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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를 읽는 틀 ‘계파’

풍월 사선암 2015. 2. 15. 23:55

편가르고찍어내고무너져도 좋을 불통의 벽

 

한국정치를 읽는 틀 계파

 

한국 정치는 본질적으로 계파정치라는 주장에 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 정치를 읽는 가장 유력한 틀이 바로 계파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왼쪽)19879월 김대중 고문과 나란히 앉아 확대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이후 두 사람은 각각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라는 야권의 양대 계보를 이끌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70년대 이래 오랜 세월 야권을 양분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를 언급하지 않고 민주화 과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후 한국 정치에 지각변동을 가져온 3당 합당 및 민주자유당의 창당(19901) 역시 정권 창출을 위한 계파정치가 만들어 낸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당권을 장악한 최대 계파인 친노(친노무현)계가 야권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인 2002년 이후다.

 

현 여권은 1997년 대선 이래 유력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주류 세력이 재편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2002년 대선까지는 친이회창계, 2007년 대선 이후에는 친이(이명박)계가 주류가 됐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영원할 것 같았던 친박(친박근혜)계의 파워는 어느새 쇠락하는 양상이다. 지난해 국회의장 선거, 당 대표 선거에 이어 올해 원내대표 선거까지 3연패(連敗)를 하면서 새누리당 주도권은 어느덧 비박(비박근혜) 차지가 된 느낌이다.

 

차라리 새누리당 의원들과 말하는 게 낫겠다

 

지난해 6월경 그전까지 새정치연합 고위 당직을 맡았던 한 의원이 사석에서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보고 불통이라고 하는데 정말 불통은 이 당 의원들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서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말이 안 통해.”

 

이 의원이 분통을 터뜨린 대상은 당내 계파였다.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각 계파의 집단적 반발에 뜻을 이루지 못하거나 처리가 지체된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 같았다. 새정치연합 의원들도 차라리 새누리당 의원들하고는 말이 돼도 ○○계 의원들과는 얘기가 안 된다는 얘기를 곧잘 한다. 계파 간 불화가 화해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는 방증이다.

 

8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문재인 의원이 당일 기자회견에서 계파의 자도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역설적으로 계파 갈등의 심각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문 대표는 줄곧 친노의 실체는 없다고 했다. 문 대표 측근들도 문 대표가 2012년 대선 이후 단 한 번도 이른바 계파 의원들에게 어떠한 오더(명령)도 내린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보스가 조직원에게 지시를 내려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집단을 계파라고 한다면 친노는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전당대회 수개월 전부터 문 대표의 측근 의원이라 불리는 의원 10여 명이 이리저리 모여서 당 대표 경선을 준비해 왔고, 이번 인선도 이들 중 핵심 의원이 관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문 대표의 당직 인사를 바라보는 비노(비노무현) 진영 의원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이처럼 계파는 여당보다 야당에서 더 뿌리 깊고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야당 정치를 이해하려면 계파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1970, 80년대 야당 정치를 양분했던 양김(兩金)YS의 상도동계, DJ의 동교동계라는 계파로 대표됐다.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은 이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갈등은 19903당 합당 전까지 야권의 최대 갈등 요인이었다.

 

권위주의 정권의 엄혹했던 정치 상황은 명망가 유력 정치인에게 돈과 사람이 모이도록 했다. 국고로 정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가 지나서다. 이 때문에 호남과 부산·경남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두 전 대통령은 정치자금과 공천권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계파를 유지했다.

 

친노의 탄생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내정자, 고건 총리 후보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왼쪽부터)20031월 서울 세종로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에서 나란히 섰다. 친노(친노무현)는 전성기를 맞았고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른바 친노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당시의 친노는 계파적 패권을 드러냈다기보다는 강경함과 싸가지 없음으로 더 각인됐다.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안희정 현 충남도지사가 친노는 폐족(廢族)’이라고 밝히면서 친노는 정치 무대 밖으로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서거한 뒤 친노의 응집력이 커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2011년 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이 대표로 있던 민주당과 친노·시민사회 중심의 혁신과 통합이 통합하면서 야당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현재 새정치연합의 비노 의원들이 주장하는 친노의 폐해는 20124월 총선 공천의 실패, 그해 6월 전당대회에서의 이해찬-박지원 역할분담론(이른바 담합)’, 그리고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비노 의원들을 소외시킨 것 등이 주를 이룬다.

 

새정치연합에서 친노의 수는 대략 ‘20-40-60’의 법칙을 따른다고 본다. 문 대표와 끝까지 같이 갈 의원이 20, 그렇지는 않지만 문 대표와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까지 범위를 넓히면 40, 더 넓은 의미에서 문 대표 행보를 지지하는 의원까지 포함하면 60명이라는 것이다. 당내 최대 계파임에는 틀림없다.

 

같은 듯 다른 여권의 계파정치

 

여권에서 나타나는 계파정치의 양상은 야권의 그것과 같은 듯 다른 모양이다. 정치적 계파라고 하면 보스를 중심으로 한 종적인 서열구도 외에 횡적인 연대가 동시에 있어야 하지만 여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한나라당은 1997, 2002년 대선 후보였고 대통령 당선이 유력해 보였던 이회창 총재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두 번의 실패로 장악력을 상실한 자리를 두고는 자연스럽게 이명박(MB) 의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박근혜 의원을 지지하는 세력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벌였던 친이계와 친박계의 권력투쟁은 여권의 정당정치 사상 가장 치열했던 건곤일척의 승부라고 부를 만했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를 선정하기 위해 치러졌던 당내 경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당시 선거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 혹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힐러리 클린턴)의 탄생을 예고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던 선거였다.

   

박 대통령 친박이란 말 언제 떼어 낼지

 

친박이란 용어가 처음 나온 건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대통령이 2002년 대선 당시 불법 대선자금 모금사건으로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쓴 데 이어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안 가결의 후폭풍으로 침몰 직전 상태까지 간 한나라당의 대표에 오른 시기다.

 

20043월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의원은 처음으로 한나라당 대표가 된다. 지체 없이 천막당사로 간 박 대표는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기회를 한 번 더 달라며 읍소해 4월 총선에서 121석을 건졌다. 자연스럽게 친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진영-유승민 비서실장, 김무성 사무총장 등 박근혜 대표가 임명한 당직자들이 중심이 됐다.

 

이후 20066월까지 23개월의 재임기간에 박 대표 체제에서 당직을 맡았던 주요 인사들이 이른바 원조 친박이다. 사무총장을 지냈던 김무성 허태열, 비서실장 출신인 유승민 유정복을 비롯해 최경환 서병수 김재원 이혜훈 등이 핵심 중의 핵심을 이뤘다.

 

박 대통령 집권 이후 새누리당의 권력지도는 지속적으로 변화했고 현재는 비박계 지도부와 친박계가 당의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은 112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1219일 대선 승리 2주기를 맞아 청와대에서 친박계 중진 의원들과 비공개 만찬을 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벌어졌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금도 친박이라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 이걸 언제 떼어 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것.

 

친이계의 뒤안길

 

그동안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걸어온 길을 반추(反芻)해 보면 박 대통령이 궁금해하는 답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한다. 지금 현재 어느 누구도 이회창계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현재 친이계가 유명무실하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4월 총선을 앞둔 20081월 한나라당 내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이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친이(친이명박)계가 일방적인 공천을 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새누리당 대표가 된 김무성 대표(오른쪽)는 비박(비박근혜) 진영을 이끌고 있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끝나기도 전인 20124월 총선을 앞두고 친이계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2008년 총선 당시 친이계가 단행한 친박에 대한 공천학살이 그대로 되풀이된 격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결국 친이계는 구심점을 잃은 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당내에는 변변한 친이계 계파 모임도 없다고 한다. 18대 국회 당시 당일 전화를 돌려도 4050여 명의 현역 의원이 모이던 것과 달리 이제는 결속력이 없어졌다는 것. 매년 1219일 이 전 대통령의 생일 때 모이는 정도다. MB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가 성공으로 끝난 만큼 이제는 발전적 해체를 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5년 단임제라는 우리의 권력구조 속성상 친박 역시 박 대통령의 임기가 마무리될 경우 친이계와 비슷한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

 

계파정치 극복은 가능할까?

 

계파 없는 정치가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많은 정치인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정치하는 사람의 로망은 대통령이라며 대권 도전 의사를 감추지 않는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지난달 지역에서 가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우호세력을 결집해 천천히 대권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2011년 한나라당 당 대표에서 조기 하차할 당시 계파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말도 했다.

 

안철수 현상을 일으키며 정가에 들어온 안철수 전 새정치연합 공동대표가 민주당과 통합한 뒤 다른 계파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진 것도 자신의 계파를 등에 업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분석이다.

 

8일 막을 내린 새정치연합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대표가 승리한 것을 친노의 승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고, 2일 치러진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 역시 친박 대 비박 프레임으로 설명하는 것이 편리하다.

 

정치권에서는 결국 계파란 필요악 아니냐는 평가를 한다. 정치란 것이 결국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인데 그 결사체 격인 계파를 없앨 수 있겠느냐는 것.

 

하지만 앞으로는 전통적인 의미의 계파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이제는 친박, 비박 등의 전통적인 계파정치의 틀로는 현실 설명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증세론 대 복지개혁론, 개헌론 대 반()개헌론 같은 정책노선의 차이에 따른 정치세력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민의 눈높이에서도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학연, 지연과 같은 원초적인인연을 넘어서 정책지향성과 같은 좀 더 세련된 뜻의 결사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연적으로 세력 간의 다툼일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면 계파의 힘은 결국 궁극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알파요 오메가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정치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존재가 계파라면 계파행동의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 정치발전의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201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