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나와 6·25 - 방송인 송해

풍월 사선암 2012. 6. 21. 00:31

[나와 6·25] "폭격·총격 뚫고 가까스로 피란 내려와 통신부대 입대

 

내가 휴전 전보 첫 타전" / 방송인 송해

인민군에 잡힐까봐 피해 다녀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 짧은 인사가 마지막일 줄은

북한서 '전국노래자랑'진행, 출연자와 얘기도 못하게 해희망 품고 갔지만 '절벽'을 봐

   

나는 연백평야로 유명한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끼 많고 노래 부르기 좋아했던 나를 부모님은 1949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보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합창단원으로 평양의 모란봉 극장 무대에 섰다. 솔직히 그때 난 이념이나 분단 등을 잘 몰랐다.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고, 동네는 아수라장이 됐다. 낮에는 쌕쌕이가 폭격을 퍼부었고,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이후에도 밤에는 구월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꽹과리를 치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젊은 청년들은 이들을 피해 다녔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의 또래 30여명이 함께 피란을 다녔다. 며칠씩 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한동안 반복됐다.

 

구사일생으로 혈혈단신 월남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127일쯤이었나. 쌕쌕이가 기승을 부리던 날 우리는 또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대문에 서서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하고 외쳤다. 누이동생이 마루 끝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 서서 "조심하라"고만 하셨다. 예닐곱번 그 짓(피란)을 했으니 어머니도 금방 돌아올 거라 믿었을 게다. 그 짧은 당부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방송인 송해씨가 196·25 전쟁 발발 이후 파란만장했던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송씨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선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거리엔 피란민들이 많았다. 피란민 무리에 중공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쌕쌕이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하얀 눈 위에 시체들이 가득했다. 벌써 이곳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은 경포(輕砲)를 다리에 설치해 놓고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에 맞거나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도 다리에서 떨어졌지만 철근 더미에 매달려 가까스로 살았다. 보름 만에 해주항에 도착했을 땐 우리 일행 30여명 중 6~7명만 남아 있었다.

 

해주항에는 작은 배 하나가 있었다. 우리를 포함한 피란민 30여명이 서둘러 그 배를 타고 연평도까지 갔고, 거기에서 연합군의 LST(상륙함)를 탈 수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 3000여명이 그물을 타고 배에 올랐다. 피란민들이 셔츠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통을 매단 후 바닷물을 길어 올려 밥을 지었다. 배 위에 올라서서 까만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내 이름 복희를 바다 해()로 바꿨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전쟁 종식을 알리다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학교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뒤 육군 통신부대에 배치됐다. 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수신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모스부호를 쳤다. 들어온 암호 머리에 ''자가 붙어 있으면 '보통전보', ''자가 붙어 있으면 '긴급 전보'란 뜻이었다. 새벽에 졸다가 '오보'를 내면 불려가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다. 가족들이 면회 오는 동기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의 부모 형제가 가져다준 누룽지를 얻어먹으며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 전쟁 종식 사실을 가장 먼저 타전한 것은 내 최고의 자랑거리다. 19537월 날아온 암호 머리에 'o'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보는 거라 뭐냐고 물었더니 '휴전 전보'라고 했다. 휴전협정 사실을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이어 전언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 종식을 알릴 수 있었다.

 

38개월 복무를 마치고 1955년 제대하자마자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생에 대한 애착이 없어졌다. 피란 와서 군 생활을 하고, 유랑극단 생활을 하며 늘 앞날을 알 수 없는 떠돌이였다. 살면서 지금까지 3년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그래도 울퉁불퉁한 자갈길 인생을 비틀거리면서도 주욱 걸어왔다.

 

북한 땅을 밟다

 

환갑이 넘은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온 나는 199811월 드디어 북한 땅을 밟게 됐다. 유람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 금강산 장전항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는 것은 금방 허락되지 않았다. 50여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출발했는데, 조선일보 기자와 나는 입국이 거부됐다. 그들은 내가 왜 남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북한 출신 반역자라는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창밖으로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보며 혹시나 잡혀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사흘 만에 금강산 관람이 허락됐다. 만물상 바위를 지나는데 안내원이 "눈을 감고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생각하세요. 눈을 뜨면 그분이 보일 겁니다"라고 했다. 10초간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어머니 얼굴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날 허겁지겁 헤어진 후 꿈에서조차 보지 못했던 어머니 얼굴이 거짓말처럼 그곳에 있었다.

 

2003년에는 평양 모란봉공원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 북쪽에선 전성희, 이쪽에선 내가 공동 사회로 하기로 결정이 됐다. 둘이 무대에 나가야 하는데 서로 얘기도 못하게 했다. 전성희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아바디(아버지), 나는 (고향이) 송화야요"라고 속삭였다. 송화는 내 고향 재령에서 불과 30리 떨어진 곳이다.

 

◀ 지난 2003811일 평양 모란봉공원 야외 무대에서 열린특별기획 평양 노래자랑에서 송해씨가 한 북한 출연자와 함께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북한에 두 번 다녀오면서 깨달았다. 우리 생에서 편안한 남북시대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간 그곳에서 절벽과 낭떠러지를 봤다. 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모든게 제약이었다. 이 모든 비극이 6·25전쟁이 남긴 것이다. 몇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 계획으로 '이것이 6·25'라는 극을 준비했었는데 정부에서 못하게 했다. 남북 해빙 무드인데 분위기를 흐리는 일이라며 못하게 했다.

 

이제 내 나이 여든이 넘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부모님 생각이 더 절실하다. 생사 여부를 몰라 그동안 제사도 못 지냈는데 5년 전부터는 추석 때 부모님 제사를 지낸다. 대학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놈도 한쪽에 같이 올린다.

 

통일되면 고향인 북한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꿈이다. 그날이 죽기 전에 오기는 할까. 요즘 가수 김양의 노래 '우지마라'를 들으면 가사가 딱 내 얘기 같아 눈물이 핑 돈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 정해진 운명이야 팔자라거니."

 

[조선일보 2010-05-20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