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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묘비文 두 번 써야 했던 서예가의 고백

풍월 사선암 2012. 7. 20. 11:00

이승만 묘비두 번 써야 했던 서예가의 고백

 

14년 만에 묘 찾아온 송천 정하건 선생

'건국' 대통령이라 썼는데 정치권 반발 심해지자 '초대' 대통령으로 재작업

처음 묘비는 묘 옆에 묻었죠언젠가는 '건국'쓰여진묘비 다시 꺼내 세우고파

 

19일 오후 3시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비가 내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 앞에 양복을 차려입은 70대 노인이 섰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묘비 문을 쓴 서예가 송천 정하건(77) 선생이다.

 

이날은 지난 1965년 미국 하와이에서 망명 중이던 이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지 47주년 되는 날. 그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묘'라고 적힌 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작업한 건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묘'였어요. 하지만 당시 정치권의 반발로 급하게 '건국''초대'로 바꿔 세웠죠. 원래 만든 묘비는 바로 옆에 묻혀 있어요. 이제는 그 비석을 꺼내 다시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정 선생은 지난 1998'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이 전 대통령의 묘비문을 썼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이 '건국'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자 급하게 '초대'로 바꿨다. 이를 억울하게 여긴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81) 박사가 "이걸 버릴 수는 없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땅에라도 묻자"고 했다고 한다.

 

"묘비를 쓸 때는 3개월 정도 그분에 대한 공부를 한 다음 쓰기 시작해요. 당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신문이나 책도 많이 읽고, 이화장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그렇게 작업한 묘비가 잘못되니 마음이 안 좋아 이곳을 방문하길 꺼렸습니다."

 

정 선생이 이승만 전 대통령 묘비가 세워진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추모식에 오지 않았던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정 선생은 이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비도 작업해 '대통령의 서예가'라 불린다. 하지만 그는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명문가인 동래 정씨 유교 가문에서 태어난 정 선생은 한학(漢學)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평생 글만 써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비 비문을 쓴 서예가 정하건 선생이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 전 대통령 묘역 앞에서 비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정하건 선생은 1998년 비문을 쓴 뒤 처음으로 이날 묘소를 찾았다.

 

이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90년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서화전'에서 였다. 당시 한국 대표 위인들의 명언을 한국 대표 서예가들이 쓰는 행사였는데, 정 선생이 이 전 대통령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글을 쓴 것이다.

 

이 글을 본 이승만 기념사업회에서 정 선생에게 묘비 글도 부탁했다. 정 선생은 그때부터 작업하며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분을 보고 '친일(親日)'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일본에서 감옥 생활까지 한 사람이더라고요. 그런 분이 일본을 좋아하는 게 말이 되나요? 건국 후 나라의 틀을 잡으려고 '친일파 색출'보다 '공산주의 막기'에 집중한 건데 말이죠. '사심'보다 '대의'를 따른 행동이란 판단을 했습니다"

 

정 선생은 이 전 대통령 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됐다고 했다.

 

"저희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상투를 풀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대통령 부인이 외국인인 것을 안 좋게 생각했어요. '대통령이 외국인과 결혼해 나라의 정기를 빨아먹는다' 뭐 그런 말도 하셨죠. 그런데 자료에 보니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혁명군 집안의 딸로 이 전 대통령의 동지 역할을 해온 거예요. '국모' 대접도 못 받고 떠나셨는데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작업을 한 묘비가 땅에 묻힌 후 그는 이것이 본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딱히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4월 이승만 기념사업회 고문이 된 고교 동창이 "추모식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응하기로 결심했다.

 

정 선생은 고()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서예 선생으로도 유명하다. 1970년대 후반에 7년간 이 전 회장을 가르쳤다. 그는 "매주 화요일 두 시간씩 글을 썼는데 생일날도 안 빠질 정도로 성실했다""한 번은 '회장 같은 분이 왜 글을 배우냐'고 하니 '방명록 같은 곳에 이름 쓸 때 부끄럽지 않게만 쓰고 싶었다'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제가 4·19 유족분들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언젠가 그분들의 마음이 풀리는 날 땅에 묻힌 '건국'이 새겨진 묘비를 다시 꺼내 세우고 싶어요."

 

이혜운 기자 / 입력 : 2012.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