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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장병을 천덕꾸러기 취급… 그게 정부인가

풍월 사선암 2012. 6. 26. 14:23

군의관 출신 "전사한 장병을 천덕꾸러기 취급그게 정부인가"

 

박동혁 병장 전사80일간 돌본 당시 군의관의 분노

"전사 장병(2연평해전때)을 천덕꾸러기 취급그게 정부인가"

나라 지키다 젊은이 죽었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본다고

일본 가서 웃고 손 흔들고이런 나라가 어디있나

종북 국회의원들 보면 내가 낸 세금이 왜 그런 사람들에게 쓰이나 싶어

 

2연평해전이 발발한 이튿날인 2002630일 성남 국군수도병원 응급실.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이었던 이봉기(43) 강원대 심장내과 교수는 의사가 된 이래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을 단 환자를 만났다.

 

() 박동혁 병장. 당시 참수리 고속정의 의무병이었던 박 병장은 연평해전 와중에 부상 장병을 돌보기 위해 총탄이 날아드는 함교 위를 마구 뛰어다녔다. 온몸에 100여개의 파편이 박힌 뒤에야, 그는 쇼크로 쓰러졌다. 상황은 심각했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 내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든 다른 파편은 척추에 박혔다.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벌겋게 익어 있었다. 혈관이 손상된 오른쪽 다리는 새까맣게 죽어, 끝내 사타구니 아래쪽부터 잘라내야 했다. 순환기내과 전공의 이 교수는 박 병장의 혈압을 유지하기 위해 매달렸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는 민간에서 따로 구해다 쓰면서 온갖 방법을 썼지만, 투병 80일 만에 박 병장은 숨을 거뒀다.

 

이 교수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지만, 그에게 제2연평해전은 생생하다. 아니, 그때의 순간들은 그의 삶을 바꿔놓고 있었다. 이 교수는 "당시 전사 장병과 유가족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도) 털끝 하나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0년이 지났다. 2연평해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그전에는 군인들을 보면 '군바리'라고 불렀다.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했을 때 '드디어 군바리가 가고 민주정치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2연평해전 부상자 돌보면서, 희생이 뭔지 배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군인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 정부 관계자가 '우리 선박이 (작전) 통제선을 넘어간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고,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지난 정권 떠올리면 이가 갈리고 분통이 터진다. 당시 죽어간 사람들, 다친 이들이 생각나서. 나 말고도 그 자리에 있던 군의관 모두 그랬다. 지금 종북(從北) 국회의원을 보면 내 세금이 왜 이런 사람들 위해 쓰여야 하나 싶다. 이건 보수·진보 문제가 아니다. 나라 생명이 걸린 문제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건 나라를 지키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종북 인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에 대한 모독을 자주 하더라."

 

당시 국군수도병원에 있던 군의관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우리끼리 일 끝나고 맥주 한잔씩 할 때마다 (2연평해전) 이야기를 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느냐고. 나라 지키다가 젊은 사람들 죽어나갔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 본다고 일본에 가서 웃으며 손 흔들고. 이러면 어느 누가 나라를 지키겠나. 나 같아도 나서서 안 하겠다.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다. 당시 부상장병을 돌봤던 군의관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했었다. ”

 

2002년 월드컵도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나?

 

그렇다. 2연평해전이 묻혀버렸으니까. 효순·미선양 사건(20026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우리 여중생 2명이 숨진 사건) 당시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서운하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하지만 나라 지키다 전사한 장병이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들의 죽음보다 과연 못한가,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나, 그렇게 값어치가 없나 싶더라. 효순·미선양 때 들었던 촛불, 우리 목숨 지키려다 희생한 젊은이들 위해서 들어줬나. 당시 촛불 든 사람들에게 정말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 촛불 다른 곳에서 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론 좋은 뜻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홀대받은 장병 생각나서, 지금도 축구·촛불. 보기 싫다.”

 

◀지난 22일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병원 연구실에서 이봉기 심장내과 교수가 자신의 수필집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를 들어 보이고 있다. 자신의 딸이 태어났던 2002년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며 연평해전 희생자를 돌봤다. /이명원 기자

 

참수리 6용사의 유가족들도 지금까지 정부에 서운한 점이 많더라.

 

정부 인사의 무관심이 서운할 것이다. 사건 당시 전사자 빈소에 일반인들 조문 못하게 막았다. 유족들과 몇몇 군 관계자들만 왔다 갔다. 그건 진짜 아니다. () 조천형 중사 따님은 지금쯤 초등학생 되었을 텐데. 정말 그때 마음 아팠다. 만약 누군가 나라를 지키다 숨졌을 때, 그 자녀의 친구들이 훗날 너희 아버지는 영웅이셨어. 훌륭한 아버지를 둔 거야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유가족들에게 더 나은 혜택들을 보장해준다면 나도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몸을 던질 것 같다. 2연평해전도 그렇게 명예를 드높여 줬다면, 자존감을 높여줬다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가족이 한을 풀지 못하고, 국가 상대로 소송 걸고 그럴까? 당시 정부는 대단히 잘못한 거다. 응당 해줘야 할 것을 안 해준 것이다. 유가족이 홀대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북한이, 간첩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이 나라 젊은이들이 조금씩 그런 생각 먹게 하는 거다. 그래서 결국 안보가 무너지게 하고, 분열되게 하는 것이다.”

 

고 박동혁 병장을 돌보던 경험을 바탕으로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수기를 썼다.

 

수기에 등장하던 딸이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2연평해전 10주기가 다가오면서 딸이 그 수기를 찾아 읽었다. ‘총알이 날아오면 피하고 숨으면 되잖아. 근데 왜 아프게 이렇게 죽게 됐어?’라고 묻더라. 그래서 유진아, 아빠가 80일간 지켜본 오빠(박동혁 병장)는 총탄 포탄이 막 날아다니는데, 다른 죽어가는 친구들 살리려고 막 뛰어다녔어. 되게 용감하게 싸웠대. 왜 그랬을까?’라고 되물었다. 딸이 그 오빠들이 도망갔으면, 나쁜 사람들이 더 넘어와서 우리 총 쏘고 막 죽였을 테니까라더라. 그게 안보 아닌가. 어떤 이들이 최전선에서 희생하고, 지키고 있으니까 우리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안보 아닌가.”

 

조선일보 김형원 기자 : 2012.06.26 

 

 

내 아들아! 너는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니?

 

written by. 이경진(.박동혁병장 어머니)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의무병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육필 수기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기능 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 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9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한국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내정자라고 한 서 동만 교수는 서해교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6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고 미친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가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 분들께,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고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박동혁 병장은 서해교전 당시 의무병으로서 자신은 비무장인 상태에서 부상당한 동료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갑판위에서 동분서주하다 적탄에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202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