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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1988 바둑! 응답하라 1988 바둑!

풍월 사선암 2016. 1. 15. 22:27

어게인 1988 바둑! 응답하라 1988 바둑!

 

2016년 한국바둑의 최택을 고대하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극중 최택 6단으로 나오는 박보검(왼쪽)과 실제모델 이창호 9. 린하이펑 9단과 둔 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 최종국 장면을 합성한 사진이다.

 

케이블방송 드라마로는 보기 드물게 시청률 20%대를 기록하며 국민적 관심을 끈 tvN<응답하라 1988>115~1619~20화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구생 이무기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생>에 이어 <응팔> 또한 프로기사가 극중인물로 나오고, 배우 박보검이 연기하는 최택 6단이 이창호 9단을 실제모델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바둑팬은 물론이고 바둑을 잘 모르는 젊은층에게까지 바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연일 화제가 되었다.

 

<응팔> 종영에 즈음해, 그렇다면 한국바둑 1988년 그때 상황은 어떠하였는지 한번 되돌아보았다. 한국바둑계에 1988년은 어떤 해였던가. 이 칼럼은 마침 [시사저널]의 청탁을 받고 쓴 어게인 1988 바둑! 응답하라 1988 바둑!” 전문에 지면사정으로 마저 올리지 못한 원문을 덧붙여 실은 글임을 밝힌다.

 
○● [시사저널] 원문보기 ☜ 클릭

 

먼저, 이세돌-커제 전에 대한 소고(小考)

 

연말연시를 후끈 달군 제2회 몽백합배 결승, 이세돌(李世乭) 9: 커제(柯洁) 9단의 5번기는 오랜만에 보는 반상(盤上) 세기의 대결이었다.

 

지난 30여년 동안 중국과 한국의 바둑전쟁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중국은 13억 인구에서 즐비한 천재기사가 출현했지만 한국의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진 불세출의 바둑영웅에 번번이 짓눌려 왔다. 1980년대 조훈현 9단이 대륙의 반달곰이라는 녜웨이핑 9단을 제1회 응씨배에서 꺾으면서 중국바둑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기더니 1990년대에는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가 등장해 무적시대를 구가했다. 이창호 9단의 무공이 어찌나 눈부셨는지 그들은 이창호를 석불(石佛, 돌부처)’이라 부르며 신처럼 경배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름만으로도 공한증(恐韓症)’에 휩싸이게 하던 이창호가 퇴조의 기미를 보이자 중국은 올커니 때가 왔다며 기치를 드높이고 전면전에 나섰다. 그런데 이번엔 듣도 보도 못한비금도라는 섬에서 올라온 이세돌이 떡허니 버티고 서서 백만대군을 돌려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30여년을 호시탐탐,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려 오기만했던 중국이었다. 바둑의 발상지가 중국이라며 종주국을 부르짖어온 그들로선 퍽이나 자존심 상한 노릇이었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이세돌 9단의 10년 호령 세월이 끝나고 뚜렷한 강자 없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그렇지만 이세돌 이후 내가 일인자다할만한 절대강자가 출현하지 않았으므로 딱히 이세돌시대가 종식되었다 선언할 수도 없었다. 실제 이세돌 9단을 완전히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 신예도 없었다. 이때 지난해 혜성처럼 홀연히 등장한 중국기사가 19세 커제 9단이다.

 

연말연시 세계바둑 일인자 자리를 두고 이세돌 9단과 커제 9단이 펼친 신구대결은 근래 보기 드문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다. 오랜만에 관전자들도 손에 땀을 쥐고 본 치열한 승부였다. 승자와 패자를 가른 것도 마지막 순간, 딱 반집으로 났다. 이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가 있을까.

 

커제의 승리는 중국바둑의 ‘27년 한풀이

 

예전과 달리 요즘 바둑세계는 국경이 무의미한 무한경쟁시대다. 승부세계의 공방 또한 어찌나 치열한지 이세돌이라는 패권자가 슬슬 힘이 빠지기 시작한 2010년 이후 5년간 세계대회 타이틀을 여러 개 거머쥔 다관왕이 등장하지 못했다. 서로 물고 물리는 각축전 양상을 보이다가 이번에 56개월 만에 커제가 3관왕(삼성화재배백령배몽백합배)에 올랐다. 중국이 울분을 삭히며 학수고대하던 대관식이 이번 몽백합배 결승전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이세돌 9단이었다.

 

바둑사의 일인자 계보가 바뀌는 세기의 대결답게 일진일퇴를 벌인 명승부였다. 명승부에 명국 없다지만, 신구 강자가 정면대결을 펼친 바둑판은 메이웨더-파퀴야오 같이 맥빠진 복싱판과는 확연히 달랐다. 22 스코어에서 최종판의 결과는 반집.

 

반집은 무승부를 없애기 위해 도입한, 바둑승부에서만 볼 수 있는 가상의 수치로서 프로기사들은 한집을 지면 땅을 보고(변명의 여지 없는 내 실력의 결과지만) 반집을 지면 하늘을 본다(운이다)’고 하는, 그 반집 차이로 승부가 갈린 것도 소름돋게 한다. 이창호가 바로 이 숱한 반집 승부로 스승 조훈현 왕국을 무너뜨렸으며, 중국이 호기롭게 내세운 기사들이 번번이 이창호에게 눈물을 흘린 것도 딱 이 반집에 가로막혀서였는데,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커제가 이세돌을 꺾고 세계 일인자로 올라선 결정판 또한 반집 승부였다.

 

승부세계의 흐름이란 이런 것이다.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 장강의 앞물결과 거칠 것 없이 밀어닥치는 뒷물결을 가르는 차이는 반집,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같음. 이세돌은 실력이 아니라 젊음에 진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승부세계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을 따름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극중 최택 6단의 대국모습과 이창호 9단의 실제 대국모습.

 

<응팔>이 환기시킨 한국바둑의 위상

1988년은 한국바둑의 분기점이었다

 

이세돌-커제가 최종전(결승5)을 벌이던 15일 내내 네이버와 다음에서 이세돌은 검색어 1위였다. 프로기사가 포털사이트에 검색어 1위로 떠오른 건 매우 드문 일이다. 1980년 조치훈 9단이 일본 명인을 제패했을 때, 1989년 조훈현 9단이 응씨배를 우승하며 초대 바둑황제로 등극했을 때, 이창호 9단이 2005년 제6회 농심신라면배에서 기적 같은 5연승 신화를 썼을 때 못지 않은 국민적 관심이 쏠렸다. 워낙 큰승부이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바둑계에서 봤을 때의 얘기이지, 요즘 바둑에 별 흥미가 없는 젊은 세대까지 이처럼 관심을 보인 건 아무래도 <미생>에 이은 <응답하라 1988> 드라마의 영향인 듯하다.

 

<응답하라 1988>의 극중인물 최택 6(박보검 분)은 이창호 9단을 실제모델로 한 캐릭터여서 바둑팬은 물론이고 바둑을 잘 모르는 젊은층에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전주 중앙시장통에 자리한 이시계방의 아들이 이창호인데 이러한 설정에서부터 최택 6단이 바둑에서 보이는 활약상과 어눌한 말투며 행동까지 이창호 9단의 행적과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적절히 버무린 팩션(Faction) 드라마인 만큼 사실과 다른 것도 많다.

 

우선 이창호 9단은 1975년 생이니 1988년에는 13세의 중학생에 불과하고(드라마에서는 고등학생), 198611세에 프로입단을 해 3년 만인 1989년 여름 제8KBS바둑왕전(방송 속기전)을 우승하며 첫 타이틀을 따는 놀라운 행보를 보이긴 했어도 1988년에는 무관이었다. ‘응팔에서 보이는 활약상은 1990년 이후의 얘기다.

 

그렇지만 1988년 시점에 타이틀만 아직 획득하지 못했을 뿐 이미 이창호는 그 해에 최고의 활약을 보인 기사에게 주는 바둑대상 MVP를 수상했다. 7510패의 성적을 거둬 승률(88.2%), 다승(75), 최다대국(85), 연승(25연승) 4개 부문 1위를 기록했고, 3단에 지나지 않은 햇병아리란 사실이 무색하게 6개 기전 본선에 올랐거니와 최고위전과 패왕전 2개 기전에서는 도전권을 따내 한국바둑계에 불어닥칠 쓰나미를 예고했다.

 

어찌 우리 이날을 잊을 수 있으랴. 한국바둑사를 딱 두 도막으로 대별하라면,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응팔>에서의 1988년은 이창호시대가 이미 펼쳐지고 있지만 실제 이때는 조훈현 9단의 시대였다. 이창호는 이 해 크게 기지개를 켰고 1989년부터 타이틀 접수에 나서기 시작해 1990년대 그의 시대를 열었다.

 

한국바둑, 1988년과 오늘

 

이왕 말 나온 김에 1988년 무렵의 국내바둑계 현황은 어떠했을까 돌이켜보자. 세계바둑사에서 이전과 이후로 구분지을 만한 획기적인 해가 1988년이기 때문이다.

 

프로바둑 세계대회가 탄생한 원년이 1988년이다. 이 해 4월 일본이 매년마다 개최하는 후지쯔배를 선보였고, 4개월 뒤 대만의 거부 잉창치 회장이 우승상금 40만 달러를 건 응씨배를 출범시켰다. 이 전까지는 바둑강국인 한국, 일본, 중국이 국경의 방책을 높이 세운 채 간혹 교류전이나 치를 뿐이었다. 이때까지 일본바둑은 세계바둑의 메이저리그로 행세했고 실제로도 바둑의 수법과 문화에서 가장 앞선 선진국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모방하는 단계였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의 기자로 입사한 해도 1988)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바둑은 지금에 비하면 하꼬방수준이었다. 혹간 치르는 교류전마저도 일본은 중국에만 공을 들일 뿐 한국은 상대조차 잘 해주지 않았다.

 

70~80년대 한국바둑의 일인자는 조훈현 9단이었다. 그냥 가장 잘 두는 일인자가 아니라 모든 타이틀을 동시에 전부 거머쥐는 전관왕을 80(9관왕), 82(10관왕), 86(11관왕) 세 차례나 달성했을 만큼 독보적인 일인자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당시 일본은 한국바둑을 중국보다 뒤떨어지는 변방국으로 취급했고 조훈현은 여기에서 일등 먹는 골목대장일 따름이었다.

 

대신 한국민에게 큰 위안을 준 존재는 80년대 일본 3대 타이틀인 명인, 본인방, 기성전을 차례로 움켜쥐며 열도를 호령한 조치훈 9단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바둑붐이 크게 인 적이 세 번 있는데 그 첫 번째 바람이 조치훈이 명인에 올랐던 1980년이고, 두 번째가 1989년 조훈현이 응씨배를 우승했을 때, 세 번째가 90년대 이창호의 등장에 따른 관심증폭이었다. 지금 최정상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이세돌세대 이후의 기사는 모두 이창호키드들이다.

 

1988년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의 수는 95(여자 2)이었고 이 중 9단은 5명 불과했다. 2015310(남자 255, 여자 55), 9단만 71명에 이르는 수에 견주면 격세지감이다.

 

1988년 당시의 기전 수는 신예기전을 포함해 13개였으며(조훈현 8, 서봉수 3, 유창혁이 1관이었고 이창호는 이때까지 무관), 13개 기전의 우승상금을 다 합해도 13,00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왕위전 우승상금이 가장 많은 1,600만원이었다.

 

88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한해 전(87) 랭킹1위 조훈현 9단이 벌어들인 연간 상금 총액이 9,950만원이었으니 그의 독주가 어떠했는가 실감하게 된다.

 

27년이 지난 2015년 한국이 개최하고 있는 기전 수는 세계대회 5(단체전까지)를 포함해 25개이며 기전총 예산규모는 80억원에 달한다. 우승상금 총액은 20억원.

 

해결해야할 과제...풍요 속의 빈곤, 빈익빈 부익부 추세

 

외형만 놓고 보면 엄청난 확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기전의 우승상금이나 전체 예산규모가 커진 것은 세계대회가 늘어난 결과이지 제한기전이나 이벤트기전을 빼면 국내기사들이 모두 참가하는 국내기전의 수는 6개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후원사들이 홍보효과에 연연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바둑계도 빈익빈 부익부, 풍요 속의 빈곤 현상이 도드라지고 있는 것이다.

 

랭킹1위가 한해 벌어들인 총상금 액수만 놓고 봐도 바둑의 위상과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7년 조훈현 9단이 획득한 상금 총액이 1억원에 육박했는데(이듬해에는 1억원을 돌파했을 것으로 짐작) 27년이 지난 2015년 랭킹1위 박정환 9단의 총상금 수입이 81,300만원, 2위 김지석 9단은 5억을 조금 넘겼다.

 

얼핏 보기엔 많이 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1984년 프로야구 최고투수인 최동원 선수가 받은 연봉이 4,700만원(이것도 보너스를 합한 특급대우)이었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씨름판의 이만기 선수가 4,600만원을 받은 걸 헤아리면 80년대 바둑계의 정상급 기사의 수입은 스포츠스타보다 윗길이었다. 1993년에야 선동열 선수가 1억 연봉을 받을 때 이창호 9단은 90년대 내내 수억 원을 가볍게 넘기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억억 소리나는 프로스포츠 선수의 연봉과 프로기사의 상금수입을 비교하는 자체가 난센스가 돼버렸다.

 

199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바둑은 20여년 동안 세계바둑대회를 휩쓸다시피 했다. 이 시기 중국과 일본은 감히 최강국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사진은 제3회 진로배 시상식(1995, 3연패, 사진위)1993년 세계 4대기전(응씨배, 후지쯔배, 진로배, 동양증권배) 제패 축하연 장면.

 

응씨배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는 한국바둑

1988년은 그 기점의 해...“응답하라 1988!”

 

1988년은 우리나라가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해이다. ‘응답하라드라마가 굳이 1988년을 지목한 것도 뭔가 역사의 분기점이 될만한 해라고 보아서였을 터이다. 마찬가지의 관점으로 1988년은 바둑계에도 새로운 기운이 감돈 획기적인 해였다.

 

이 해 가을, 당시 22세 방위병인 유창혁 3단이 신예기사로는 처음으로 대왕전에서 조훈현을 3:1로 무너뜨리는 파란을 일으켰고, 13세의 이창호가 최고위전과 패왕전에서 스승 조훈현에게 도전하는 기가 막힌(?) 사건을 일으켰다. 세계바둑사에 유례를 찾을 길 없는 사제도전기 첫판이 1988년 크리스마스 이브(1224)에 부산 광안리 시사이드호텔에서 펼쳐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바야흐로 15년 철옹성을 구축했던 조훈현 왕국이 흔들리는 조짐이 일었고, 그 해 바둑계를 총정리하는 바둑연감은 신예들이 일으킨 반란의 해로 기록했다.

 

세계바둑대회가 첫 선을 보인 1988년은 그간 중국바둑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오던 한국바둑이 단숨에 세계정상으로 올라설 발판을 잡은, 기회의 해이기도 하다. 천하의 명검도 칼집에 갇혀서야 진가를 발휘할 길 없다. 뽑아야 명검이다. 한국바둑 처지에서 세계바둑대회는 물 본 기러기요 꽃 본 나비마냥 활개를 펼 마당이었다.

 

884월 세계 최초로 열린 후지쯔배에서 조훈현은 1회전 탈락의 쓴맛을 보았으나 8월부터 시작한 응씨배에서는 한국바둑의 자존심과 명운을 걸고 투혼의 승부를 펼쳐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듬해 5, 1:2로 뒤진 벼랑 끝 상황에서 특유의 강신무(降神舞)를 추며 중국이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철의 수문장녜웨이핑 9단을 3:2로 뒤집고 우승했다. 혈혈단신, 악전고투 속에 일군 기적 같은 드라마였다.

 

1989년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을 신호탄으로, 한국바둑은 마치 오랫동안 물을 기다려 왔던 고기처럼 세계무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조훈현을 선봉으로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로 이어지는 태극 라인업이 93~94년 이 기간에 열린 1회 진로배를 시작으로 응씨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등 8연속 세계대회 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세계바둑을 천하통일했다.

 

한국바둑의 기세는 2000년대 들어서도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20008월 조훈현 9단이 후지쯔배(대 창하오)를 다시 석권한 때부터 20037월 이세돌 9단이 후지쯔배(대 송태곤)를 우승하기까지 3년 간 세계대회 20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후지쯔배는 바둑 메이저리그를 자처하던 일본이 주최하는 대회인데, 9811회 대회부터 200720회 대회까지 10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기사끼리 벌인 형제 결승전만도 8번이나 연출했다.

 

한국바둑사를 크게 구분한다면 조훈현 9단의 응씨배 우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고 바로 그 분기점이 1988년이다. 그렇지만 이세돌 이후 한국바둑은 근래 중국바둑에 밀리고 있어 안타깝다. 한국바둑도 요즘 그 어느때보다 어게인 1988! 응답하라 1988!’을 외치는 중이다.

 

[칼럼] 정용진 201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