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시민운동가에서 서울시장으로… '원순'씨, 官의 안과 밖을 말하다

풍월 사선암 2012. 6. 16. 09:27

[이한우의 聽談(청담)] 시민운동가에서 서울시장으로'원순', 의 안과 밖을 말하다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 7개월난 이제 정치인이다

 

시의회·중앙정부와 아직 어려움 없어 난 행복한 市長고맙기도, 두렵기도

밖에선 뜯어고칠 것 투성이라 생각와보니 우수한 인력들, 정말 열심히 하더라

관료제의 부정적 측면은 개혁해야겠다일본 오사카 하시모토 市長처럼

 

아무래도 덕담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침에 나오면서 와이프에게 '박원순 시장 어때?'라고 물었더니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답하던데요. 알아보니 시 공무원들도 대부분 호의적 평가를 하는 것 같고요." "그런 평가가 고맙지만 두렵기도 하네요. 그런데 지금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보다는 모든 일을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건 상식과 합리성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온갖 종류의 갈등과 분쟁, 대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긍정적 의미를 갖겠지만 그러나 우선 상식과 기본이 자리 잡은 다음에 예민한 논쟁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시장실 한쪽에 종이로 만든원순씨 두상이 눈에 들어와 포즈를 요청하자 박원순 시장은 이건 한 지지자가 당선 기념 선물로 보내주신 것인데 닮기는 했지만 머리숱은 나보다 많지요라며 크게 웃었다. / 이덕훈 기자

 

오늘(16)로 정확히 취임 7개월을 맞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순항(順航) 중이다. 특히 시장에 당선될 당시의 정치지형도와 지금의 지형도는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바뀌어버렸다. 지금의 정치지형도였다면 5% 지지의 박원순 후보가 안철수 교수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당선될 수 있었을까?

 

"지금 보면 야권에서는 박 시장 홀로 행복한 듯합니다. 시의회도 민주통합당이 다수당이고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회는 당을 떠나 역시 시어머니입니다. 시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새누리당 의원들도 만나서 협조를 구합니다. 지금까지는 일하는 데 의회와의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으니 행복한 시장이겠지요."

 

시민운동 할 때 그를 만나면 그냥 '·(박원순 변호사)'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2년 전 '원순씨를 빌려 드립니다'(21세기북스)라는 책을 낸 이후부터는 '·'보다는 '원순씨'가 그의 새로운 호칭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원순씨'가 곳곳에 나온다. 체질적으로 권위주의와 안 맞는 그다운 행보다. 12일 어렵게 짬을 내준 제35대 서울시장 '원순씨'를 만나 시민운동가·소셜디자이너에서 서울시장으로 변신한 7개월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들어와서 보니 서울시 공무원들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

 

늘 시민의 관점에서 관()을 바라보다가 관의 정상에 서게 됐다. 시각의 차이가 있을 텐데.

 

"물론이다. 밖에서 보면 서울시 고쳐야 할 것 참 많았다. 잘못한다고 생각한 것도 많았다. 그러나 들어와서 보니 서울시 공무원들 정말 열심히 하고 있고 기본은 한다고 본다. 인력도 정말 우수하다. 나는 이 같은 안정적인 관료시스템은 적극 존중하고 지원하면서 동시에 관료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개혁해내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그렇게 한다던데 공무원을 적으로 돌리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공무원을 파트너로 삼아 함께 개혁의 전선에 서도록 해야 성공한다고 본다. 현재까지는 공무원들이 잘 따라주는 것 같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시장이어서 좋은 점이 뭔가?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걱정도 있는데.

 

"시민사회와 관료사회가 윈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가 '거버넌스(governance)'. 중앙정부 기업 시민사회 이해관계자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 정책을 실행해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 내가 시행한 정책들은 대부분 관련전문가나 시민사회와 수십번 회의 끝에 추진된 것들이다. 공무원들이 많이 힘들어했지만 이해당사자나 전문가들이 다 만족해하니까 공무원들도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걱정이 있겠지만 그동안 내가 일한 것을 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북한 인권단체에 대한 지원이 삭감됐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나는 뭐든지 이념적인 색깔보다는 실용과 중립을 지키라고 공무원들에게 강조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신당동 가옥, 해병대 본부, 남산 안기부 건물 다 복원하라고 했다. 이런 문제에 이념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시장은 서울 방위협의회 회장을 겸한다. 거기서 일종의 총무 역할이 수방사령관이다. 우리 둘이 너무 친해졌다. 지금은 해양경찰청장으로 나가신 이강덕 전 서울경찰청장과도 아주 가까웠다. 이분들은 서울에 재난이나 테러 등이 발생할 경우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분들이다."

 

조영래 변호사의 일침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

 

경상남도 창녕 산골 소년 '박원순'은 소를 몰면서 책을 읽다가 논두렁에 빠진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에 "공부하느라 못 씻은 것, 못 먹으면서 공부한 것"이라고 했다. 197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원순은 재수를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 때 제적을 당한다.

 

"그때가 서울대가 관악산 자락으로 이사하고 일어난 첫 번째 시위였다. 미팅을 갈까 데모를 나갈까 고민하다가 잠깐 데모하고 미팅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나가봤는데 진압방식이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뛰어나가기는 했는데 곧 쫓기게 되었다. 달리기를 못해서 붙잡혔다. 나는 배후나 핵심도 아니었는데 제적당하고 4개월 감방생활을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역사 공부를 좋아했다. 책도 많이 봤고. 그 길로 계속 갈 생각도 있었다. 당시 일본에 사학자 강동진 교수가 계셨는데 그분 밑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가 되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그때 모았던 역사책들은 뒤에 역사문제연구소에 다 기증했다."

 

1980년 서울대 복학 기회가 있었는데 왜 복학하지 않았나?

 

"내가 서울대에서 잘렸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경찰에서 잡아간 거야 경찰의 역할이니까 그렇다 쳐도 대학은 왜 나를 잘랐나? 내가 무슨 심각한 해교행위를 했다고. 화가 났다. 자를 때는 언제고 왜 다시 오라는 건가? 이런 생각 때문에 안 했다."

 

검사 박원순? 지금은 쉽게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 법원에 나서기 전에 법정 문을 잡고 벌벌 떨던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80년대 박원순은 그냥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80년대 변호사는 명예와 수입이 보장되는 몇 안 되는 직종 중 하나였다. 나 역시 젊은 나이에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고 제법 큰 단독주택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꽤 잘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이 시절에 대해 그는 한 책에서 '일단 좋은 차와 좋은 집을 가지게 되자 더 좋은 차와 집이 눈에 밟혔다.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낳고 갈수록 돈 버는 재미에 빠져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왜?

 

"존경하던 선배 고 조영래 변호사의 일침이 내 가슴을 때렸다. 내가 80년대 인권변론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조 선배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상에 있던 조 선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 가슴 뜨끔했다."

 

199012'박변의 멘토' 조영래 변호사는 세상을 떠났고 박변은 영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돌아와 한국 시민운동의 새 장을 열게 된다. 그 시기를 그는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리니 오히려 세상이 더 풍요로워졌다"고 했다.

 

선거 후유증 "운명이겠거니 한다"

 

돈 잘 벌던 변호사 남편이 돈 안 되는 시민운동 한다고 했을 때 부인의 반응은?

 

"당연히 반대했다. 이런 걸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나. 오랜 설득 끝에 허락은 받았는데 조건을 달았다. 어떤 이유건 가족들의 얼굴이 (언론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거야 뭐 그동안은 잘 지켜왔는데 정치판에 들어오니 더 이상 못 지켰고 우리 애들까지 삶이 아주."

 

가족문제를 둘러싼 후유증은 다 아물었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운명이겠거니 한다."

 

일반 가정부인들이 안 좋아할 만한 길을 20년 정도 걸어왔는데 가정을 잘 유지하는 노하우는 뭔가?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이혼 안 당하고 있느냐고? 하하. 물론 내 나름의 전략이 있지. 처음부터 아내를 절망케 했다. 시민운동 초창기에는 1년에 절반쯤 집에 들어갔나? 그 후 차츰 집에 있을 때는 설거지도 하고. 솔직히 일부러 꽃을 사가려 했다기보다는 행상으로 꽃 파는 분이 날 알아봐주면 미안해서 몇 송이 사서 집에 가져다주고. 작지만 약효가 있는 것들을 끊어지지 않게 해온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일까?"

 

자녀들에게는 무엇을 강조하는 아버지인가?

 

"그럴 시간도 없었지만 공부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그랬고. 우리 부모님은 공부해라 한마디도 안 하셨다. 눈 나빠지니까 일찍 자라는 말씀만 하셨다. 공부,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한다."

 

선거 때 뭐가 가장 힘들었나?

 

"조선일보가 가장 힘들었다(웃음). 농담이다. 우선 정치권은 네거티브 선거를 자제해야 한다. 나는 끝까지 네거티브 안 했다. 나중에 민주당과 결합하면서 대변인 차원에서는 하긴 했지만. 그리고 언론도 확인되기 전까지는 안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우리 아들 문제를 조선일보는 안 썼다. 썼으면 어떻게 됐겠는가?"

 

당면 과제는 과도한 채무, 뉴타운 난립

 

현재 서울시가 당면한 최대 과제는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전임 시장들이 남겨 놓은 것들이다. 당장은 채무문제다. 서울시는 다른 지자체에 비하면 재정자립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많다. 조금 전에도 SH공사 채무문제로 회의를 했는데, 공사의 채무는 기본적으로 본청의 정치적 과도함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본청의 정치적 과도함'은 전임 시장이 지나치게 대선을 염두에 둔 시정을 펼쳤다는 데 대한 비판으로 읽혔다. 그것은 동시에 본인은 정치적 과도함을 자제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원순씨'의 전임 비판은 뉴타운 문제로 향했다.

 

"지난 시장 때 뉴타운을 1300여 군데 지정해 놓았다. 도시 재생은 어느 곳에서나 문제지만 네로가 로마를 불태운 것도 아니고 어떻게 동시에 1300여 군데 뉴타운을 지을 수 있나. 이는 분명 전임 시장과 이를 약속했던 정치인들이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뉴타운은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탐욕과 이권을 선동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겨우 활로를 찾은 것이, 주민들이 합의해서 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지원하고 다수가 못 하겠다고 하면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뉴타운으로 인한 상처가 회복되려면 앞으로 10년은 갈 것이다."

 

지난해 우면산 붕괴가 있었다. 이제 시정의 책임자로서 폭우 대책을 어떻게 세우고 있나.

 

"13일 홍콩 출장을 간 것도 그 문제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박 시장은 인터뷰하던 날 새벽 홍콩에서 돌아왔다). 홍콩은 산사태로 수십명씩 사망하는 재난을 당하고 나서 1977년 산지대책을 전문으로 하는 국()이 생겼고 그 국에서만 600명의 전문가가 일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렇게 가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할 수는 없고 일단 산재방지과를 만들었다. 그전에는 과도 없었다."

 

올여름은 걱정 안 해도 되나?

 

"광화문 지하에 C자 관이 두 개 있다. 물길이 일()자로 바로 가야 하는데 C자로 꺾이니 문제가 생긴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는 바로잡았는데 하나는 아직 못했다. 다행히 세종문화회관 옆에 몇만톤을 저류할 수 있으니 작년만큼 심각한 침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나 100년 만의 폭우가 온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다만 그런 폭우가 와도 광화문 일대 가옥은 침수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 의견이 있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시장의 탈권위주의도 좋지만 역시 부패문제에 대한 우려가 제일 크다. 아직 시장이 부패문제를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너무 세게 강조를 안 해서 그런가? 부패문제는 누가 뭐래도 내가 전문가다. 고건 시장 계실 때 내가 참여연대를 맡고 있었는데 그때 시와 시민단체가 청렴협약을 맺었다. 시민옴부즈맨 제도도 그때 생겼고. 시 공무원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공무원을 절대 신임할 것이되 이를 배신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원스트라이크아웃도 그 일환이다. 서울시가 위탁하고 있는 시설에서 부패나 인권침해가 확인되면 한 번으로 아웃이다. 물론 공무원의 경우 그 즉시 파면이다. 그리고 공무원 징계시효는 2년이다. 문제가 알려질 만하면 시효가 끝나버리니 처벌이 흐지부지된다. 그래서 시효가 지나더라도 부패는 끝까지 인사기록에 따라다니도록 제도를 바꿨다."

 

인사에 대해 많은 사람이 걱정도 하고 궁금해한다.

 

"난 모든 걸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서울시가 얼마나 광대한가? 혼자서 다 챙길 수 없다. 내 원칙은 하나다.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모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산하기관장들 임명 내 소신껏 했다. 주변에서 인사 청탁 엄청났다. 의견은 들었지만 내가 확신이 들지 않는 사람은 쓰지 않았다. 이념으로 인사를 하는 일은 없다. 정명훈씨를 잘 보라. 대체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고급문화는 고급문화대로 최고로 향유하고 대중문화는 또 대중문화답게 최대로 향유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원칙으로 그 문제도 해결한 것이다."

 

돌고래 쇼 금지, 마차 금지 등으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시장이 말하는 동물의 권리는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개념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러면 아예 서울시가 관리하는 동물원도 없애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냐고 지적한다.

 

"그 좋은 동물원을 왜 없애나? 서울대공원은 매년 400만 시민이 찾는 쉼터이자 산교육장이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고민하는 연구와 실천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21세기에 맞는 동물원은 단순히 동물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볼거리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지 말고 인간과 동행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작은 변화이지만 서울시의 품격을 국제적으로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주를 앞둔 서울시 신청사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공정률이 91%까지 왔기 때문에 지금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내가 취임하고서 업무공간 외에는 모두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바꿔왔듯이 신청사도 시민의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오죽했으면 내가 시청이 아니라 시민청이라고 부르자고 했겠나. 이용 방안을 연구 중인데 예를 들면 거기서 시민들의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서울시장, 맘대로 하고 있나 아니면 많이 참고 있나?

 

"(웃으며) 둘 다 하고 있다. 개인 박원순이었다면 참지 않아야 하는 일도 천만 시민의 얼굴이기 때문에 참고 절제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 아니다. 대신 시장으로서 일하는 데 아직까지 특별한 제약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중앙정부나 시민단체들과 협조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안철수 교수에게 도덕적 빚은 있지만"

 

요즘도 안철수 교수와 연락하나.

 

"안 한다. 특별히 만날 일이 없다. 본인은 본인대로 바쁠 테고 나도 지금은 시정에 힘을 쏟느라."

 

그래도 한 인터뷰에서 도울 건 돕겠다고 했던데.

 

"그분이 내 선거에서 큰일을 했으니 나도 사람으로서 도덕적 책무가 있다. 그건 무슨 의리라기보다는 사람의 양심이다. 그러나 시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내가 뭘 도울 수 있겠나. 지원유세를 다닐 것도 아니고. 이번 선거는 나도 관찰자 이상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적으로는 문재인 의원과 더 가까운 것 아닌가?

 

"문 실장이야 사법연수원 동기고 민변 활동도 같이 했고. 뭐 한국 사회가 많이 좁다. 하하."

 

종북 논란은 어떻게 보는가?

 

"북한은 우리 입장에서는 여러 성격을 가진 존재다. 기본적으로는 아직도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않았고 따라서 국가안보적 측면의 고려가 없을 수 없다고 본다. 동시에 진정한 안보와 우리의 경제를 위해서라도 북한은 일정부분 견인해 나가야 할 평화의 파트너인 측면도 있다. 나는 늘 이 두 가지가 잘 균형을 잡고 가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도 북한을 보는 태도에 두 가지 극단적 입장이 있다. 일단 폭력적인 행동이 아니라면 이들도 의사표현할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게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이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하면 철저하게 규제해야 한다.

 

서울광장을 개방한 것도 그런 취지다. 누가 와서 데모를 하건 잠을 자건 독서를 하건 자유다. 단 폭력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정치집회는 가능하면 서울광장에서 하고 광화문광장은 청와대와 가까워 민감하니 문화행사 위주로 유도하도록 광장 운영지침을 주었다."

 

이제 시장 임기가 끝나더라도 시민운동가로 돌아갈 순 없을 것 같다.

 

"쉽지 않겠지. 이미 이미지가. 시민운동은 정말 낮은 곳에서 권력이나 이런 것과는 관계없이 시민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지원 참여를 요청하고 아젠다를 만들어내고 그걸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반면 정치라는 것, 특히 서울시장은 권한이 막강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가 시민운동으로 돌아가는 것, 쉽지 않고 시민들도 순수한 눈으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원순씨'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음을 인정했다. 인권 변호사,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 이사, 희망제작소 이사에 이어 지금은 서울시장으로 정치훈련을 받고 있는 셈이다.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던 '원순씨'가 보여줄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 201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