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슬로시티' 청산도에 가고 싶다

풍월 사선암 2013. 11. 22. 18:42

[완도군 청산도 기행] 속도에 지쳤는가

 

'슬로시티' 청산도에 가고 싶다

   

아시아 첫 '슬로시티' 선정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

문명의 때 묻지 않은 천혜 경관

 

 

오래 전부터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마음먹어 온 곳이 있었다.

전라남도 완도군에 있는 청산도 라는 작은 섬이다.

 

서울에서 있은 조카딸 결혼식에 참석한 뒤 다른 일 제쳐놓고 훌쩍 완도행 버스에 오른 것은 호남 곡창지대에 가을걷이도 끝나고 단풍이 물들어 가는 고즈넉한 늦가을 아침이었다.

 

완도까지는 5시간 반, 버스터미널에 나와 준 조승호 씨가 선착장까지 안내 해 주면서 하는 말이 청산도에 도착하면 친구인 그 곳 면장이 기다리고 있기로 했단다.

 

혼자 떠난 여행길에 생각지도 못한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 청산도까지의 뱃길은 19.2km 불과 12마일의 거리였지만 50분이 꼬박 걸렸다.

 

마중 나와 있기로 한 안봉일 면장과 길이 어긋난 것은 순전히 내 안경 탓이었다.

 

조승호 씨가 전화로 나를 소개하면서 검은 안경 쓴 사람이라고 일러 준 걸 모르고 배안에서 그만 안경을 바꿔 버렸다. 그 아름다운 쪽빛 바다를 차마 선글라스 낀 채 쳐다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산도(靑山島)는 산만 푸른 것이 아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이며 어디가 섬인지 도무지 구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푸른색이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라 했는가, 놀랄만한 기암괴석은 없지만 자연의 허술함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청정 지역, 그 섬에 온 것이다.

 

요즘에는 하루 다섯 번씩 왕래하는 청산 페리호가 버스며 승용차며 숱한 승객들을 토해 내는 동안 도청항은 관광철이 아닌데도 자못 활기가 넘친다.

 

우체국 뒤편에 있는 면사무소로 찾아가니 기다리고 있던 면장과 문화 해설사 오안옥 씨가 살갑게 맞이해준다.

 

처음 안내를 받은 곳은 청산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서편제 촬영지다. 도청항 선착장에서 언덕길로 1km쯤 올라가면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이웃마을에서 소리를 팔고 돌아온 유봉이 의붓딸 송화와 의붓아들 동호와 함께 구성지게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던 거기가 바로 거기다.

 

서편제는 1993년에 임권택 감독이 만들어 처음으로 관객 100만을 돌파했던 영화로 지금은 돌담 밑으로 코스모스가 숨어 있었지만 촬영할 당시는 오른쪽으로 유채꽃, 왼쪽으로는 청보리가 한창인 때였기에 해마다 4월이 되면 인파가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바다와 도락포구의 그림 같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서 있노라면 왜 여기가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군데'의 하나가 되었으며 2013년도 네티즌 선정 최고의 가족체험여행지가 되었는지 알만 하다.

 

안내해주는 분이 해 떨어지기 전에 가야 한다며 서둘러 범바위 길을 올라간 이유가 있었다. 범바위의 정상에 오르니 때마침 해가 막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멀리 손에 잡힐 것 같은 거북이 섬 끝으로 푸른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장열하게도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청산도 석양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청산도의 슬로(Slow) 길은 요즘 한국에 유행처럼 번지는, 돈을 들인 가공적인 트레일과 달리 길 표시만 있을 뿐 돌 뿌리며 자갈밭을 치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그 길을 걸으며 한때는 문명을 쫓아 달려갔으나 이제는 그 문명에 쫓기며 허둥대고 있는 우리들 삶을 잠시나마 돌아보게 된다. 날이 어두워서야 면사무소로 내려온다.

 

내년 봄에 필 유채꽃의 파종 작업을 하고 돌아 왔다는 면 직원들이 뒷마당에서 닭도리탕과 막걸리로 저녁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안 면장은 내년 411일부터 한달동안 완도 국제 해조류 박람회가 열리며 청산도에서는 슬로 걷기축제 등이 준비되어 있다고 소개하면서 이때 미주 동포들이 많이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섬, 문명의 때가 묻지 않고 자연의 소박함을 그대로 간직한 섬, 청산도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멋에 취하고 자연의 맛에 빠져들었던 첫날의 숙소는 이름도 고운 '청산도 느린 섬 여행학교'. 여기선 어느 것 하나 '느림' 아니고서는 맥을 못추는 곳이다.

 

폐교된 청산중학교 분교를 개축해서 만들었다는 민박시설이었는데 밤새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잠 마저 느림으로 청하게 만든다.

 

[LA중앙일보]발행 : 11,21,13 미주판 28면 / ·사진=김용현(카슨시티)

 

"빠름은 반칙! 싸목싸목(전라도 방언:천천히) 걸으소"

 

서편제 길에서 필자가 진도 아리랑 한자락을 부르며 흥에 취해있다.

 

바닷가의 울창한 소나무 가지에 걸려서 인가.

청산도에서는 해도 느린 속도로 떠오른다.

 

느림의 미학이 곳곳에 넘쳐나는 곳, 그러나 딱 하나 느리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섬의 인구가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13500명이었던 청산도 주민이 지금은 2300명이다. 한국의 농어촌, 특별히 섬 지방 인구의 감소현상은 청산도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정부는 곳곳에 농어촌 뉴타운이라는 걸 만들어 귀농유치를 하고 있지만 대부분 형식적이거나 실패로 끝난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청산도에는 아예 그런 전시행정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랑포 길에 원두막 같은 쉼터.

 

한번은 서편제를 찍었던 길에 시멘트 포장을 했다가 관광객들의 반대로 모두 뜯어내 흙길을 복원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청산도같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슬로 시티에서는 전통을 지키고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친환경 건축과 유기농 농산물을 개발하며 자가용사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오늘은 청산도 출신의 청년 이상민 씨가 친환경차인 전기차를 갖고 나와 도움을 준다. 섬의 곳곳을 차로 안내해주겠다고 했으나 내가 슬로 길을 좀 걷고 싶다고 했다. 청산도에는 모두 11개 코스의 슬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모두 합치면 우연하게도 마라톤 풀코스와 같은 42.195 km 라고 한다.

 

힘든 코스를 물어 보자 청년이 괜찮겠느냐고, 조금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최근에 새로 개발했다는 '명품길.' 권덕리에서 청계리 장기미 해변에 이르는 산길을 가르쳐 준다.산속으로 이어진 오솔길에는 가도 가도 스치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산길이 험하기는 했으나 해안 절벽을 따라서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함께 이름도 모를 들풀을 해치며 걷는 2시간이 너무 좋았다.

 

청산도에서는 빠름은 반칙이라고 했다. 전라도 방언으로 '싸목 싸목'(천천히) 걸으란다. 그저 매사에' 바쁘다 바뻐, 빨리 빨리'를 노래 부르듯 하며 살아온 우리네 삶이었는데. 비록 이틀 동안이나마 청산도 느림의 철학에 입문(?)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값진 일인지 모르겠다.

 

청산도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이 섬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은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어업보다는 대부분 농사를 택했던 사람들의 힘든 농사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구들장 논이다. 구들장 논이란 산을 깎은 다음 구들장 같은 평평한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논이다.

 

청산도에서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풍경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위에 올려놓고 이엉으로 덮어 두었다가 3~5년 후 뼈만 땅에 묻는 초분(草墳)이라는 풍습이다. 청산도 사람들에게는 이 누추한 것들을 버리지 못할 만큼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후에는 어제에 이어 다시 서편제 길을 찾았다. 유채꽃은 없었지만 그 돌담길에서 나도 유봉이 처럼 진도 아리랑을 불러 보고 싶은 객기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은 몇 백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안내해준 청년이 제법 추임새를 넣어 준다. 그 시간에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리고 나서 또 걸었다.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양이 꽃과 같다하여 꽃 화 자에 파도 랑'자를 써서 지은 3시간 코스의 '화랑포길'을 쉬엄쉬엄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다. 저녁에는 내일 첫 배를 타자면 아무래도 선착장 가까이가 좋을 것 같아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에 숙소를 정했다.

 

산과 바다, 하늘, 갯벌, 숲에서 푸른색을 지켜온 남도 사람들, 검소하나 남루하지 않고 소박하나 반듯하고 당당히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간다. 맹목적인 '천천히'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 사람의 도리대로 진득하게 공을 들이며 살아야 한다는 '싸목싸목'의 깊은 뜻을 알고 간다.

 

청산도가 오래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후덕한 인심을 잘 보존하게 되기를, 나아가 이 작은 섬이 우리가 갈망하는 생명, 환경, 평화의 삶으로 가는 미래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면서 완도로 향하는 청산 아일랜드호에 오른다.

 

·사진=김용현(카슨시티)

 

[LA중앙일보] 발행: 11/29/13 미주판 23면 기사입력: 11/28/13 15:54

 

첨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