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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둑의 산실 ‘권갑용 도장’

풍월 사선암 2012. 8. 14. 09:00

한국 바둑의 산실 권갑용 도장

 

이 기쁨을 권갑용 사범님께 가장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달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결승에서 중국의 신예 강자 당이페이 4단을 물리치고 생애 첫 우승(신예기전 제외)을 세계대회 타이틀로 장식한 백홍석 9단이 우승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처음 한 말이다.

 

이럴 경우 길러주신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 혹은 자신이 믿는 신을 먼저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백9단은 스승 권갑용 8(57)을 먼저 찾았다. 9단에게 권8단은 부모 같은 스승이기 때문이다. 9단뿐 아니라 한국바둑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른다.

   

◀자신의 도장에서 딸 권효진 5단과 함께 밝은 얼굴로 포즈를 취한 권갑용 8(오른쪽).

 

현재 한국바둑은 권갑용 도장 천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9년 박승문(6)을 시작으로 지난해 입단한 김성진(초단)에 이르기까지 한국기원 소속 268명 중 46명이 그의 제자다. 6명 중 1명은 그의 제자라는 소리다. 그들의 단위를 모두 합치면 250단이 넘는다.

 

단지 숫자만 많은 게 아니다. 박정환 이세돌 원성진 박영훈 최철한 백홍석 강동윤 조한승 김지석 이창호 등 한국랭킹 톱10 가운데 랭킹 4위 박영훈과 10위 이창호를 빼고 8명이 일명 권도장출신이다. 이중 이세돌 박정환 원성진 최철한 강동윤 백홍석 등 6명이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김지석·이영구·윤준상·윤영선 등 국내 기전 우승자까지 합치면 타이틀 홀더가 10명이다. 우승 횟수는 38회의 이세돌과 14회의 최철한을 비롯해 모두 85(세계대회 22)에 이른다. 한국 바둑계를 권도장 동문들이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권도장의 세력은 한국바둑계에만 뻗치고 있는 게 아니다. 대만의 1인자인 천스위엔(陳詩淵)과 그의 부인 장정핑(張正平)이 권도장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시훈과 김수준도 권도장에서 기력을 닦았다. 이 때문에 권8단은 세계바둑계에서 티칭 프로 1로 꼽힌다.

 

그의 이런 영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형제들이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는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다.

 

바둑을 배우는 데도 스승이 있을 리 없었다. 몇 달 동안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청계천 헌책방에서 바둑책을 사서 읽는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입단한 뒤에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인 1983년에 일찌감치 승부사의 길을 접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학습태도가 불량한 학생은 가차 없이 내쫓아야 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는 용기를 심어주며 자신이 거둬야 했다. 그러니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아내(박옥주·55)의 고생이 없었으면 도장 운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아내가 아이들의 먹고 자고 생활하는 모든 것을 뒷바라지했다. 지금도 집에 아이들이 25명 정도 있는데, 그들을 돌보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아내에게 무조건 미안한 마음뿐이라는 게 옛날을 돌아보는 그의 심정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자 3명을 꼽아 달라고 하자 조심스레 이세돌·최철한·백홍석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는 말부터 했다.

 

이세돌이야 세계1인자이니 당연한 것이고,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늘 밝은 모습으로 바둑공부를 한 최철한이나 몸이 약해 걱정을 많이 한 백홍석이 세계 정상을 정복해 정말 기쁘다고 그는 말했다.

 

안타까움이 큰 제자로는 권오민과 윤혁을 꼽았다. 권오민은 이세돌과 겨룰 만큼의 기재를 타고났지만 사활 문제를 만들고 푸는 데 빠져 스스로 창의력을 죽였고, 윤혁은 최철한의 라이벌이었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제 기량을 다 펴지 못한 것이 그 이유라고 권8단은 전했다.

 

그는 한국바둑이 세계최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프로의 문호를 더욱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 입문의 문턱을 높힌 일본바둑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고, 프로기사를 많이 배출한 중국바둑이 한국바둑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세계바둑이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한··3국의 국제교류전이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하루빨리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8단은 방과후수업 등 바둑꿈나무 교육에는 쓴소리를 토했다. 실력이 한참 부족한 비전문가들이 바둑강사로 나서 바둑 싹을 말라죽게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바둑 교육을 받았는데도 실력이 늘 제자리걸음인 아이에게 어느 부모가 계속 바둑을 교육시키겠느냐는 게 그의 쓴소리다.

 

그는 언제까지 제자를 기를 생각이냐는 질문에는 단호히 평생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딸(권효진 5)이 결혼도 했고 사위(위에량 5)도 프로기사여서 이들에게 도장을 맡기고 슬슬 골프나 치면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선뜻 맡길 수 없었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바둑 영재를 발굴하고 훌륭하게 키워서 한국바둑이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권8단의 각오다.

 

입력: 2012년 06월 11일 / 엄민용 기자

 

"평범한 프로 아닌 일류 기사 꿈 심어줬죠"

 

비씨카드배 깜짝우승 백홍석 키운 권갑용 8

"어려서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 제대로 배우지 못한 풀려

국내 최초로 바둑교실 열었죠"

25년간 프로 기사 46명 배출이세돌·박정환·최철한 등 국내 톱 10 8명이 제자

 

◀"홍석아, 잘 했다.""고맙습니다. 선생님." 올해 비씨카드배 우승자 백홍석과 스승 권갑용 8단이 뜨겁게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지난 16, 백홍석이 제 4회 비씨카드배 결승 4국서 중국의 당이페이를 물리치고 첫 세계타이틀을 따던 날, 백홍석의 스승 권갑용 8(57)에게도 하루 종일 축하 인사가 줄을 이었다.

 

우승 직후 가진 TV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저를 바둑계로 이끌어 주신 권갑용 사범님"이라고 대답하는 백홍석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동안 이세돌최철한을 비롯해 많은 제자들을 세계 챔피언으로 길러낸 명조련사지만 백홍석은 국내외 기전에서 무려 아홉 차례나 준우승에 머물며 마음고생이 심했기에 더욱 가슴이 뿌듯했다.

 

1983년 국내 최초의 바둑교실로 출발해 1987년 프로 지망생을 위한 전문 도장으로 전환한 권갑용바둑도장은 1989년 박승문(6)을 시작으로 지난해 입단한 김성진(초단)에 이르기까지 총 46명의 프로 기사를 배출했다. 2004년 출신 기사 단위 합계가 100단을 돌파했고 2009년에 200단을 넘어서 명실 상부한 국내 최고의 명문 도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0125월 국내 프로 기사 랭킹을 살펴보면 권(갑용)도장이 한국 바둑계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위 이세돌에서부터 2위 박정환, 4위 원성진, 5위 최철한, 6위 김지석, 7위 강동윤, 8위 백홍석, 10위 이영구에 이르기까지 3위 박영훈과 9위 조한승을 제외한 톱 랭커 8명이 모두 권도장 출신이다. 이세돌박정환원성진최철한강동윤백홍석 등 세계 챔피언이 여섯 명이고 김지석이영구윤준상 등 국내 기전 우승자까지 합치면 타이틀 홀더가 열 명이 넘는다.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의 4천왕 체제가 무너진 이후 2000년대 한국 바둑계를 사실상 권도장 출신이 석권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권도장의 성가는 대단하다. 대만의 1인자인 천스위엔 - 장정핑 부부가 모두 권도장 출신이고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시훈김수준도 어린 시절 권도장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다. 딸 권효진과 사위 위에량도 도장 동문이다. 이 밖에 중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유럽호주 등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단기 연수생이 줄을 잇고 있으며 중국 일본의 바둑 도장들이 권도장의 교육 시스팀을 벤치 마킹해서 그대로 따라할 정도다. 다음은 일문일답

 

_단일 도장에서 이처럼 많은 타이틀 보유자를 배출하게 된 비결이 궁금하다.

 

"당시 시대적 배경이 좋았죠. 현재 톱랭커들이 거의 다 1980년대 출생인데 이들이 바둑을 시작할 때가 이창호의 활약으로 국내에 바둑붐이 크게 일었던 시기였죠. 그래서 이세돌을 비롯해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영재들이 무척 많이 발굴됐습니다. 이들이 도장에서 함께 부대끼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다 보니 저절로 모두들 정상급 기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백홍석의 경우 이영구윤준상천스위엔과 같은 또래인데다 이세돌최철한 등 걸출한 선배들에게 많은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_권도장 출신 기사들에게서는 유달리 끈끈한 동문 간의 정이 느껴진다.

 

"일반인은 대개 중고교 동창들이 가장 친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도장에서 숙식을 함께 하기 때문에 도장 동문들이 가장 친한 사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 아이들에게 동문 간에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런저런 모임이나 회식 자리도 자주 마련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도장 출신들보다는 좀 더 강한 일종의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자리 잡게 됐지요. 올 연말께 정식으로 권도장 동문회도 결성됩니다. 그동안 바둑계의 모임이 대부분 입단자 위주로 움직였지만 저희 동문회는 입단 여부를 떠나 모든 동문들이 함께 참여토록 해서 단순한 친목 도모 뿐 아니라 바둑계에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일들을 찾아서 해 나갈 계획입니다."

 

_1983년에 국내 최초로 바둑 교실을 열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일찍이 승부사의 길을 접고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제가 어렵게 프로에 입문했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활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형제들이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헤어졌고 이후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신문팔이부터 구두닦이까지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바둑은 어릴 때 형에게 배웠는데 기재가 있었는지 바둑이 정말 재미있었고 동네에서는 상대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제대로 된 스승이 있을 리 없죠. 몇 달 동안 일을 해서 얼마간 돈이 모이면 바로 청계천 헌 책방으로 달려가 바둑책을 사 보곤 했습니다. 한국기원에서 대국 기록자 일을 맡게 돼 그 수입으로 생활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바둑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그러다 군대 갈 때도 됐고 해서 1975년에 마지막으로 입단 대회나 한 번 나가 보고 다 그만 두려고 했는데 덜컥 입단이 됐지요. 하지만 입단 이후 별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아무래도 어릴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대한 후 이제부터라도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바둑을 잘 가르쳐 보자는 생각으로 바둑 교실을 내게 됐지요. 이후 바둑교실이 너무 많아져서 좀 더 전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바둑 도장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당당히 제 이름 석자를 간판에 내걸었죠. 그 후 아이들과 함께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30년이 다 됐군요. "

 

_그동안 도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죠.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듯,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워낙 바둑이 좋고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가능했지요. 아내(박옥주55)가 고생이 많았습니다. 결혼 후부터 줄곧 아이들 밥 해 주고 빨래에 생활 관리까지 도맡았으니까요. 홍석이만 해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 와서 7년 간 함께 지냈습니다. 지금도 집에 아이들이 25명 정도 있는데 아내에게 무조건 미안하다는 마음뿐 입니다."

 

_평소 대단히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들었다.

 

"아이들에게 좀 엄격한 편입니다. 공부 제대로 안 하고 학습 태도가 불량한 학생은 가차 없이 내쫓은 적도 많지요, 전 아이들이 단순히 프로 기사가 되기보다 일류 기사가 되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방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좀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 약간 무섭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당시 아이들이 모두들 저를 잘 따라 주었고 그 결과 오늘의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요즘 아이들은 참을성이 많이 부족합니다. 학부형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분야든 최고가 되려면 많은 고생을 참고 이겨내야 하는데 요즘은 조금만 힘들면 금방 포기하곤 합니다. 부형들도 한두 번 성적이 나빠지면 바로 도장을 옮기곤 해서 사범들이 소신 있게 교육을 펼치지 못하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최근 한국의 신예들이 중국의 신예들에게 전반적으로 밀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나약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_백홍석이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으로 스승님을 꼽았다. 평소 제자들이 큰 시합에 임할 때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준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백홍석에게는 어떤 얘기를 했나.

 

"당이페이는 큰 시합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승부를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판을 이끌어 나가라고 했습니다. 사실 홍석이도 세계 대회 결승이 처음이고 평소 예민한 성격이어서 너무 긴장해서 컨디션이 흐트러지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것을 잘 극복하고 차분하게 두다 보니 역시 당이페이가 먼저 당황해서 실수를 하고 결국 자멸하더군요."

 

_바둑 도장은 언제까지 계속 할 계획인지.

 

"처음에는 딸 효진이가 결혼도 했고 사위도 프로 기사여서 이들에게 도장을 맡기고 슬슬 골프나 치면서 지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선뜻 맡기기가 걱정이 됐고 그보다 우선 제 자신이 아이들과 지내는 게 너무 좋아서 다시 생각을 바꿨습니다.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열심히 새로운 바둑 영재를 발굴하고 훌륭하게 키워서 한국 바둑이 계속 세계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한국일보 박영철 객원 기자  : 201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