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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양녕대군

풍월 사선암 2013. 10. 29. 10:39

 세종대왕 - 김영근/주니어랜덤

 

책읽기를 좋아한 왕, 세종대왕, 책 한권을 백번씩 읽었고, 밥 먹을 때도 책을 읽었어요,

책을 너무 좋아해서 눈병이 걸릴 정도였으니...

 

모두가 잠든 추운겨울밤, 사람의 발자국소리하나 없는 고요한 밤에 두개의 소리가 들렸어요.

세찬 바람소리와 세종의 책 읽는 소리, 충녕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어요. 책을 너무 좋아해 눈병이 난 세종을 보고, 태종은 책을 모조리 치우리라고 명합니다.

 

책이 없어지지 너무 심심해서 여기저기 방안을 두리번거리니, 병풍 밑에 책이 하나 있었는데, 어찌나 반가운지, 그 책<구소수간>을 읽고 또 읽어서 나중에 거의 다 외워버렸어요.

 

어떤 놀이보다 책읽기가 큰 즐거움이었지요. 첫째 형님 양녕대군은 술과 여자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늦은 밤 양녕대군이 동생 충녕을 찾아왔어요.

 

"형님께서 이 시각에 여긴 어인일이신지요?"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어제 대궐 밖 주막에서 마시다 두고 온 술이 있는데...."

"형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어허, 마시다 만 술은 다 마셔야 하지 않겠소. 아우님"

"오늘밤만이라도 내 방에서 나대신 책을 읽어 주시오."

 

세자인 양녕대군은 무섭게 밖으로 나갔고, 담장을 뛰어넘어 대궐 밖으로 나갔어요. 충녕(세종)은 형님 방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었고, 마침 태종께서 세자의 방 앞을 지나가니, 책 읽는 소리가 들려 흐뭇해했어요.

 

태종은 세자가 기특해서 칭찬을 해주고 방문을 열려다가, 공부에 방해될까봐 내일 아침에 칭찬해주시기로 하고 지나갑니다.

태종이 방문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세종의 가슴은 콩닥콩닥 새가슴이 되었어요.

 

다음날 태종은 하인을 시켜 세자를 불러오게 했어요. 세자를 찾으러 간 하인들이 난리가 났어요.

세자가 간밤에 대궐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이예요.

 

어젯밤 세자 방에 책을 읽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세종이었다는 사실에,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며, 결국 세자의 자리에서 내 쫓고 맙니다. 충녕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책 읽기를 좋아하고, 지혜로우니 세자로 정하게 됩니다.

 

충녕은 태종인 아버지와 대신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얻어 22살에 세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조선의 4대 임금이 되었어요.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고, 늦은 밤까지 세종의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어요.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나라 일을 논의했어요.

 

70권에 달하는<성리대전>을 읽었고, <훙무정운>이란 책을 읽고 말과 글의 원리가 들어 있는 책이라는 것에 크게 감동받습니다.

 

그 책이 훗날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전문지식과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지극정성, 날마다 글자모양만 생각했어요.

 

누구나 한번 보면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밤새 생각을 거듭하고 또 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밤을 새우는 일이 많으니 세종의 몸은 갈수록 허약해졌어요.

 

"눈이 아파....내 눈이 , 내 눈이 잘 ..."

눈병이 심해지고, 어떻게 하면 쉬운 글자를 만들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어요.

 

어느 날 방문을 열고 하늘을 쳐다보았어요. 휘영청 달이 밝았어요.

"저 달처럼 백성들의 눈을 환하게 밝혀 주는 글자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깊은 생각을 한 세종은 "!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양을 닮은 글자를 만들어야겠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고, 사람이 서 있는 모습..."

 

마침내 세종 25년에 닿소리(자음)17, 홀소리(모음) 11자로 된 우리 글자가 만들어졌어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한 바른 소리라는 뜻이지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글, 그 한글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삶의 행복을 찾아 꿈을 키워가는 것이지요.

 

-다이애나홍-

 

  세종대왕과 양녕대군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습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습니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대는' 바람에 모친 3연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습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습니다.

 

어느 날 양녕대군이 세종대왕의 어명을 받고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습니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 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습니다.

 

양녕은 그날로 그 절세의 미인과 하룻밤 동침하고 이 사실은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리고는 동침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시를 한수 지어 그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시를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개를 들여다보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정주수령은 이 사실을 알고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올려 보냈습니다.

 

세종은 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습니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습니다.

 

양영대군 : 전하 잘 다녀왔습니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인자리에서 기생을 불러내어 춤추고 노래하게 했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개를 들여다보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습니다. 세종은 빙긋이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 댁에 보냈습니다.

 

아무리 부하를 휘몰아치고 계율이 엄한 임금님이지만 형제의 우애만큼은 변함이 없는 세종대왕 그래서 우리는 그를 위대한 인물로 평하고 화폐에까지 얼굴을 색이지 않았습니까?

 

<받아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