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를 훈련하자 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당하고 있으면서 위암으로 죽어가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어느 날 탄식하며 말하였다.
“총과 칼, 대포로 얻은 나의 땅은 날로 줄어가는데 사랑과 겸손과 자비로 얻은 예수의 땅은 날로 늘어가는구나. 그는 승리자, 나는 패배자이다.”
총과 칼로 점령할 수 있는 것은 땅이었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땅의 주인이지 땅이 사람의 주인일 수 없다. 결국은 사랑의 사람이 사람을 정복하고 땅을 정복하게 된다.
에릭 프롬(Erich Fromm,1900~1980)이 쓴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책은 사랑에 대한 해설서 중에서 아마 가장 명석하고 짧고 쉽게 쓴 책일 것이다. 그는 쓰기를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다.”고 하였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그릇된 오해를 적었다.
첫째는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주는 것인데 받는 것으로 오해하기에 많은 갈등과 실패를 낳는다.
둘째는 사랑을 능력이 아니라 대상(對象)으로 생각하는 오해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나 사랑할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오해한다.
셋째는 ‘사랑을 하게 되는’ 처음 경험과 지금 ‘사랑하고 있는’ 계속적인 상태, 즉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오해이다.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와 희망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가슴 아픈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기술이다. 기술이기에 훈련을 받아야 한다.
사랑하기를 훈련하자 ②
삶이 기술이듯이 사랑도 기술이다. 사랑하는 방법을 훈련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술이다.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다면 음악, 그림, 의학, 공학등의 다른 기술을 배울 때에 배우고 훈련하여야 하듯이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점에 대하여 에릭 프롬은『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의 첫 부분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무엇인가?
편의상 기술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만일 내가 의학기술을 배우고저 한다면 나는 먼저 인간의 신체와 여러 질병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이론적 지식을 모두 배웠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의학기술에 숙달하지는 못한다. 상당한 실무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의학기술에 숙달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이론적 지식의 결과와 실천의 기술이 합치된다. 그러나 어떤 기술에 숙달하는 데에는 이론과 실천의 습득 이외에도 세번째 요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기술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음악에도, 의학에도,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뿌리깊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외의 것들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정력이 이런 목적에 사용되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에릭 프롬이 지적하는 바의 핵심이 무엇인가?
음악, 의학, 건축 등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사랑에서도 세 가지를 갖추어야 사랑하기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첫째는 사랑에 대한 이론의 습득, 둘째는 사랑하는 실천의 습득, 셋째는 사랑의 기술을 배우겠다는 간절한 열망, 세 가지이다.
사랑의 실습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정식 의사가 되기 전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인턴과정이라 한다. 인턴으로서의 실습과정을 몇 년 근무하여야 정식 의사로 출발할 수 있다. 그간에 배운 학문과 지식을 실제 현장에서 실습해 보라는 것이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도 교사로 나서기 전에 교생실습이라는 과정이 있다. 졸업학년이 되어 교실 현장에 나가 학생들 앞에서 실습을 해 보라는 것이다. 배운 것과 현장은 이론과 실제만큼이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 곧 바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의 수준에 버금갈 수 있는 실습을 하고 오라는 것이다. 그 실습과목이 사랑의 실습이다. 그런데 사랑의 실습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명상하는 식의 실습이 아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실습하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실습을 통하여 사랑의 나라인 하늘나라에서 살아갈만한 자격이 갖추어질 때쯤에 부르신다. 그 부르심을 우리는 죽음이라 부른다.
그런 수준에 이르는 것은 죽기 얼마 전에도 가능하다. 사랑의 실습은 세월의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사랑의 실습을 시작할 자리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시작할 시간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이 바로 사랑실습을 실천할 대상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사랑의 실습은 멀리 가서 실습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산 중으로 들어가서 실습하는 것도 아이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지금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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