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월사부인(月沙 婦人)의 청덕(淸德)

풍월 사선암 2013. 11. 3. 11:06

월사부인(月沙 婦人)의 청덕(淸德)

 

부자 판서의 딸이었건만 값비싼 혼수를 거절하고 감연히 맨몸으로 시집을 간 여걸

-한국방송사화전집 중 오천년의 향기에서-

 

1. 公主 宅 잔치

 

때는 인조대왕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전날의 선조대왕의 따님인 정명공주가 이때까지 생존해 있어가지고 이 공주의 댁에서 마침 새 며느님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적어도 인조대왕의 고모이신 공주님 댁에서 새 며느리를 맞이해 데려오는 경사날인 만큼 상감님의 분부도 있고 해서 온 장안의 귀족 부인들이 인사를 온다. 이를테면 아무 대군부인, 아무 귀족부인들이 자부님 등과 왕실 부인들이라든지 아무 정승부인, 판서마나님, 참판 댁 자부니 할 것 없이 문무백관들의 수많은 부인 아낙네들이 아침부터 꾸역꾸역 공주 댁으로 모여든다. 모여들어서 이 댁 중당(中堂)에 단정히 위의를 차리고 앉은 주인마마-공주님 앞에 모두 치하인사를 드리고는 하인들이 안내하는 처소에 가 앉는다. 결국 잔칫상이 나오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고관 부인네들이 안채의 방이란 방, 대청마루까지 꽉 차게 되어있다.

 

장안 귀부인들이 거의 다 이처럼 모여 앉은 그들의 차림들이 또 얼마나 현란한가! 모두가 환한 능라주단(綾羅綢緞)에 번득번득하는 비단무늬로만 장식된 의상으로 어울려 앉은 부인네들이 마치 꽃구름 속에 쌓인 선녀들 같았다. 수백 부인네들의 손이 모두 누런 금가락지 속에 움직이고, 머리치장들도 금비녀, 금귀이개 아니면 비취, 산호, 진주, 마뇌() 아닌 사람이 없는 금패(錦貝), 호박, 장도칼까지를 패물로 찬 부인들이다.

 

하여튼 이런 광경으로 각기 방문들을 열어 제키고 앉아서 얘기의 꽃을 피우자니 오후가 훨씬 넘어도 잔칫상도 아직 안 나온다. 주인 되시는 공주마나님도 무엇을 따로 기다리는 듯 정숙하게 여전히 자기의 좌석에 앉아만 있다. 그러다가 나중의 일이었다.

 

이집 바깥 대문 안으로 늦어서야 어떤 안손님 하나가 들어와 나타나는데, 먼저 와서 늘어앉은 여러 귀부인들이 내다보기엔 안손님인지, 어떤 지나가던 촌 할망구가 잔치 음식이라도 구걸하러 들어오는 건지, 공주 댁 경사에 인사하러 오는 귀부인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첫째 차리고 온 것이 가마나 타고 와서 밖에서 내렸는지는 몰라도 타고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깨끗하기는 하나 굵다란 무명치가 무명저고리를 입고 찌그러진 가죽신도 못 신은 채, 겨우 수수한 짚신을 신은 부인이었다. 그런데다가 그의 나이도 반백이 더 되 뵈는 노부인이었지만 헙수룩한 머리에 기름 한 방울을 칠하지 않은 꼭 촌 농가 집 가난한 노파가 아닌가? 다만 앞에 동비(童婢) 하나를 세우고 품위는 점잖게 보이는 이런 노파가 들어오는데 수백 명의 먼저 온 부인들이 내다보다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까지 어떠한 대갓댁 귀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직접 마중 나가는 법이 없던 공주가 방금 이 껄렁하게 차린 촌 노파가 들어오는 데는 정명공주가 내다보다가 어이구!”하면서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공주가 얼른 방문 밖으로 나서서 신을 거꾸로 신다시피 하고 그 무명치마를 입은 노파한테로 쫓아 내려가기까지 해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어서 들어가세요.”

…….”

왜 이제 오세요?”

 

이래가며 그 노파인지 노부인인지의 손을 잡아끌고 공주가 있는 중당으로 들어가서 잠시 숨을 돌리게 해 가지고, 그런 후에야 큰 대청마루로 그 늙은 부인을 공주가 직접 모셔 앉힌다. 그런 다음에야 잔칫상을 들여오기 시작해라하고 노비들에게 분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늙은 부인을 상좌에 앉힌 다음에야 다른 여러 부인들한테도 잔칫상이 나오는 것이었다.

 

2. 상객대접

 

그러고 보니 수많은 귀부인들이 정명공주 마마가 그 노파를 깎듯이 대하는 모습에 저 무명치마의 촌 부인이 제일 상객의 대접을 받는 꼴에 입을 삐죽삐죽하는 이도 있고 도대체 저 노파가 누구이기에?’하고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이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식사가 끝나서 젓가락들을 다 놓고, 다시 만당의 안손님들이 이 이야기판이었다. 그 때에 그 촌사람 같은 부인이 저는 먼저 돌아가야 하겠습니다.’하고 일어선다. 그러자 정명공주가 또 만류하기를,

 

아니 더 좀 많이 얘기 좀 하시다가 일어서시지 그러세요.”

, 죄송합니다만 노신의 집에선 오늘 마침 3부자가 다 당직으로 대궐엘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퇴궐을 해 나오면 시장할 것 같아서 제가 빨리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지어야 합니다.”

 

아니, 댁에서 3부자분이 어떻게 한날에 당직이 되셨나요?”

, 우연히 집의 대감은 오늘 당번이 약방도제조(藥房都堤調)라 종일 상감님만 모시게 됐습죠. 큰 자식 판서 아이도 또 오늘 정청에 나가서 상감의 특명을 대기하게 됐고요. 둘째아이 승지는 오늘이 또 정원(政院) 당번이옵고요.”

 

, 그러세요? 참 댁의 3부자님은 영광이시기도 하고 바쁘시기도 하시군요.”

정명공주의 하는 말이었다. 그제서야 방안의 구름 같은 귀부인들이 듣고 알았다.

 

약방의 도제조란 삼정승 대감만이 맡아보는 직책인데 저 촌부인 같은 부인의 영감이 그럼 좌의정리라? 현재 이 나라의 좌의정이면 월사상공(月沙相公)인데. 월사상공의 아드님 하나는 판서이고 하나는 승지라더군.”

, 이 나라의 좌의정의 마나님이고 판서의 어머님이 저렇게 검소하게 무명치마 저고리에 짚새기를 신으시니…….”

이거 우리들의 금비녀 비단치마가 행세를 못하겠군.”

 

이렇게들 수근대고 시무룩할 때에, 정명공주가 월사부인을 보고 또 묻기를,

, 그러실지라도 저녁식사야 부리는 것들을 시켜서 지으시지, 무얼 손수 가셔서 차리겠다고 그러세요.”

어디 그럽니까요? 제가 가풍 만들기를, 시부모님이거나 남편이거나 자식들의 식사는 꼭 제 손으로 일생 맡아서 차리기로 비롯했더니요, 이젠 이 늙은 것의 손으로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를 않는답니다.”

 

이 말 또한 기막힌 말이 아닌가! 할머님께서 자식과 자부들 교육에 자주 쓰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꽃 중에는 목화 꽃이 제일이요, ()중에는 소금이 제일이다.”

이 얼마나 실생활에 유용한 말씀인가! 이 말씀은 현세에서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3. 내조의 음덕

 

이렇게 검소하고 손수 근고를 아끼지 않는 월사부인의 남편 호가 월사이고 이름을 이정귀라고 하는 이 분이 누구인가? 적어도 임진왜란 때에 문장으로 국난를 건졌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가 명나라의 구원병이란 이름으로 원조를 청해다가 왜적을 토평하던 중에 정응태라는 명나라 장수가 저의 나라 황제에게 무소(誣訴)하기를, ‘조선국이 속으로 왜국과 내통을 해가지고 장차 명나라를 치려고 음모를 한다.’고 하니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을 의심해 가지고 이미 내보냈던 원군도 철수하고 원조도 그만두려고 하는 때의 일이었다.

 

이럴 때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내통한 일이 없다는 그 변명을 하기 위해서 계속 변명사신을 명나라로 들여보내는데 처음엔 오리 이 정승(이원익)이 명나라 서울까지 가게 되었다. 중로의 갖은 방해를 무릅쓰고 들어갔었지만 나라간의 변명하는 진술도 받아들이지 않는 고로 하릴 없이 그대로 돌아왔고, 그 다음 오성 이항복대감이 정사(正使)로 들어갈 때 부사(副使)로 글 잘하는 월사가 따라 들어갔다. 정사 이항복 역시 그의 기지와 웅변을 가지고도 저 나라의 군신들을 이해시키지 못해서 마음이 무거울 때에 그 부사였던 월사 이정귀 이분이 하룻밤 사이에 서른아홉 벌이라는 변무(辨誣) 설명서를 썼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변무주문(辨誣奏文)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내통한 이유부터가 어디 있느냐는 도도한 변명 설명서를 서른 아홉벌이나 그 달필과 문장으로 작성해서 명나라 조정의 서른아홉 아문의 장관들한테 그 설명서를 들여보냈더니, 첫째 월사의 글씨가 천하의 명필이었다. 그 글씨부터가 저들의 안목을 충동했는지 그들의 각로(閣老)이하 백관들이 죽 보고 다음에는 그 문장과 그 설명서를 나누어 보고 조리의 통절함과 활달함에 그만 감복들을 했다.

 

아야 저거 명배 명배(明白明白) 하오문자(好文章) 통쾌디(痛快的)!” 해가며 고개들을 끄덕이고 탁자를 친다. 자기들 황제한테 그 문장변명서를 보인다.

 

나중에는 원근의 지방관이며 학자들까지도 모두가 들고 와서 월사의 글과 글씨를 등사해 베껴간다. 결국은 이렇게 해서 월사의 문장은 명나라 천하에 진동이 되고, 그 변명 임무도 달성이 돼서 결국 명나라 황제 이하 만조백관이 모두 조선국의 입장과 사실이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뒤에도 명나라 구원병이 계속 우리나라를 도와줘서 그 이듬해엔 왜란이 평정되기까지 하였다.

 

무릇 이러한 공신이 되게 마련한 월사공의 그 글씨와 문장, 이것이 우연히 성취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얘기한 월사의 부인 권씨의 내조의 덕행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시집올 때부터의 얘기가 있지 않은가? 권씨 부인의 친정은 서울 권판서의 댁이었고 그리고 월사는 소년 적에 어느 시골 가난한 선비의 댁에서 이 부자판서의 댁으로 장가를 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부자 처갓집에서 가난한 선비한테로 시집가는 글 딸에게 해주는 혼수와 재물이란 것이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생을 입고 지낼 의복 피륙이, 세간 패물도 모두 금은이요, 능라주단으로 수십 장롱이었다. 많은 혼수를 해서 신부 뒤에 지워 보내려고 마음먹고 신방을 차려 사흘밤 신방을 지내고 시집으로 갈 참인데 신부 권씨가 졸연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친정 양친 내외 앞에 꿇어 엎드려서 하는 말이,

 

아비님 저는 저 싸놓은 혼수 짐을 하나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건 또 시집가는 아니가 무슨 소리냐?”

 

아니에요, 저 많은 혼수니 비단의복이 다 제겐 소용 안 닿고요. 그 속에서 베치마 적삼하고요 무명붙이 의복만 몇 벌을 가지고 가겠느니 따로 농에 넣어주세요.”

어째서?”

 

, 죄송하오나 2,3일 동안이라도 시랑(侍郞)이란 이의 인물을 살펴보니까 그는 재물로 밑받침을 해 줄 이가 아니라 소녀의 근공(勤功)과 뜻으로 도와줘야 될 문장의 바탕이군요. 즉 글로 이름이 날 분이니까 글이라면 재물이나 호사와는 인연이 멀어져야 되지 않나요. 그런 만큼 화사한 비단의복 금은붙이 등속은 모두 빼어놓으시고 그 대신 책이나 두어 채롱 넣어주시도록 하세요.”

 

이렇게 주장해서 정말 그 의사가 부모님에게 용납되었던 것이다.

 

판서의 딸이라도 화려한 혼수를 가지고 간 일이 없어 시댁으로 들어선 첫날부터 베치마와 무명옷만의 차림으로 시댁 가정의 온갖 길쌈이나 정구지역(부엌 일)을 손수 맡아했다. 식사까지라도 부인이 손수 근로함으로써만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하는 정도(正道)라고 믿고 행하였다. 더 말하면 남편의 글, 정신과 고결한 지조를 어지러뜨리지 않기 위해서 아내로서 남편 보는데 생전 비단옷을 안 입었고, 책을 들고 있는 남편 앞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담박질소한 그 선비 가정의 분위기를 꾸며 드리는 그 속에서 남편의 글과 인품을 천하문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