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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소설가 김유정'

풍월 사선암 2012. 6. 13. 21:06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소설가 김유정'

 

김유정, 한국 소설문학의 기린아 운명 !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하는 그 그림자! 19308월 말. 스물 두 살의 청년은 늑막염이었다. 청년은 유산을 틀어쥐고 앉아 있는 고향의 형에게 치료비와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그때 청년은 둘째 누나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형은 고향에서 술과 난봉질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병석의 동생이 보낸구조 신청을 외면했다. 겨우 몇 푼 보내주는 시늉을 하고서는 입을 씻은 것이다.

 

이 청년이 바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937)이다. 김유정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 수필 12, 편지.일기 6, 번역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는 1935년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의 신춘 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노다지"가 당선됨으로써 문학 지망생들의 부러움을 사며 문단에 나온다.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 "" "만무방" "봄 봄"같은 걸작 단편을 잇달아 내놓아 다시 한 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유정은 1908111일 일제 때의 행정 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유정 일가가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를 한 게 1913년이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 잡기로 탕진하는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친구인 안회남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님은 미인이다"라고 자랑을 했다. 휘문고보를 나와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편지를 보냈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부쳤다. 유정이 기거하던 방안은 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러나 박녹주는 연하의 김유정을 얕잡아본 것인지 그가 보낸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편지 공세가 그치지 않자 하루는 박녹주가 가정부를 시켜 김유정을 불렀다. "당신이 김유정이오" "그렇습니다" "어쩌려고 나에게 그런 편지를 했소" "어쩌려고가 무슨 말이오. 편지를 받아보지 않았소?" 훤칠한 키에 잘생긴 김유정은 스스럼없이 응수했다. 그는 사랑한 뒤에 어쩔 생각이냐는 박녹주의 물음에 "결혼하는 겁니다" 하고 대꾸한다. 박녹주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박녹주의 집에서 물러나온 김유정은 좀처럼 포기를 하지 않고, 노골적인 협박과 호소가 범벅이 된 편지를 다시 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혈서로 된 이런 편지를 받고 박녹주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외출도 되도록 삼가고 더러 밖에 나갈 때는 휘장을 내린 인력거를 타고 남바위를 얼굴까지 푹 내려써서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연희전문 학생과 기생 박녹주 사이의 염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혈서도, 애원도, 협박도 효과가 없어 유정의 짝사랑은 무참히 밟히고 만다. 김유정은 노동자를 상대로 싸구려 밥장사를 하는 둘째 누님 집에 얹혀 살았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안회남이 찾아오면 장기를 두고 속이 출출하면 누님이 웃묵에다 차려놓고 간 밥상을 잡아당겨 둘이 함께 먹었다. 그때 이미 김유정의 병은 깊어갔다. 유정은 집에서는 둘째 누님의 학대와 수모를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광업소에 나간다고 속이고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정씨는 누님에게 걸핏하면 손을댔다. 누님은 그 화풀이를 집안에서 빈둥거리는 유정에게 했던 것이다. "너 취직이라도 좀 해라. 네 누나가 고생하는 게 네 눈엔 안뵈니" 유정은 누님도 밥장사를 하느라 심신이 고달팠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구박을 견뎌냈다.

 

연애도 실패하고 사업도 실패했다. 인생살이가 제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편의 소설을 써냈지만 그것으론 약값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암담했다. 유정은 폐지 위에 "운명!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 하는 그 그림자"라는 글 따위를 끄적이며 탄식을 했다. 그는 혜화동의 누님 집을 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운명이 치질과 폐병을 안고 있는 그의 몸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는 더욱 소설에만 매달렸다.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유정은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유정은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공부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님이 그를 만류했다. 그는 일본행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혜화동 언저리의 허름한 방에서 지내다가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유정은 1931년 고향인 실레마을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유정은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틈틈이 장만한 나무로 야학당을 지어 글 모르는 이들을 가르친다. 이듬해에는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도는데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체험했다. 특히 짚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 속에 술병을 넣어 들고 다니며 농부나 광부에게 술을 파는 "들병이"들을 만난 일은 나중에 그의 창작 생활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1932년 유정은 다시 실레마을로 가서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나선다. 이 무렵은 1920년대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 나로드, 곧 농촌 계몽운동이 조직화 되어 펼쳐지던 시기다. 그도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브 나로드운동 팸플릿을 교재로 썼다. 그는 또 학생들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 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설립했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자 1933년부터는 서울로 와서 조카 형수와 함께 창신동 신당동 효제동 등을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했다.

 

유정은 이 무렵부터 소설쓰기에 본격적으로 매달린다. 19331"산골 나그네"를 끝낸데 이어 8월에는 "총각과 맹꽁이"를 썼다. 유정은 "개벽사"에 다니던 안회남에게 "산골 나그네"를 보내는데 이 작품은 "제일선"에 발표된다. 유정은 밤마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깨어나 소설을 썼다. 서울시청 위생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병명은 폐결핵. 결핵균의 침식에 의해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그는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1933년 발족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더욱 불붙기 시작한다. 그는 구인회의 회지 "시와 소설""두꺼비", "개벽" 3월호에 "금 따는 콩밭", "중앙일보""", "조선일보""만무방", "조광" 12월호에 "봄봄"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 "중외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동시에 당선된다.

 

흔히 한국 단편문학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김유정의 작품들은 카프의 해체등으로 말미암은 문단 전반의 침체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유정의 단편들은 풍자와 아이러니 수법을 사용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검열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다. 아울러 이전 좌익계 소설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재미도 만만치 않아 우리 소설계에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낙비"1930년대 식민지 농촌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기본적인 도덕이나 윤리마저 팽개치는 농민들의 체념적 생존 양식을 희화화하고 있다. 춘호는 노름판에서 돈을 따서 도시로 나갈 자금을 마련할 궁리를 하지만 노름 밑천 2원이 없어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춘호는 어린 아내를 때리며 화풀이를 하고, 이에 견디다 못한 춘호의 아내가 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간다. 춘호의 아내는 쇠돌엄마네 집을 지나치다가 쇠돌엄마네 집으로 들어가는 이주사를 본다. 이주사는 마을의 소문난 부자인데 쇠돌엄마는 이주사 덕에 살림이 폈다. 잠시 밖에서 서성이던 춘호의 아내는 용기를 내어 쇠돌엄마네 집으로 들어간다. 춘호의 아내는 혼자 있던 이주사와 정을 통한 뒤 이튿날 2원을 받기로 한다. 다음날 춘호는 아내가 이주사에게 가는 것을 알면서도, 곱게 차리고 집을 나서는 아내를 들뜬 마음으로 지켜본다. 이처럼 가난과 연관된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는 김유정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낙비"를 비롯한 그의 많은 소설 속에는 남편의 병이나 노름 밑천 빚 생계 때문에 단돈 몇 푼에 몸을 팔거나 술집 작부 또는 들병이로 나서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매춘을 뻔히 알면서도 분노나 죄책감 없이 묵인하는 남편이 수두룩하게나온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작중 인물들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다만 이들의 행태를 유머 아이러니 풍자 해학적 수법으로 그려낸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면에는 늘 짙은 우수가 깔려 있는 게 김유정 소설의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무방"역시 농민들이 가난 때문에 겪는 사건을 담아낸 단편소설이다. 아무리 땀흘려 일해도 결국 "제 살 깎아먹기"가 되기 일쑤이던 1930년대 우리 농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염치없고 막 되어먹은 잡놈의 무리"라는 뜻을 가진 "만무방"같은 뻔뻔함과 천연덕스러움은 유정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도둑질 도박 매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비윤리적인 삶의 형태로 줄곧 나타난다. 또 하나의 걸작 단편 "봄봄"은 지주의 대리격인 마름이 가난과 데릴사위 풍속을 이용해 순진한 농촌 청년을 기만하는 과정을 역시 풍자적 수법으로 녹여낸 작품이다. 주인공 ""는 점순네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 집에서 3년반 동안이나 뼈빠지게 일하지만, 마름인 점순 아버지는 심술궂게도 성혼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일만 부려먹는다. 이런 ""를 보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냐고 점순이가 은근히 부추긴다. ""는 점순의 말에 용기를 내어 그 동안 일해준 대가를 요구하며 점순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벌이는데, 이를 지켜보던 점순이 오히려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며 제 아비의 편을 든다.

   

김유정의 문학은 자신이 속해 있던 모더니즘의 한 기류를 보여줬던 구인회의 도시적 특성과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는 특유의 토속적이고 질퍽한 어휘, 유머와 풍자적 수법 등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를 소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나게 한다. 그가 거둔 이와 같은 문학적 성과는 구인회를 또 다른 각도에서 빛나게 한다. 어찌 보면 유정에게 소설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이미 형 유근이 그 많던 선대의 가산을 거의 다 날린 뒤여서 그에게 돌아올 몫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독립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 암울한 시대 상황, 정신적 고립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기억, 그리고 폐결핵 선고... 소설 쓰기는 이 모든 시름과 고뇌,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구인회 시절에 유정은 삶과 죽음에 걸쳐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상과 만났다. 두 사람은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문학관도 웬만큼 통하는 사이였다. 특히 폐결핵을 같이 앓고 있어서 더욱 가까이 묶인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1936년 가을, 이렇게 은밀하게 찬란한 정사(情死)를 모의하던 두 사람은 그 뒤로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을 버렸다. 1936년 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정릉 언저리의 암자에서 휴양을 했다. 휴양 중에도 글쓰기는 이어져 같은 해 "사해공론""산골 나그네", "여성""옥토끼" "슬픈 이야기", "조광""동백꽃" "야앵"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37년 초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 "조광""따라지" "정분", "여성""땡볕" "총각과 맹꽁이" 등을 내놓지만, 가난 때문에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암자에서 내려온 그는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의 집 등을 전전하며 창작을 하는 한편 돈이 될만한 일거리에 매달렸다. 유정은 경기도 광주에서 과수원을 하는 다섯째 누이의 집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요양 생활을 할 참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극소량의 아편을 썼으나 광주에 내려와서는 그것마저 끊었다. 형편이 아편을 살 수도 없었고, 거기에 중독되면 헤어날 길이 없으리라는 걸 잘알고 있었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병을 위하야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 삼십 마리를 고와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 ,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드렸다.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유정은 친구 안회남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돈이 될만한 탐정소설을 구해 보내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조카가 방으로 들고 온 세수대야를 앞에 놓고 생각했다. 내 몸 속에 지금 고름이 꽉 차 있을텐데 이깟 세수는 해서 무엇을 하나. 그래도 유정은 남은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정은 안회남이 보내온 돈이 될만한 탐정소설을 열심히 번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제 몸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느꼈다. 밤을 새워가며 탐정소설 번역 일을 하는데 유정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곤 했다. 닭 삼십 마리와 살모사 열 마리를 고아먹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병을 떨쳐내고 살기 위해. 한밤중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소리를 질러 조카를 불렀다. 누님을 오게 해 홍문을 보아달라고 했다. 누님이 치질이 악화된 홍문을 들여다 보지만 통증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홍문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 때문에 한잠도 못 자고 비명을 지르며 밤을 새웠다. 가래도 끓고 기침도 잦아졌다. 1937329, 새벽이 오고 있었다. 유정은 그날 새벽 630분 경 길게 숨을 한번 몰아쉬고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을 마지막으로 잘 보겠다는 듯이. 그리고 이내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스물아홉 나이였다.

 

유정의 시신은 화장을 했고, 조카가 한강에 나가 분말로 변한 뼛가루를 뿌렸다. 김유정이 죽고 난 스무날 뒤 멀리 도쿄에 있던 이상(李箱)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