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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이석우, 아버지가 진 빚 갚을 수 있을까

풍월 사선암 2014. 10. 19. 18:56

카톡 이석우, 아버지가 진 빚 갚을 수 있을까

 

이석우 다음카카오 공동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검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서울중앙지검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출석해 감청영장 집행과 사생활 보호 등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다.

 

아버지 이수정 전 장관, 저 유명한 ‘4·19 선언문집필

자유의 종 타수에서 군부독재 권력자로 전향

아들 이석우 대표, 한국 IT업계 대표 기업 일궈

외교관 아버지 음덕 이어 민주주의 토양에서 성공

SNS의 가치는 자유부전자전되지 말아야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 시위에 뿌릴 유인물을 몇 번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 학생들을 격동시킬 멋진 문장이 필요한데,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었다. 참조할 자료를 찾아 도서관을 뒤지다가 우연찮게 ‘4·19 선언문을 발견했다. 눈에 확 들어왔다. 사반세기란 시간적 격차가 나는데도 시대가 암울한 건 매한가지라 어투만 좀 바꾸면 그대로 써도 될 듯했다. 그래 몇 군데 슬쩍 베꼈다. 유인물 제목은 학우여!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로 정했는데, 그 또한 4·19 선언문에 들어있는 문구였다. 명백한 표절이었지만, 유인물 자체가 불법이니 누가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보수단체의 창립선언문 제목이 ‘21세기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인 걸 보고 피식 웃은 적이 있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학 시절 유인물 쓰며 베꼈던 이수정의 글

 

이수정 전 문화부 장관. 출처=대통령기록관

 

누구나 베끼고 싶은 글을 쓴 사람은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이었다. 나중에 보니 선언문 가운데 캄캄한 밤중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는 임화의 시에서 빌려온 거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명성이 깎이지는 않는다. 이수정은 서울대 독서 모임 후진국 문제 연구회를 이끌며 3월 말부터 4·19를 계획한 핵심이다. 하숙방에서 쓴 원고를 들고 정치학과실에 가서 커다란 전지에 붓으로 선언문을 써서 벽보에 붙였다. 그러곤 각 단과대학을 돌며 학생들을 모았고, 삽시간에 천여명이 모여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6년 뒤 이수정은 아들을 낳는데, 그 아이가 다음카카오 공동대표 이석우다. 이석우도 아버지만큼이나 유명해졌다. ‘감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밝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가 16일 국정감사가 열린 서울고검에 나타나자 수십대의 카메라에서 촤르르르하는 셔터소리가 울려퍼졌다. 길게 이어지니 마치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국정감사가 끝나자 기자들이 달라붙었고,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기자들이 화장실 문앞에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이석우는 이수정의 표현대로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처럼 보였다. 감청영장에 불응하겠다는 그의 선언이 위기모면용이라는 일부의 비판도 있지만 최소한 국정감사장에서 본 그는 다부졌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공무집행방해니 반체제니 하면서 을러댔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에게 들어보니 이석우는 종종 큰 인물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석우는 국정감사장에 들어서며 청년 이수정의 강단과 기개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자유 억압하는 정권에서 출세의 길 걸어

 

하지만 이수정은 나중에 출세의 길을 추구하게 된다. <한국일보> 기자를 하다가 70년대 초 해외공보관이라는 걸 하면서 나라의 녹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원로 언론인 남재희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이 해외공보관 제도를 처음 만들면서 기자 20~30명을 한꺼번에 채용한 적이 있는데 이수정도 이때 합류했다고 한다. 정권에 순치된 것일 수는 있으나, 최소한 4·19를 팔아 특권을 누린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지점이 분기점이었다. 그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때 그는 문화공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역할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잘려나간 동료 기자들의 눈에 그는 부역을 하고 있었다. 해직 언론인들은 1996년 허문도, 권정달 등 다른 다섯 명과 함께 그를 검찰에 고소했다. 물론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그는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 정무1비서관과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문화부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4·19 선언문 작성자로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청년이 군부독재 아래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선봉에 선 것이다. 자유의 종을 난타하던 타수가 자유의 종을 깨버리고 만 것이다.

 

자유로운 소통이 생명인 SNS아들의 선택은?

 

13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이석우 다음카카오 공동대표가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와 관련해 사과하며 고개숙이고 있다. 

 

이석우가 시가총액 7~8조원의 다음카카오 대표가 되는 데는 아버지의 음덕이 컸다. 그의 깔끔한 매너나 사람들과 능숙하게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은 아버지의 피를 받아서일 것이다. 그는 영어는 물론 중국어, 일어에도 능하다고 한다. 주영 대사관 공보관, 주네덜란드 공보관을 역임한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해외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그가 정보통신업계의 선두로 발돋움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카카오 같은 정보통신업체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데는 민주주의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보통신업을 대대적으로 장려한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의사 소통 매체로서의 카카오톡이나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는 다음의 아고라 등은 헌법이 얘기하는 자유권이 확보돼야 꽃필 수 있는 공간들이다. 청년 이수정이 일찍이 설파했듯이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인 것이다. 특히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17조는 자유권을 떠받쳐주는 핵심 기둥이다. 이를 위해 많은 국민들이 피를 흘렸다. 4·19의 정신은 80년 광주 항쟁과 87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석우를 바라보는 눈길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선언을 일시적인 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프라이버시를 가장 우선하겠다는 그의 약속이 지켜질 때에야 다음카카오는 위기를 넘어 순항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덤으로 아버지가 역사에 진 빚을 갚는 길이기도 하다.

 

등록 : 2014.10.17 15:31 /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4·19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糾彈), 광정(匡正)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專橫)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이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로 민중 앞에 군림하든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은 헤슬픈 것임을 교시(敎示)한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가 적색전제(赤色專制)에의 과감한 투쟁의 거획(巨劃)을 장()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白色專制)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은 자유이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戰場)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戰域)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壟斷)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懺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學究)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 사수파(死守派)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196041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