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애송시

동방의 등불 - 타고르(R ,Tagore)

풍월 사선암 2013. 8. 21. 00:39

 

동방의 등불 - 타고르(R ,Tagore)

 

주요한(朱耀翰) 옮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벼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전문>

 

 

조선인 달래주던 동방의 등불-우호상징으로

 

◀20115월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인근에 세워진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흉상.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 되리라.’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192942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이란 시를 통해 조선을 동방의 밝은 빛으로 묘사했다.

 

영어로 쓰인 이 시는 당시 주요한 편집국장의 번역으로 지면에 실렸다.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한 줄기 등불이었다.

 

한국인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타고르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에 가면 만날 수 있다. 2년 전인 2011518일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인근에 타고르의 흉상이 세워졌다. 타고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인도의 유명 조각가 고담 팔 씨가 제작한 길이 107cm, 좌대까지 포함하면 210cm 크기의 흉상으로 인도 정부와 국민이 한국에 기증했다.

 

흉상 제작은 2006년 압둘 칼람 당시 인도 대통령의 방한 때부터 추진되다가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인도 국빈방문 때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주한 인도 대사관의 제안으로 건립 준비가 시작됐고 동방의 등불을 게재한 동아일보사 앞, 광화문 광장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최종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대학로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동방의 등불에 대해서는 의미가 과장됐다는 논란도 있다. 지난해 말 출간된 계간 시전문지 시평겨울호(통권 50)에서 홍은택 대진대 교수(영문학)는 교과서에 실렸던 동방의 등불중 처음 4행만이 타고르가 조선인을 위해 써준 것이며, 뒷부분은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 35’에서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타고르와 동방의 등불은 한-인도 양국의 우호의 상징으로 깊게 뿌리내렸다.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동방의 등불은 양국 정상회담에서 빠지지 않는 대화 소재다. 흉상 제막식 당시에는 메이라 쿠마르 인도 하원의장이, 그해 7월에는 프라티바 파틸 당시 인도 대통령이 흉상을 찾아 헌화했다. 지난해에는 흉상 앞에서 인도 민속음악을 주제로 한 거리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2013-05-20  / 동아일보 김재영 기자

 

 

타고르 동방의 등불한국위해 쓴 아니다

 

홍은택 교수 시평서 지적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시 동방의 등불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이에 대해 이면의 진실을 제기하는 글이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출간된 계간 시전문지 시평겨울호(통권 50)에서 홍은택(영문학) 대진대 교수는 타고르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당초 타고르가 (조선인에게) 준 것은 메모 형식의 6행이며, 뒷부분은 시 기탄잘리 35’에서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동방의 등불이 심각하게 왜곡·편집된 것이라는 요지의 지적이다.

 

홍 교수에 따르면, 교과서에 실렸던 동방의 등불중 처음 4행만이 타고르가 조선인을 위해 써준 메모 형식의 글이며, 5마음엔 두려움이 없고부터는 기탄잘리 35’와 같다는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행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는 원문을 임의로 바꾸기까지 했다는 것. ‘기탄잘리 35’의 마지막 행은 저 자유의 천계(天界)에로, 주여, 이 나라를 깨우쳐 주옵소서이다.

 

홍 교수는 원문에 있지도 않은 코리아를 삽입한 것은 명백한 왜곡이라며 맨 앞의 네 행과 전혀 별개의 시를 한데 붙여 한 편의 시로 짜깁기를 하고 더구나 원문에 없는 코리아를 넣어서 마치 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지은 시인 것처럼 각색을 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또 타고르의 또 다른 시 패자(敗者)의 노래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이 시는 육당 최남선이 타고르에게 청해 원고를 받은 뒤 그가 발행하던 잡지 청춘에 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타고르에게 원고를 청탁한 사람은 진학문이며, 그는 19167월에 타고르를 만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패자의 노래는 타고르의 영문시집 과일 따기에 포함돼 있었으며, 이 시집은 19161월 미국 맥밀런 출판사에서 이미 출간했다는 것. 따라서 알려진 것처럼 새 생활을 갈구하는 조선청년을 위하야타고르가 쓴 시는 아닌 것이다.

 

홍 교수는 타고르와 한국의 접촉은 그가 보낸 두 편의 시와 한국의 강연 방문을 요청 받았으나 병으로 좌절된 것이 전부라며 두 편의 시도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패자의 노래는 진학문의 요청에 의해 이미 출판된 시집에서 한 편을 보내준 것이고, ‘동방의 등불은 강연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메모 형식으로 건네준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2012년 12월 10일 / 문화일보 김영번 기자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The Lamp of the East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192942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되었던 인도의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알고 계신가요?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Tagore, Rabindranath: 1861-1941)1929년 일본을 세 번째 방문했을 때, 당시 이태로(李太魯) 동아일보 토오쿄오 지국장이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응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즉석에서 넉 줄의 시동방의 등불을 써서 건네주었습니다. 영어로 쓴 시의 원문과 주요한(朱耀翰)선생의 번역이 곁들여져 그 해 42일자동아일보1면에 실렸습니다. 타고르의 이 시는 예언자적인 비전과 무한한 격려와 사랑을 담고 있어,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짧게 끝나 아쉬웠던지, 언제부터인가 이 뒤에 기딴자리(Gitanjali)의 제 35번째 시가 덧붙여져서 유포되었습니다.

 

이 시는 타고르가 영국에 항거하는 인도 사람들을 위하여 쓴 시인데, 아마 우리의 처지도 그와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끌어들여진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마음에 두려움 없이 머리를 높이 치켜들 수 있는 곳 / 지식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 / 작은 칸으로 세계가 나누어지지 않은 곳 / 

말씀이 진리의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곳 / 피곤을 모르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 뻗는 곳 / 

이상의 맑은 흐름이 무의미한 관습의 메마른 사막에 꺼져들지 않는 곳 / 님의 인도로 마음과 생각과 행위가 더욱 발전하는 곳 / 

그런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조국이 눈뜨게 하소서, 나의님이시어

 

Gitanjali 35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기딴자'는 타고르의 대표 시집으로 "()에게 바치는 송가(頌歌)"라는 뜻입니다. '동방의 등불' 이라는 시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1901년에 인도에 샨티니케탄이라는 시골에 학교를 세워 인도 근대교육에 체계화하는데 앞장섰다. 인도는 영국 식민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보다 앞서 근대식 교육을 해 왔다. 우리나라 80년대 선보인 대안학교는 이미 100년 전에 등장했다. 바로 대안학교를 만든 이는 타고르이다.

 

그가 교육에 앞장서게 된 것은 그 자신이 공교육에 제대로 적응 하지 못한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년시절 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14살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아이들을 무시하는 교사들의 태도와 거친 학생들 때문에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타고르는 17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거기서도 적응을 못해 단 한 개의 졸업장도 갖지 못했다.

 

학교 교육을 그만둔 타고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특히 타고르에게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은 11살 때 4개월 동안 아버지와 함께한 히말라야 여행이었다. 타고르 부자가 처음 도착한 곳은 샨티니케탄으로 후에 타고르가 학교를 세운 곳으로 현재 비슈바바라티 대학교 등 세계적인 교육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가 첫 여행지로 샨티니케탄을 택한 것은 아들을 위한 미리 계획된 여정이었던 것이다. 타고르 부자는 한 달 후 히말라야에 도착해 3개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여행의 목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소년에게 대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호흡하게 하면서도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대자연을 체험하는 모험여행을 하면서도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맞춰 여행을 진행한 것이다. 타고르가 4개월간의 여행에서 돌아 왔을 때 이전의 타고르가 아니었다. 타고르는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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