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나의 도시 나의 인생] 서울 명동 / 탤런트 최불암

풍월 사선암 2013. 4. 16. 09:48

최불암 어머니, 술에 담가놓은 닭똥집 보여주며 한 말

 

[나의 도시 나의 인생] 서울 명동 / 탤런트 최불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줄었다그런데 난 즐겁다

그 옛날 낭만의 거리에선 공짜 술 얻어먹으면서도 예의와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글로벌 명동에 막걸리를!

 

요즘도 작은 도시의 번화가는 행정명과 상관없이 '명동'이라 불린다. 거기엔 '명동'이란 간판을 건 옷집과 음식점, 구두 가게가 있다. 명동은 새롭고, 특별하고, '모던'한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명동의 원조(元祖), 서울 명동(明洞)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가 바로 연기자 최불암(70)씨다.

 

명동을 걸으며 그가 골목의 '호적'을 짚어줬다. "저 골목은 2층 적산가옥들이 있었고, 그 아래에 좌판을 펼쳐 놓고는 각종 연장을 팔았어요. 저 골목 입구에선 달러상이 있었지. 또 저쪽엔 박윤정 설윤형 트로아조 양장점이 있었어. 이 골목은 옛날에도 장사가 안 됐었는데."

 

그가 태어난 곳은 인천. 인천일보를 경영했던 아버지(최철 건설영화사 대표)1948년 인천지역 최초로 극 영화 '수우(愁雨)'를 제작했지만 개봉을 못 보고 타계했다. 인천 동방극장에서 영화가 개봉한 날, 8살 외아들 영한(최불암의 본명)은 아버지 영정을 들고 영화를 봤다. 극장 지하서 음악다방을 하던 어머니(이명숙·86년 별세)50년대 중반, 부모와 외아들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명동 유네스코 건너편(명동1가 개양빌딩 자리)에 주점 '은성(銀星)'을 열었다. 어머니는 장사하며 명동에 기거했고, 외조부모와 신길동에 살던 영한은 버스를 타고 명동에 나와 생활비를 타갔다. 그게 중앙중 3학년 무렵이다.

 

해방 후, 조선일보 뒤편의 아리스다방·대승다방 등은 일종의 '원고시장'이었다. 원고 넘기고 원고료를 챙긴 문인들은 짝 지어 명동으로 가서, 은성이나 경상도집, 쌍과부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과 인간을 얘기했다. 모나리자·돌체·동방싸롱 같은 다방도 예술가의 사랑방이었다. 외상은 예술가들의 증명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특히 은성을 사랑했다.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는 62717일 한 일간지에 이렇게 썼다. '이 집주인의 너그러운 이해와 미덕 아래 나는 신세를 태산 같이 지고 드나들었다'. 막걸리 찌꺼기를 버렸다고 최불암의 따귀를 갈긴 수주 변영로,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 천재 여류소설가 전혜린, 성악가 임만섭, 모두가 은성과는 각별한 인연이었다. 어머니는 외상장부에 실명 대신 '안경' '키다리' 같은 별명을 적어뒀다. 남의 궁핍을 까발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술집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얕보일까 하는 마음"이 들던 사춘기도 있었지만, 대학생이 된 최불암에게 은성은 선망의 공간이었다. "네 연극 봤는데 너 그거 틀렸더라.", "네가 수사반장이긴 해도, 직접 수갑 채우는 건 하지 말아라.", "사건 해결되고 흰 손수건으로 땀 닦는 장면은 아주 좋더라." 그는 서른 살 톱탤런트가 되어서도 이런 조언을 들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에게 그들의 잔소리는 달았다.

 

"명동을 시대별로 구분하면 해방 후 '감격시대', 문인과 연극인이 이끈 '낭만시대', 큰 은행과 증권사가 들어선 '상업시대', 그리고 요즘 같은 '대중시대'로 나눌 수 있겠지요. 나는 낭만시대에 이 거리에서 자랐지."

 

낭만의 거리엔 '술거지'가 많았다. 미도파 앞 신호등을 보며 돈도, 갈 데도 없는 예술가들은 탄식했다.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김광림 시 '와사등'). 은유로도 뜻이 통하던 시대였다.

 

그 역시 황동규·김기팔·박동규·김지하 등 작가와 어울리며 명동 거리에서 술 얻어먹은 게 여러 번이지만, 최고의 술거지는 시인 천상병과 박봉우였다. "손가락에 꽁초를 낀 천상병 선생이 은성의 한쪽 벽에 기대 ', 서산에 해는 진다'고 읊으면, 손님들이 그에게 막걸리 한 잔을 권해요. 그는 한 번도 앉는 법이 없이 서서 한 잔 마신 뒤 손님과 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가게를 떠나요. 잠시 후엔 다시 박봉우 선생이 들어와 그대로 하고 나가고." 그들은 그렇게 술동냥을 했다. 얻어먹은 술도 취하는 건 같아서, 그들은 모나리자 다방 앞에서 쓰러지기 일쑤였다. "상병아, 일어나라" 하면서 박봉우가 넘어지고, 박봉우를 일으키다 천상병이 넘어지길 반복했다. 술동냥하면서도 절도(節度)와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최불암에게 그 모습은 예술가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처럼 느껴졌다. 없어도 비굴하지 않고, 가질 수 있을 때 자제하는 마음. 연극무대와 TV 양쪽에서 인정받던 그가 매니저 협박을 받으면서도 영화판에 뛰어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난 이걸로 먹고사는데, 거기까지야.'

 

조선시대에 명례방(明禮坊), 일제 때 명치정(明治町), 해방 후 명동(明洞)이라 불려온 이 동네는 사실 사방 1가 채 안 된다(0.91). 그럼에도 여기가 대한민국, 그리고 서울의 '중심'으로 인식되는 건 돈만 흐르는 동네가 아니라, 문화를 담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문화의 거리는 짧았으나 그 울림이 길었지."

 

최불암은 이제 이곳에 막걸리로 다시 한 번 '문화 바람'을 일으켜 보고 싶다. 점잖음을 벗어나 난봉으로 가는 길목에 존재하는 게 풍류라면, 그 풍류의 상징은 막걸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너무 센 술은 먹지 말라"며 양주·청주·막걸리에 며칠 담가놓은 닭똥집을 보여 준 적이 있다. 양주에 담가놓은 건 녹아버렸고, 막걸리 속의 것은 멀쩡했다. 밥이 되고, 시가 되는 술이 막걸리다.

 

"요샌 이 길을 걸어 다녀도 날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고 기뻐하는 신인 탤런트처럼 그가 들뜨기 시작했다. "봐요. 일본인, 중국 사람, 동남아까지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야. 서울 명동이 아니라, 세계의 명동이 된 것 같아. 이런 곳에 문화가 흘러야지.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막걸리였으면 하는데 말이야. 어때, 그게 가능할 것 같수?"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