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이 되길 꿈꾸어왔다
김영란 전 대법관, 독(讀)한 습관 강연
1978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2004〜10년 대한민국 첫 여성 대법관, 2011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시절,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는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입법. 총리 인선 때마다 후보로 거론되는 김영란(58)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이야기다. 언론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그가 대중강연을 하러 나왔다. 2014년 11월 20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독(讀)한 습관(독서습관)’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해 약 2시간 동안 강연하고 청중의 질문에 답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능력의 소유자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은 김영란 교수. 청소년 시절 문인을 꿈꿨던 그는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한 후 판사의 길을 걸었다. 법관으로 일할 때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나는 다른 사람이 되길 꿈꾸어왔다”면서 “직장(법원)에서는 판결에 필요한 자료를 읽었고, 집에 와서는 직업과 무관한 문학, 철학책들을 읽었다”고 했다. 김 교수의 강연과 질의응답 내용을 정리했다.
내 영혼을 흔든 책
독서습관과 관련한 강의는 처음이다. 책은 내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여행을 떠날 때도 ‘무슨 옷을 입고 갈까’보다 ‘무슨 책을 들고 갈까’를 먼저 생각한다. 책은 내게 중독에 가깝다. 남편(강지원 변호사)이 가끔 “당신은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꼭 목적이 있어야 책을 읽는 거냐”고 되물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그 답을 스스로 찾고 싶었다. 내게 책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빠져들었던 것처럼 앨리스의 토끼굴과 같은 의미였다. 내 영혼을 뒤흔든 책은 사춘기 시절에 읽은 소설 《토니오 크뢰거》(토마스 만)였다. 이 소설은 한 예술가의 성장소설이다. 독일 출신의 근엄한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어머니를 둔 토니오 크뢰거가 예술가로 성장하면서 겪는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보여준다. 한쪽 세계는 자신의 삶과 가치가 일치하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속한 곳이고, 다른 쪽은 100% 자기 인생을 살 수 없는 분열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속한 곳이다. 두 세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묘사를 읽으면서 나는 후자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토니오는 자기 분열적인 고민에 빠져 있는 사춘기 소년으로 자신의 삶과 가치가 일치하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분열적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자아를 지키고 싶어 한다. 당시 나는 나의 정체성을 토니오 크뢰거에 투사했던 것 같다. 토니오처럼 사람들의 세계를 떨어져서 관찰하고 세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에 대해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여겼다.
지적 욕구와 열등감
나는 1남 4녀 가운데 셋째로 자랐다.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춘기 때는 나를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무엇에 대한 열등감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어쩌면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지적 호기심이 강했다. 학교 공부를 공부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교과서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지고 싶은 데 못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을 숨기기 위해서 미리 포기해버리고, 욕망도 숨겼다고 분석할 수 있다. 나이 들면서 그런 게 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삶과 내 생각과 나의 세상이 일치하지 않는 분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춘기와 대학시절을 보냈다. 분열적인 사고를 했기 때문에 법률가가 되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였던 같다. 많은 사람이 내게 “(법관이라는 직업을) 싫어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출세할 수 있었니? 얄밉다”고 말한다.
판사는 어떤 사람인가
판사는 창의적인 직업이 아니다. 판사는 창의적이면 실패한다. 그러나 대법관은 해석의 기준을 만드는 자리다. 입법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는 자리다.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으므로 비교적 창의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무슨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늘 고민한다. 대법관을 그만둔 뒤 강의 요청이 많았다. ‘판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법률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관련 책을 읽었다. 마사 누스바움 시카고대 로스쿨 철학교수가 쓴 《시적 정의》라는 책을 보면 판사의 판결 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누스바움은 판사의 역할을 “소설을 읽는 독자”에 비유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 사건을 겪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소설 속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는 존재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저러면 안 되는데…’ 이런 감정으로 주인공의 행동을 판단한다. 법률은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는 것 같지만, 법률 속에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이 있다. 같은 절도죄라고 해도 범죄 동기는 개별적으로 다르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절도 방법이 다르다. 판사는 개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개별성과 보편성을 잘 포괄하는 사람이 훌륭한 판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책 읽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직업과 전혀 무관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들이 내가 세상을 바라본 시각과 내가 내린 판결들에 다 녹아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법률가로 사는 삶’과 ‘책을 읽는 사람으로 사는 삶’이 일치하는 느낌을 받았다. 책읽기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뺄셈의 삶’
강의가 끝난 뒤 많은 질문이 김 교수에게 쏟아졌다. 질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주변에서 착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 그 상황을 자기 스타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고, 어느 순간이 되면 자기 인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다. 삶을 자기 방식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계산해서 이익을 얻는 게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한 부분은 과감히 접고 다른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청년세대가 겪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10%가 뛰어내리면 기차가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대법관 퇴임 후 거액 연봉을 받는 로펌으로 가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대학교수로 진로를 정했을 때 화제가 되었다. 요즘 그는 “내 안에 있는 욕심을 덜어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동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독후감 교실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소망’을 들은 청중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Topclass 2015년 01월호 / 글 : 임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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