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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리 권력의 정점 청와대 비서실장

풍월 사선암 2013. 10. 27. 09:53

일인지하권력의 한가운데, 35명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문고리 권력의 정점 청와대 비서실장 부통령·승지 등 별칭도 다양, 정치상황 따라 영욕

 

2013101일 저녁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은 8월 초 취임 후 처음으로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를 초대해 만찬을 했다. 세간에서 김 실장이 왕실장’, ‘부통령으로 불린다는 화제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김 실장은 언론이 하도 그래서 운신을 못하겠다. 과대포장돼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대통령 뜻을 밖에 전하고 바깥 이야기를 대통령께 전할 뿐이라며 옛날 말로 승지(承旨)”라고 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도 곧잘 비서실장을 승지로 부르곤 했다. 임기 말에는 술 자리에서 맞은 편에 앉은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도승지(都承旨), 한잔 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유서 깊은 승지 정치

 

지금이 왕조시대냐는 비아냥도 있지만 최고 권력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조선시대 도승지는 현재 청와대 비서실장에 가장 가깝다. 여섯 승지 가운데 선임격이던 도승지는 정3품 당상관이었지만 권세가 정승을 압도하기도 했다. 세조 때 한명회와 정조 때 홍국영이 그런 도승지로 꼽힌다. 청와대 비서실장 50년사도 마찬가지였다. 때론 최고 실세로 권력을 누리는가 하면 호가호위한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고 있는 듯 없는 듯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나중에 부통령으로 정권 몰락의 원흉이 된 이기붕을 비서관장으로 두었다. 집권 후 김양천, 고재봉이 비서실장을 맡긴 했지만 이 때는 비서실 역할이 단순 비서·사무보조 역할에 국한돼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중앙청 대통령 비서실과 경무대 비서실이 나뉘어 있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 들어선 2공화국은 내각책임제였다. 상징적 지위에 한정돼 있던 대통령의 존재감은 비서실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경무대 비서실이 청와대 비서실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재항 비서실장의 활동이 두드러질 시간도 없이 5·16 쿠데타를 맞았다.

 

막강 실세이후락과 보필김정렴

 

본격적인 청와대 비서실장의 등장은 196312월이었다. 민정 이양 약속을 깨고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 출신 이후락을 외교관 출신 이동원의 뒤를 이어 비서실장에 앉혔다. 이후 510개월간 비서실장을 지낸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전반기 막강한 실세로 자리잡았다. 대통령 최측근으로서 장관 인사와 여당인 공화당 공천 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치자금을 직접 관리하는 등 이후 어떤 대통령-비서실장 관계에 비해서도 신임 관계가 남달랐다. 제갈공명과 조조의 지략을 합쳤다는 의미에서 제갈조조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에게는 사라진 직제였던 부통령이란 별칭이 붙었다.

 

이 실장은 특히 선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67년 대선. 박 대통령은 4년 전 15만표 차이로 간신히 이겼던 윤보선 후보를 115만표 차이로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한다. 3선 개헌을 위해 의석 확보가 매우 중요했던 1968년 총선도 금권·부정선거 시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는 흡족한 결과를 선사했다. 공화당 내 개헌 반대파도 이후락이 막후에서 조정했다. 3선 개헌 이후 그는 주일대사를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고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끄는 등 박정희 시대의 총아로 자리매김했다. 중정부장 때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후로도 지목된다.

 

뒤를 이은 김정렴은 92개월간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최장수 실장이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상공부 장관을 지낸 경제 전문가였던 그는 그러나 조용한 참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편이었다. 회고록 <, 박정희>에서 김정렴은 청와대 비서실을 빙자하는 소지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자 나는 모든 비서실 직원에게 청와대 근무를 표시하는 명함 작성과 사용을 금지시켰고 위반했을 때에는 같이 일할 수 없다는 확고한 뜻을 시달했다고 밝혔다. 명함 금지 지침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에서 되살아나기도 했다. 철권통치기인 유신시대에 맞는 경제·행정 비서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퇴임 직후 승지나 도승지는 드나나나 말이 없는 법이라고 측근에게 말한 뒤 외부 접촉을 끊은 것도 조용한 보필의 연장이었다.

 

유신 말기로 치닫던 197810대 총선에서 공화당이 의석수에는 앞섰지만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이 1.1%포인트 뒤지는 결과가 나오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비서실장에 오른 김계원은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이미 지낸 인물이었다. 프로필만 보면 막강한 실세처럼 보이지만 육영수 여사 사후 술을 가까이 했던 박 대통령의 술벗 역할에 그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위세가 맹위를 떨칠 때였다. 차 실장의 전횡에 함께 분개했던 김재규 중정부장이 김 실장에게 대장(김계원)이 대위(차지철)하고 싸우면 대장이 욕을 먹는다고 달랬다는 일화도 있다.

 

5공 비서실장은 얼굴마담

 

5공화국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전까지 막강했던 위상에 비해 힘이 많이 빠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허 대령으로 불렀던 5공의 실질적 설계자 허화평, 허삼수가 청와대 수석으로 국정전반에 막강한 힘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정권 초기에는 군사정부가 아닌 문민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청와대 얼굴격인 비서실장에 군 출신이 아닌 김경원, 이범석, 함병춘을 내세우고 실세는 뒤에 숨었다는 분석도 있다.

 

두 허씨가 이철희·장영자 사건, 대통령 동생 전경환 비리 처리 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마찰을 빚다 물러났지만 함병춘 실장은 1983년 북한의 버마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다. 두 허씨 자리는 청와대에서는 허문도·이학봉이 대신했고 중정에서 이름을 바꾼 안전기획부에선 장세동의 권세가 막강했다. 이 때문에 재무부 장관까지 지내고 비서실장으로 온 강경식도 힘을 못 쓰긴 마찬가지였다.

 

민주화 이후총리, 여당 대표 영전 케이스 줄이어

 

19876·29선언 이후 새 정부 출범 전까지 과도기 비서실장이던 김윤환은 이후 6공화국에서 정무1장관, 민정당·민자당 원내총무, 신한국당 대표 등을 거치며 킹 메이커라는 별칭을 얻는 등 승승장구했다.

 

6공에서는 정치특보에서 비서실장으로 노재봉 서울대 교수가 이름을 떨쳤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비서실장 9개월 만에 총리로 영전했다. 19903월 노 실장 임명 당시는 2개월 전 3당 합당으로 여당 내부를 이끄는 노련한 정치전략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그는 청와대 수석들과 난상토론을 자주 했다. 대통령을 보필하기보다는 설득해내는 스타일이었다고도 한다. 노태우 정부의 다른 비서실장인 홍성철, 정해창은 모두 재임기간이 2년을 넘겼지만 노재봉 실장이 대중들 뇌리에 더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993년 등장한 문민정부는 4선 의원인 박관용이 비서실장을 맡으며 출발했다. 정권 초기 각종 개혁에 따른 국민 지지가 높았고 안기부와 경호실 위상이 약화되면서 박관용호는 순항했다.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개혁에 반발이 심했던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을 설득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소통령김현철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주미 대사 출신 한승수를 거쳐 김광일이 비서실장 바통을 넘겨 받았다. 김 실장은 당시 위세를 떨치던 이원종 정무수석과 불협화음을 빚다 노동법 날치기 파동, 한보철강 사건 이후 자리를 물러났다.

 

최초의 평화적·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대통령은 김중권, 한광옥, 이상주, 전윤철, 박지원 등 5명의 비서실장을 뒀다. 노태우 대통령 청와대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김중권 실장은 여소야대라는 어려운 국정상황에서도 무난히 역할을 수행해 19개월간 재임했다. 한광옥은 최초의 호남(전북 전주) 출신 비서실장으로 정치력을 인정받아 당·청 관계를 원만하게 했지만 ‘DJP(김대중·김종필)’ 공조 붕괴 책임론으로 실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민주당 대표직을 꿰차며 정계로 돌아오는 등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편이었다. 공보수석·정책기획수석·정책특보에 이어 비서실장까지 DJ 청와대에서만 4번째 직책을 받은 박지원 실장은 이후락 이후 대표적 실세 비서실장으로 꼽힌다. 전윤철·이상주 실장은 각각 3개월, 4개월이라는 단명 실장이었지만 실상을 보면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로 영전한 경우였다.

 

상상 초월 스트레스임플란트, 탈모, 신경통 동반

 

노무현 대통령은 문희상, 김우식, 이병완, 문재인 비서실장과 함께했다. 문재인 실장은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비서실장을 지냈다. 애초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두 가지를 대통령에게 요구하며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상황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업무량이 한계용량을 늘 초과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심지어 치과 치료를 받느라 드릴이 어금니를 긁어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졸음이 쏟아졌다. 이렇게 무리를 하다 보니 민정수석 1년 만에 이를 열 개나 뽑아야 했다고 밝혔다.

 

최장수김정렴 비서실장도 회고록에서 실장 재임 중 매일 아침 샤워를 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집안 내력이나 나이 탓이라 생각했으나 실장을 그만두자 신기하게도 뚝 그쳤다고 말했다. “좌골신경통이 심할 때에는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의자에 앉지도 못해 서서 책상 위 서류를 결재하곤 했는데 실장을 그만두고 나니 스르르 없어졌다고도 했다.

 

돌고 돌아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 때도 류우익, 정정길, 임태희, 하금열 등 4명의 실장이 나왔다. MB정부는 청와대 비서실장대통령실장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지만 실속은 없었다. 류우익 초대 대통령실장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로 불과 4개월 만에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정권 내내 주중대사와 통일부 장관을 지내는 등 회전문을 돌고 돌았다.

 

언론인 출신 하금열 실장은 경남 거제가 고향으로 노무현 정부의 문재인,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 실장과 동향이다. 거제는 최근 세 정부에서 잇달아 비서실장을 배출하면서 서울(김정렴·최광수·함병춘)과 함께 가장 많은 실장을 배출한 지역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상 비서실장 인선부터 시작하고 내각을 꾸리던 관례를 깨고 취임 1주일 전에서야 허태열 비서실장을 지명했다. 허 실장 체제는 대통령 방미 도중 벌어진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으로 체면을 구겼다. 윤 대변인은 청와대 출입기자 당시 인터뷰를 모은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이라는 책까지 썼지만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그는 허 실장의 통제 밖이었다. 허 실장은 박 대통령의 여름휴가 중 청와대를 지키고 있다가 경질되는 초유의 기록도 남겼다.

 

뒤를 이은 김기춘 실장은 극존칭 화법으로 화제가 됐다. 첫 공식 브리핑에서 윗분의 뜻을 받들어서 한가지 발표를 드리겠다는 말로 시작한 것이다. 이후 승지발언까지 전해지면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대통령은 한껏 높이고 자신은 낮췄지만 주위에서는 50년 전 이후락 실장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허·김 실장은 아버지 박 대통령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경향신문>입력 : 2013-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