘소’(공석하 저)를 읽고 충격을 받아 일주일 동안 관련 자료에 빠져 살았다.
결과 내린 결론은 이휘소 박사의 삶과 죽음은 미국에 종속된 한국 지식인들 모순의 총체라는 것이었다.
이휘소 박사의 삶을 탐구하면서 내내 머리에 떠올랐던 두 과학자가 있었으니 한 명은 아인쉬타인 박사이고 다른 한 명은 황우석 박사였다.
비단 이휘소 박사 개인으로 끝날 비극이 아니며 이 모순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제2, 제3 이휘소의 비극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몇 편의 글을 통해 이휘소 박사에 대해 살펴볼까한다.
제1편에서는 이휘소 박사가 6-70년대 이론물리학계에서 어떤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지 그 핵심을 짚어보고 2편에서는 후대 과학자들을 위해 이휘소 박사가 그런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3편에서는 그 죽음의 진실을 다룰 계획이다.
사실 지금 한국에 살아있는 유족들과 미국의 자녀들이 강력하게 반발해온 내용의 글을 쓴다는 것이 그 유족들 가슴의 아픈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은 아닌지 고심을 거듭했다.
하지만 강대국 권력에 의해 우리 국민이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단 1%만 있어도 우리는 그 실체를 파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권의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결정적인 민족의 영웅에 대한 문제라면 차후 다시는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특히 올 4월 30일과 5월 1일, 총 2편 kbs 기획특집 ‘이휘소의 진실’ 다큐를 보니 물론 소중한 내용도 많이 담겨 있긴 하지만 어머님의 증언 등도 다 무시한 채, 철저히 미국에서 제공한 단 몇 가지 자료만 가지고 단순사고사로 확정보도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더불어 이 방송 내용 중 이휘소 박사의 딸 이안 씨의 ‘핵개발보다는 아버지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 업적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그 염원의 말에 글을 발표할 용기를 많이 얻었다.
그 이안 씨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시까지 미국 역사에서 이휘소 박사만큼 뛰어난 과학자는 없었으며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한국으로 기어이 돌아가려는 애국심 깊은 이휘소 박사를 그들은 살려둘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 증거가 너무도 많은데 어떻게 같은 피를 이어받은 한민족의 후배가 이 사실을 알고서 침묵할 수가 있겠냐고...
특히 위키백과 사전을 검색해 보면 양자역학 연구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 성과인 ‘표준모형’을 정립하는데 사실상 이휘소 박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이휘소 박사 이름은 사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키백과의 나름의 원칙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휘소박사가 지도하고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은 줄줄이 나와 있는데 정작 이휘소 박사는...
우리 민족과 나라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휘소 박사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받게 하고, 후손 만대 공정하게 기록되도록 하는 일을 어느 나라에서 해주겠는가. 결국 우리의 몫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라사랑 방법 상에 있어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휘소 박사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측면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휘소 박사의 영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연구해 봐도 이휘소 박사는 미제국주의 지배세력들에 의해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단순히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도와주려했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추정 때문만은 아니다. 핵개발을 막는 방법으로 꼭 이휘소 박사를 죽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더 확실한 대통령을 직접 제압하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이휘소 박사가 한국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보다 근본적인 살해 이유는 이휘소 박사가 기이어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으로 본다는 것이다.
미 지배세력들은 자신들 중에 누구도 이휘소박사만큼 뛰어난 과학자가 없는 조건에서, 이휘소 박사가 앞으로 어떤 연구결과를 어떻게 만들어 낼 지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조건에서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자유롭게 놓아줄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적, 정치경제적 동북아시아 패권전략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미국이 절대로 놔줄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한반도의 남단 교두보인 한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휘소 박사의 능력은 미국이 그렇게 두려워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조국애가 너무 강한 이휘소 박사는 하루라도 빨리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금은보화도 쾌락도 아예 관심이 없었다. 오직 조국으로 돌아가 한국을 하루빨리 과학강국으로 군사강국으로 일으켜 세울 생각뿐이었다.
추정이기는 하지만 이휘소 박사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도한 핵개발 의욕과 조급증도 한몫했다고 추정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은 이휘소 박사를 결코 살려서 한국으로 돌려보내면 안 될 존재라 최종 판단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영채가 빛나면서도 인자한 성품 어려있는 이휘소 박사 모습
◐세계 과학자들이 극찬한 이휘소 박사
"내밑에 아인쉬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쉬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
-전 미국 프린스턴연구소장 오펜하이머-
"이휘소에게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
-양진녕( 1957년 노벨상 수상자) -
" 그와 같이 6개월간 생활하면서 나는 도리어 이휘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겔만 (1969년 노벨상 수상자) -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1분간 그를 생각하는 묵념의 시간을 갖기를 제안한다." -살람(1979년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
"내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벤자민 리의 공이었다. "
- 스티븐 와인버그 (197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새로운 이론적 요소, 실험결과들... 벤자민 리는 그 중심에 있었다."
- 헤라르뒤스 토프투 (199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이휘소 박사는 세계 물리학계의 슈퍼스타였다. 한국 사람 중에서 그런 사람은 물리, 화학, 생물을 다 합쳐서 앞으로 몇 십년간, 몇 백년간 안 나올 것이다."
- 김진의 (서울대 교수)
"1977년 6월에 있었던 그의 비극적인 사망은 전 세계 과학계에 타격을 입혔다."
- 슈럭 (스토니브룩 대학 물리학과 교수)
이휘소는 우리나라 출생 물리학자 중 가장 뛰어났고 노벨물리학상 수상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과학자였다. 그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시켰으며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와인버그, 살람(1979년), 토프트, 벨트만(1999년), 그로쓰, 윌첵, 폴리터(2004년) 등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했다. 1974년 그는 참 쿼크의 존재와 관련해 'search for charm'이라는 획기적 논문을 발표하여 참 쿼크가 존재할 경우 이들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입자들의 성질을 규명했고 그해 11월 제이/프사이 입자를 발견한 리히터와 팅이 1976년 노벨상을 받게 했다.-국립 과천과학관
이휘소 박사에 대한 찬사는 이외에도 끝이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나온 양자역학 연구 성과 중에 가장 뛰어난 결과물이며 다른 연구의 기본이 되는 ‘표준모형’ 이론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과학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이렇게 이휘소 박사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휘소 박사의 연구논문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도와 조언이 없었다면 위의 과학자들도 ‘표준모형’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 이휘소, 얼굴도 미남이다. © 자주민보
◐ 이휘소 박사가 있어 가능했던 ‘표준모형’
양자역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구한 사람이라면 ‘표준모형’ 이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익히 알 것이다.
양자역학은 원자를 이루고 있는 중성자, 양성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더 작은 소립자의 생성과 소멸 원리를 알아내고 그것들의 힘을 수학적으로 계산 통제하려는 학문인데 문제는 너무 작은 미시세계여서 측정과 연구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소립자들의 융합과 분열 과정에 나오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핵폭탄과 원자력발전도 결국 이 힘을 이용한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방사능폐기물의 독성을 안정화시키지 못하고 있듯이 이 미시세계를 사람들이 완전히 조절통제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수학적으로 정확한 계산과 통제가 관건인데 많은 부분 해명이 되지 않고 있다.
양자역학은 바로 이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고 ‘표준모형’은 지금까지 나온 이론 중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수학적으로 정식화한 이론이다. 아직 이것을 뛰어넘는 이론이 없다. 초끈이론이 있지만 아직 수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이 아니다.
그 ‘표준모형’ 이론을 정립했던 살람, 토프트, 와인버그 등이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아 자신들의 연구에 있어 착상에서부터 연구 방향, 결정적으로 풀지 못한 수학적 증명을 이휘소 박사를 통해 해결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토프투 박사의 경우엔 연구 착상과 방향에서 도움뿐만 아니라 자신이 연구한 성과를 다른 과학자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해 주목을 끌지 못할 때 그 성과의 가치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응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논문을 이휘소 박사가 발표해주어 결국 자신의 연구 성과가 빛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중국 노벨상 수상자 양진영 박사가 이휘소 박사에 대해 왜 60년대 이미 노벨상을 받아야 될 사람이었다고 했는지 어머니에게 쓴 이휘소 박사의 편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간 편지 못한 것은 새로 착수한 “핵자와 k중간자의 상호작용의 리론” 문제에 휘말려 시간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서였습니다. 널리 양해하여 수십시오. 전번학술잡지에 제출한 논물 “파이 중간자의 피파 산란의 공명”은 응급의 출판을 요한다는 것이 인정되어 속보로 6월 1일호 “physical review letters”에 게재된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기는 아직도 멀었으니 “안심”하십시오...60. 3. 24]-책 ‘이휘소’-공석하 편저, 뿌리출판사
20대 중반 나이에 이휘소 박사는 이렇게 늘 당시 세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들이 풀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문제 즉, ‘응급을 요하는 주제’를 다룬 논문을 발표했고 발표하는 족족 세계 과학자들의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론물리학자들은 이 20대의 이휘소 박사의 논문을 침대 곁에까지 두고 탐독했다는 일화까지 나올 정도이니 이휘소 박사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토프트도 이휘소 박사의 논문에서 노벨상 수상 연구를 착상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아래 첨부자료 참조)
[미국 이름이 benjamin w. lee로 알려진 그는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 전개되는 이론 선두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아간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였다. 이휘소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정립과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는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60여편 만으로도 10000회가 넘게 인용되었다.]-국립 과천과학관
지금도 이휘소 박사의 논문은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특이 ‘게이지 양자장론에서의 재규격화’ 논문이 바로 표준모형을 지금처럼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벤자민 리는 "게이지 이론에 대한 재규격화 (renormalization of gauge theory)을 증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와인버그나 살람이 말한 것을 증명해 주는데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증명이 있었기 때문에 실험자들은 그 이론을 중대시했으며, 또한 이러한 증명이 예측한 대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페르미연구소 윌손 소장의 이휘소 박사 추모사 중에서, 책 ‘이휘소’,(뿌리출판사, 공저하 편저) 재인용
그리고 표준모형 이론 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완성’에는 위의 윌손 페르미연구소 소장이 지적하고 있듯 이휘소 박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표준모형은 양자역학만이 아닌 우주의 생성원리를 탐구하는데도 기본이 되는 한 이론이다. 이휘소 박사도 결국 우주의 원리까지 자신의 연구를 확대할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휘소 박사와 함께 수학 식을 칠판에 잔뜩 써놓고 토론하고 있는 청년시절 와인버그 박사, 그는 이휘소 박사와의 공동연구가 그렇게 즐거웠고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이휘소 박사의 수학적 도움은 그에게 결정적이었다. © 자주민보, kbs '이휘소의 진실' 화면촬영
◐ 이휘소 박사의 무서운 수학실력
표준모형 이론 정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현존하는 세계 4대 물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스티븐 와인버그 교수는 지난 4월 30일 방영된 kbs 2010년 과학의 달 특별기획 '이휘소의 진실' 1편 인터뷰에서 ‘전기력과 약력의 통합이 처음에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힘의 상호작용에 대한 제가 발표한 이론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희소 박사가 그 가능성을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결국 수학적 해명에 성공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와인버그 교수가 이휘소 박사가 칠판에 수학공식을 써 놓고 토론하는 사진은 꽤 유명하다. 와인버그 교수가 이휘소 박사로부터 수학적 도움을 받았다면 사실 와이버그 교수 연구의 핵심성과는 이휘소 박사의 것이라는 말과 같다.
특히 이론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식으로 정식화되지 못하고 증명되지 못한다면 하나의 가설이나 화려한 몽유도원도일 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휘소 박사는 이론물리학자이기 때문에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말도 안 된다. 아인쉬타인, 페르미, 오펜하이머 모두 이론물리학자였지만 그들이 핵개발을 총지휘했고 기술의 핵심을 제공했다.
이론물리학은 상상력으로 그림이나 그리는 학문이 아니다. 엄밀한 수학적 계산으로 뒷받침되는 예측과 추리는 이후 실험으로 정확하게 검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지금처럼 가속기가 발전하지 못했던 60-70년대 수학으로 무장한 이론물리학은 양자역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속기가 건설되어 실험이 가능해진 조건에서도 이론물리학자들이 방향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실험과학자들은 도대체 무슨 실험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렵다.
수학이 있기 때문에 뛰어난 이론물리학자들이 실험물리학자들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70년대 이휘소 박사가 그 젊은 나이에 세계 최대 가속기 ‘테바트론’이 있던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역임했던 것이다. 이론물리부장은 쉽게 말해서 실험과학자들이 무슨 실험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지휘하는 사람이다.
결국 70년대 세계 양자역학과 원자력연구를 총 지휘한 과학자가 이휘소 박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론과학자건 실험과학자건 이휘소 박사가 이론부장을 할 때 가장 신명나게 연구할 수 있었고 가장 뛰어난 연구성과들이 쏟아져나왔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이휘소박사는 바로 다른 이론물리학자들에 비해 수학실력이 비교자체가 안 될 정도로 탁월했다. (물론 수학만으로 지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능력 부분은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사실 80년대 ‘표준모형’이 정립되었지만 주요한 연구는 이 때 많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초끈이론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초끈이론은 수학적으로 실험으로 증명된 것이 것의 없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이론물리학이 ‘미학’으로 전락했다고 조소하기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끈 이론에 매달린 과학자 치고 무슨 이렇다할 성과를 내놓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도교수의 권유로 초끈이론에 매달렸다가 논문 한 편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청춘의 황금기를 다 날렸다고 한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수학적 검증이 어려운 연구 결과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미국의 초끈이론 과학자들도 방송에 나와 화려한 언변으로 쑈나 하고 있었다. 웹에서 ‘초끈이론’ 검색하면 유명하다고 뜨는 동영상을 보고 사실 한탄이 절로 나왔다. 수학적으로 전혀 검증도 되지 않은 이론을 일반인들까지를 상대로 한 방송에 나와 저렇게 쑈를 하며 떠들 필요가 있는가, 그저 예측과 설일 뿐 특별한 내용도 없었다. 저 정도 단계라면 조용히 겸손하게 더 연구를 해야하지 않을까...
초끈이론이 아예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직 설에 불과한 이론을 왜 그렇게 떠들고 왜 그쪽으로만 사람들을 몰아가는가이다. 자신들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넘어갔으면서 상대를 진창으로 빠뜨리려는 것은 아닌지 저의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초끈이론의 탐구영역은 이휘소박사가 탐구한 영역보다 더 미시세계이기에 더 어려울 수가 있다. 하지만 과학은 수학적 검증을 단계 단계 밟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
이휘소 박사가 있었다면 현재 양자역학이 이렇게 미학과 쑈로 전락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당시까지 물리학자 중에서 가장 수학을 잘한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었고 실제 그의 수학실력의 도움을 받아 세계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을 한치 한치 점령해 갔었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도 e=mc제곱 이라는 수학적인 식으로 정식화되었기에 과학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인류가 이를 이용하여 원자력발전소도 세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인쉬타인 박사도 추상적이었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 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뛰어난 수학자를 찾아가 3년여 시간을 투자하여 수학을 다시 배웠었다. 그도 학창시절 남들보다 월등했던 과목이 수학이었음에도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수학 때문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는 수학 때문에 연구가 어려웠다고 토론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네덜란드 출신 snopper 수학박사가 ‘현대대수학’ 수업을 진행했는데 너무 어려워 다른 학생들이 모두 중도하차하는 바람에 1:1로 이휘소 박사를 지도했었다. 그는 그 때 당시 제자에게 지지 않기 위해 밤을 세워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정도면 이휘소 박사는 이미 그를 능가하는 수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휘소 박사는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수학이라도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렵 언젠가 필자가 이휘소 박사에게 재규격화 방법을 언제 터득했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69년도 파리대학교에 안식년을 택해 가 있는 동안 수학기교에 능한 buressur-yvette의 과학고등연구소에 있는 불란서 수리물리학자들과 접촉을 한 탓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휘소 박사는 까다롭고 지루하도록 긴 계산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수학적인 기교를 터득한 물리학자였고 추상적이면서도 기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론이 실험현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잘 포착하는 특기를 소유한 학자였다.].-1977년 7월 11일 페르미랩에서, 강경식, (재미 한국과학기술자회보 제6권 1호 1977. 7)
이렇듯 이휘소 박사는 아무리 당시 가장 어려운 수학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그 진수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던 것이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도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하게는 타고난 능력 때문이라고 본다. 서구과학문명의 발전은 이집트 나일강에서부터 시작된 수학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유전자 속에도 이런 뛰어난 수학적 유전자가 있는 것이다.
미 제국의 지배세력들은 이휘소 박사의 이 능력을 어쩌면 제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인쉬타인 박사는 상대성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동료 수학자를 찾아가 3년여 동안이나 개인지도를 받았다. 오펜하이머가 아인쉬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난 학자였다고 평가한 것도 바로 이점을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 물리학 김제완 교수는 74년 박사가 한국에 왔을 때 “내가 거의 2주일에 걸쳐 계산한 결과를 이 박사는 흑판에서 단 5분 만에 계산했다”면서 거의 이휘소 박사의 수학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표준모형’도 이휘소 박사의 연구를 거의 뛰어넘지 못한 채 일부 소립자와 중력까지의 통합은 지금도 미제로 남겨놓고 있다. 표준모형의 모든 미완의 문제는 수학적으로 해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휘소 박사 죽음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충격을 금치 못했으며 이후 자신들의 새로운 연구를 거의 진척시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휘소 박사와 연구할 때는 다들 펄펄 날더니 이후엔 정말 이렇다할 성과가 없는 과학자들이 태반이다. 이휘소박사의 수학적 도움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 당시 이휘소 박사와 함께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그 도움을 받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워했다.
◀74년 도미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 금의환향한 이휘소 박사, 오른쪽이 어머니이다. 이 방문은 서울대 교육차관 심사차 왔던 것, 그런데 이휘소 박사는 꿈에도 그리던 집이 아니라 용산미군기지에 숙소를 정했다. 안전상, 비밀보호상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한 미군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 자주민보
◐ 이휘소 박사는 분명히 미군사비밀 연구 진행했을 것
특히 이휘소 박사가 연구한 부분은 중성자 양성자를 이루는 쿼크에 대한 연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군사무기 관점에서 핵무기 소형화와 방사능 오염문제를 막을 방법을 찾는데 있어 반드시 넘어야할 분야이다.
60-70년대는 미소의 냉전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 서로 더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 내는데 사력을 다할 때였다는 말이다.
미국은 핵무기 소형화를 발전시켜 지금은 핵무기를 포탄급으로까지 만들 수 있다. 이를 총알급으로 줄이면서도 동일한 파괴력을 내게 한다면 그 기술을 가진 나라를 당할 수가 없음은 자명하다.
특히 점령지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방사능 오염문제도 막아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나온 핵탄이 바로 중성자탄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첫 중성자탄이 군 무기고에 입고된 해가 1974년이라고 했다. 이휘소 박사가 양자역학 이론물리학자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였다.(일단은 이정도만... 3편‘죽음의 진실’에서 이에 대해서는 더 깊이 다룰 예정)
또 하나 핵분열이 아닌 핵융합을 수학적으로 어떻게 제어하느냐도 이휘소 박사의 중요한 연구분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핵융합발전을 쉽게 제어할 수 있는 환경에서 가능하다면 전기 생산에 있어 혁명은 물론이고 이는 군사무기 혁신에 있어 일대 사변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상온 핵융합이 가능하다면 아이언맨도 가능하고 소형 원자로를 탑재한 특수비행체와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는 잠수함 등 이전 무기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무기를 마구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상온에서의 핵융합과 같은 첨단기술도 결국 소립자의 분열에 의한 것이다. 당연히 이휘소 박사의 연구영역 안에 있다는 말이다.
북에서는 이미 이 상온핵융합반응과 관련 기계장치를 설계 제작하는데 성공했다고 올 5월에 북한 언론을 통해 공식 발표한 상황이다.
북에도 뛰어난 양자역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남이나 북이나 같은 핏줄이기에 북이라고 못하란 법은 없다고 본다. 이휘소 박사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 한국에서도 그것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휘소 박사는 미국 군사관계자들의 특별부탁으로 그에 대한 비밀 연구를 분명히 진행했을 것이다.
공석하 씨의 책에는 아직까지 철저히 비밀에 쌓여있는 이휘소 박사의 군사무기관련 양자역학 연구논문이 다수 존재한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사실 미소냉전 시대 중에서 가장 핵무기 경쟁이 심해던 당시 미국의 지배세력들이 페르미연구소 이론부장인 이휘소 박사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휘소 박사가 74년 9월 aid차관 타당성 평가를 위해 미국 국무부 평가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렀을 때 숙소를 용산미군기지로 정한 것도, 한국의 학자들이 그 유명한 미아리 맥주집으로 가자고 졸랐을 때 기어이 가지 않은 것도, 심지어 한국에 오면서 어머니에서 사전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것도 불필요한 외부 접촉을 일절 하지 않는다는 미국과의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휘소 박사는 어머님에 대해 사랑을 넘어 존경과 경외감까지 표했을 정도로 효자였다. 그런 그가 도미 후 첫 고국방문에서 먼저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 이유 외에 납득할 수 없다.
이휘소 박사는 이미 미국의 운명과 관련된 과학비밀에 깊이 관계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런 이휘소 박사의 요구 때문에 한국에 20년 거치 1% 이자라면 사실상 거져 주는 것과 같은 조건으로 막대한 교육차관도 지원했을 것이다. 그것도 이휘소 박사가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조사하고 투자 방향을 정하는 대로 제공하기로 전적으로 밀어주었을 것이다. 이휘소 박사의 기여에 대한 일종의 물질적 보상이 아니고서는 이휘소 박사에게 이렇게 그 막대한 자금의 사용 전권을 맡길 리가 없다고 본다.
노벨상을 충분히 수상할 업적을 쌓았음에도 수여하지 않은 것도 그런 유명세를 타게 될 경우 미국 지배세력들이 이휘소 박사를 통제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제1편을 마치며...
이휘소 박사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런 저런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오직 하나 요구했던 것이 한국 과학발전 지원이었던 것이다.
그 덕에 서울대 물리학과 기풍이 완전히 쇄신되어 75-76학번 이전 박사와 이후 박사가 구식과 신식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평가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이미 이휘소 박사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휘소 박사가 가져온 그 차관으로 우리 과학 발전의 토대가 쌓여 인재들이 배출되어 나오고 경제도 키울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위키백과 양자역학 관련 내용 설명에 이휘소 박사의 이름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음에도 어느 정부, 어느 과학자 어느 국민도 항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차마 부끄러워 이휘소 박사 사진을 바로 대할 수가 없다.
특히 이휘소 박사의 죽음의 진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열쇄를 쥐고 있는 어머니의 증언에 대해서는 공영방송에서마저 완전히 무시하면서 단순 교통사고라고 너무 쉽게 주장하고 있으니 과연 이것이 이휘소 박사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의 후대들이 맞는지 한 없이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제1편 끝- 2편에서는 이휘소 박사가 천재가 될 수 있었던 비결, 3편에서는 ‘죽음의 진실’을 파헤칠 것이다.)
아래 편지는 이휘소 박사의 지도를 받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토프트 교수의 회고의 편지이다. 이 편지만 봐도 이휘소 박사가 얼마나 뛰어난 과학자인지, 후배과학자의 능력을 어떻게 최대한 발양시켜주었는지, 얼마나 사심없고 공정한 과학자였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휘소 그는 당대 세계 물리학계의 명실상부한 지휘자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민족이 낳은 세계적 영웅인 것이다.
<참고자료>
이휘소 교수와의 인연에 관하여
---1999년 노벨상 수상자 토프투 교수의 편지
당연히 나는 물리학자로서 이휘소 박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휘소 박사 부부와 여러 차례 같이 어울린 적이 많이 있었다. 특히, 시카고에서 이휘소 박사 부부와 자주 들렀던 화려한 중국식당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휘소 박사는 나의 인생의 전환점에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원생일 때, 그의 여러 논문들을 공부하였으며, 이들 논문은 나에게 과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 나의 박사학위 논문지도 교수인 벨트만 박사는 지중해에 위치한 프랑스령 코르시카 섬 (corsica)에 있는 카쥐스(cargese)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최된 하계입자물리학교에 참가하도록 추천하여 주었다. 원래, 벨트만 교수는, 더 유명한 하계학교인 프랑스령 알프스에 위치한 레쥬쉬(les houches) 하계학교에 갈 것을 추천하였지만, 나는 최종심사에서 낙방하여, 할 수 없이 '카쥐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카쥐스' 하계학교는 3주 동안 개최되었으며, 이곳에서 나는 입자물리학 분야의 권위있는 세계적 학자들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카쥐스' 하계학교의 주관자는 프랑스의 입자이론물리학자인 레비(maurice levy) 교수였다. 레비 교수는 이미, 칼텍의 저명한 입자이론물리학자인 겔만(murray gell-mann) 교수와 함께, 강한 상호결합작용을 주고받는 소립자들의 동역학에 관한 모형이론인 소위 겔만-레비 모형(gell-mann levy linear sigma model)을 주창하여 주목을 받고 있었다.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이 모형이론은 핵자들 사이의 강한상호작용을 정확히 기술하지 못하는, 미완의 이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하듯이 이 모형이론의 이론적 구조는 엄청나게 중요하며, 지금까지도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자세하게 이 모형이론의 수학적 체계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만큼 심오한 모형이론이다. 사실 나는 '카쥐스'에 오기 전에, 이 모형이론을 자세하게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이미 이 모형이론의 양자동역학에 관하여 엄청나게 깊이 연구한 이휘소 박사를 만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고 하겠다.
'레비' 교수가 초빙한 강연자 중 한사람이 바로 이휘소 박사였다. 이휘소 박사는 부인,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린 두 자녀들을 데리고 왔었다. 하계학교 중 나는 그들과 함께, 코르시카 섬 내지 깊숙이 같이 등산을 한 생생한 기억이 있다. 한참 등산한 후,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작은 호수에 도달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한 가족의 젊은 아빠로서 그때 그의 행복한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는,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직 '카쥐스' 하계학교에 참가하였던, 학생 그리고 강연자들이 전부여서 아주 조용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학문의 선배인 이휘소 박사를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물론, 이휘소 박사의 강연이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는 중요하였으며, 나의 향후 연구 방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부분이었다. 이휘소 박사와 또 다른 독일의 수리물리학자인 시만직(kurt symanzik) 박사가 모두 겔만-레비의 모형이론에 관한 양자현상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나는 '카쥐스' 하계학교에서 이들 두 선배학자의 강연을 가장 흥미롭게 들었다. 사실, '카쥐스' 하계학교에 오기 전, 지도교수인 '벨트만' 교수는 겔만-레비 모형이론에 관하여 전혀 다른 수학적 접근방법을 내게 심어주었으며, 이 모형이론의 중요성을 그다지 강조하지도 않았었다.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의 강연을 경청한 후, 나는 이들의 접근방법이 보다 적절하며, 특히, 당시 내가 풀고자 시도하고 있었던 소위 양-밀 게이지 장이론(yang-mills gauge theory)에 아주 유사한 방법으로 적용해 볼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강연 후, 나는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 각각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겔만-레비 모형이론에 대한 양자현상 접근방법을 양-밀 게이지 장이론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두 대가의 대답은 똑같았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당신의 지도교수인 벨트만 박사가 양-밀이론에 관한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그와 상의하여 자문을 구하도록 하세요!".
'카쥐스' 하계학교를 다녀온 후, 나는 벨트만 교수에게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의 강연에 대하여 설명하고, 또 양-밀 게이지 장이론에 적용하려는 나의 착안도 피력하였다. 그러나, 벨트만 교수는 그다지 신통하지 않다고 느끼는 듯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심층적인 토론과 수많은 계산을 해 나갔다. 당시, 벨트만 교수는 까다롭고 지리한 계산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수행할 수 있는 '스쿤쉽'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는 1970년도이었으며, 손으로 계산하기에는 벅찬 까다로운 계산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수행한다는 발상은 가히 영웅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벨트만 교수는 우리가 같이 설정한 모형이론이 제대로 계산이 되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계산상,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많은 모형이론들의 양자현상 보정효과 계산이 수렴하지 않고 발산하는 적분꼴로 표현된다는 난점이었다. 나는, '카쥐스' 하계학교에서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로부터 배워 응용한 방법이, 벨트만 교수가 제안한 방법보다 더 우수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오랜 설득 끝에 나는 드디어 지도교수인 벨트만 교수가 고집을 꺾고, 내가 제안한 계산방법을 그의 컴퓨터 프로그램에 적용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며칠 후, 벨트만 교수는 계산한 결과를 보여주며 "거의 비슷한 답이 나왔네!"라고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답은 몇가지 맞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했다 -- 서로 상쇄되어 없어지리라 예상한 몇몇 항들이 2배 만큼 차이가 있었다. "내가 보여드린 식을 얼마나 정확히 컴퓨터에 옮겨 적었나요?" 자세히 조사해보니, 벨트만 교수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바꿀 때 숫자 2를 몇 군데에서 빠뜨린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모든 계산들이 예상한 결과대로 나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벨트만 교수가 수년 동안 매달려온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결국 1999년에 이르러서 벨트만 교수와 내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 결정적 내용이었다. 벨트만 교수는 이 분야, 즉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론의 개척자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한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 분석하였다. 다만, 마지막 결정적인 부분이 내가 중요하게 기여한 부분이며, 이는 모두 이휘소 박사의 업적으로부터 얻은 영감의 결과이다.
1970년 12월경에 암스테르담에서 대규모 입자물리학 국제학회가 개최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내가 소속한 유트레히트 대학교에서 아주 가까우며, 벨트만 교수는 이 학회의 주관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양자장이론을 다루는 분과발표회의에서 벨트만 교수는 여러 유명한 학자들에게 그들이 그 동안 양-밀 게이지 장이론에 대하여 계산한 결과를 발표를 하도록 먼저 순서를 마련하였다. 이 유명한 학자들의 발표내용을 들으며, 벨트만 교수와 나는 그들 방법론이, 내가 발표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하여 얼마나 쓸데없는 틀린 내용인가를 서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여 당시 나는 전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대학원생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유명한 학자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단지 10분의 발표 및 질의시간 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10분이란 시간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휘소 교수 역시 이 국제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발표한 내용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휘소 박사는 그 당시 진행하고 있던 연구과제들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벨트만 교수가 개발한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 소위 재규격화 방법론의 규명에 본인의 모든 심혈을 기울이기로 결정하였던 것 같다. 명석한 이휘소 박사로서는 우리가 발견한 방법론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도리어 우리의 방법론을 보다 조직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하는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전혀 무명의 대학원생이었던 나로서는, 이휘소 박사와 같이 저명한 학자가 우리의 결과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휘소 박사는 학계를 돌아다니며, 벨트만 교수와 내가 발견한 방법론만이 올바른 방법론임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명의 대학원생이 계산한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휘소 교수는 명성에 걸맞게 아주 정직한 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이 분야에서 보탠 업적이 정직하고 공정하게 평가되도록 항상 노력하였다. 그는, 전혀 반대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많은 미국의 물리학자들과는 달리, 그 자신에 합당한 학문적 기여도 이상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휘소 박사와 오랜 친구인 벨트만 교수는, 그 이후 학회에서마다 그의 불같은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이휘소 박사에게, 이 박사의 논문들이 자신의 업적에 새로운 것을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에 관한한 아무런 공로도 인정할 수 없다고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휘소 박사는 내게 개인적으로 다가와, 벨트만 교수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휘소 박사가 모두 옳았다. 그가 우리의 계산 이후, 이 문제에 관하여 발표한 논문들은 모두 상당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었으며, 그에 관한 업적은 충분히 인정받아야만 하였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에이버스라는 젊은 연구원과 함께,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에 관한 긴 비평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비평논문은 이후 엄청나게 많이 인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많은 학자들이 이휘소 박사가 개발한 방법이 벨트만 교수와 내가 원래 개발하였던 파인만 도형을 이용한 증명방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평하게 이야기하자면 이휘소 박사의 논문들은 우리의 것들과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휘소 박사의 논문들로 인하여 국제학계에서 많은 동료학자들이 우리가 개발하였던 방법론이야말로 제대로 완성된 방법임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70년대 초 수년간 이휘소 박사는 양-밀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방법에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되돌아 보건대, 이 때가 가장 즐겁고 흥분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러 가지 이론적인 착안들이 고안되었고 이들 중 논리적으로 보다 타당한 내용들이 살아남았다. 이론적 착안 뿐 아니라 실험적으로도 여러 가지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양-밀 게이지 이론을 바탕으로 구성된 전자기-약력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실험과 이론이 서로 건설적인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중성전류에 의한 실험 결과가 있는가?", "매혹입자 (charmed particles)가 포함된 중핵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가속기에서 새로 발견된 입자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등등, 수많은 이론과 실험의 문제들에서 이휘소 박사는 항상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모든 국제학회에서 이들을 발표하여 전 학계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학자였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는 소식은 정말로 슬픈 뉴스였다...(이하 생략)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0/12/31 [07:01] 최종편집: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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