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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야담(溪西野談) - 전설의 국수 유성룡(柳成龍)

풍월 사선암 2012. 7. 7. 08:59

 임진왜란의 국란을 극복한 명재상 유성룡(柳成龍)

 

 

[권경언의 한국바둑사] 전설의 국수 유성룡(柳成龍)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재상이다. 그의 본관은 풍산이며 호는 서애(西厓),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아들이다.

 

유성룡이 관직에 있던 시절 조선왕조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큰 위기에 봉착했다. 안으로는 동서당쟁(東西黨爭), 밖으로는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일본침략이 있었다. 이러한 위급존망의 시기에 서애 유성룡은 국가의 중추적인 직책을 맡아, 어지러운 당파싸움의 정국을 수습하고 공전의 대 전란인 임진왜란에 구국의 대열을 지도했던 것이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서애 유성룡의 바둑실력은 국수급이었다고 한다. 조선초기부터 숙종시대에 이르는 각종 고사를 수록한 이야기책 동패낙송(東稗洛誦)청구야담(靑邱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등에는 유성룡의 바둑실력이 국수급이었고, 그가 어리석은 숙부와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 서애가 휴가를 얻어 고향인 안동 하회(河回)에 잠시 내려와 있을 때였다. 하루는 재 너머에 사는 치숙(痴叔: 바보 숙부)이 찾아와 바둑을 한판 두자고 청하는 것이었다.

 

치숙은 평소 집안에서 바보 취급을 받던 인물인데, 뜻밖에 대국을 청하는지라 서애는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못해 대국에 응했다.

 

한데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바둑실력이 국수급임을 자부하는 서애가 치숙을 당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몰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전판이 몰살당하고 겨우 한쪽 귀퉁이만 사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대승을 거둔 치숙이 껄껄껄 크게 웃으며 자네 재주가 그래도 웬만하네그려. 조선8361주가 모두 병화(兵火)에 짓밟혀도 변방 한쪽에서 다시 나라를 회복하겠구먼.”하고 아리송한 말을 했다.

 

그 말의 뜻은 조선의 361주를 바둑판의 361점에 비유하여, 장차 나라에 일어날 임진왜란을 예언했던 것이다.

 

참패를 당한 서애가 부끄러워하며 다시 한판 두자고 청하자, 치숙은 고개를 흔들며 아닐세. 실은 내가 자네와 바둑을 두려고 온 것이 아니라, 이상한 변괴가 일어날 것 같아 찾아온 것이네. 오늘 밤 자네 집에 웬 중()이 찾아와 하룻밤 유숙을 청할 것이니, 절대 허락지 말고 내 집으로 보내주게.” 하고 신신 당부 한 뒤 돌아갔다.

 

과연 그날 밤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건장한 체격의 중 한사람이 찾아와 유숙을 간청하기에 재 너머 치숙의 집으로 보냈다. 그 중은 서애를 암살하러 온 왜놈의 첩자였으며, 중이 어깨에 메고 다닌 바랑 끈은 조선8도의 지도를 모아서 만든 것이었다.>…

 

그 왜승은 그날 밤 치숙에게 혼이 나서 돌아갔다고 한다. 풍산 유씨 가보(家譜)에 의하면, 서애에게는 숙부가 없으며 치숙은 숙부가 아니라 서애의 형인 유운룡(柳雲龍)이란 설이 있지만 고증할 길이 없다.

 

'현호실거사(賢乎室居士)'란 필명으로 다년간 동아일보 국수전 관전기를 집필한바 있는 안동출신의 해초(海樵) 유진하(柳鎭河) 3단이, '17점을 미리 놓고 두는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 제도는 서애 유성룡대감과 치숙의 대국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바있다.

 

서애 정승과 치숙이 여러 판 대국을 하면서 똑같은 포석을 반복하다보니, 후세사람들이 17점을 으레 그렇게 놓고 두는 것으로 인정하게 되어 순장바둑의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진하 3단의 순장바둑기원설은 아직 논거가 부족하다.

 

삼인석(三印石)의 전설

 

서애의 고향인 하회마을은 안동시에서 서쪽으로 60리 거리에 있다. 낙동강 줄기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져 마을을 안고 휘돌아 흘러가기 때문에 하회(河回) 또는 물돌이동이라고 불렸다.

 

▲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전경

 

하회마을 강 건너에는 부용대가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가 삼인석(三印石)이다. 삼인석이란 조선 선조 때 재상을 지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과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그리고 서애 유성룡 등 세 사람이, 이 바위에서 정승인 끈을 풀어놓고 바둑을 뒀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이들 세 정승은 모두가 퇴계 이황선생의 문인이며 또한 영남출신이다. 노수신이 상주 회경이 고향이고 정탁은 예천 고평 출신이며, 서애 유성룡이 안동 하회 출신이기 때문에 세 정승이 모여 바둑을 두며 친분을 돈독히 했다는 삼인석의 전설은 그럴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