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소설가 전상국의 김유정문학촌

풍월 사선암 2012. 6. 13. 20:31

유정을 마신다, 유정과 걷는다, 유정에 미쳤다

   

◀소설가 전상국이 지난달 30일 강원도 춘천시 옛 김유정역사 앞에서 동백(생강나무꽃)과 김유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춘천/이종근 기자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소설가 전상국의 김유정문학촌

 

김유정역·봄봄막걸리·동백꽃길

마을 전체가 김유정인 곳

10년간 무보수 촌장 역을 맡았다

 

그의 문학은 현재형이었어요

생생한 언어감각, 따뜻한 해학

그를 통해 내 문학도 이어가죠

자꾸 쓰고 싶다는 욕구랄까

 

서울~춘천 고속도로 남춘천 나들목을 빠져나오자 길은 김유정로로 이어졌다. 김유정의 이름 위를 한동안 달리자니 덕만이터널이 나타난다. 김유정의 단편 <총각과 맹꽁이>에서 들병이(떠돌면서 술 파는 여자)를 상대로 수줍게 구애를 했다가 퇴짜를 맞은 어수룩한 노총각 이름이다. 덕만이터널을 지나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기와를 얹은 김유정역이 보인다. 본래 행정구역 이름을 따 신남역이던 것을 2004년 개명했고, 경춘선 철도 노선이 복선전철로 바뀐 201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동네에도 김유정이나 그의 작품 제목을 상호로 삼은 가게며 식당이 여럿 보인다. 이곳에서 파는 막걸리 역시 그의 소설 제목 ·을 이마에 얹고 있다. 머지않아 농협과 우체국 이름 또한 김유정으로 바뀔 예정이란다. 이곳은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1930년대 향토 작가 김유정(1908~1937)의 고향이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저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김유정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

 

안타깝고 흥미로운 낡은 작가의 재발견

전철역에 우체국, 막걸리와 카페 이름까지 김유정으로 시작하고 그의 작품 제목으로 끝나는 곳 실레마을. 그렇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김유정이 아니라 춘천의 소설가 전상국이다. 전쟁이 끝난 몇십 년 뒤에도 여전히 씻기지 않는 상흔을 그린 <아베의 가족>, 그리고 고교 교실을 무대로 권력의 형성과 몰락을 알레고리 수법으로 다룬 <우상의 눈물>의 작가가 그다. 그는 김유정문학촌이 2002년 개관할 때부터 촌장을 맡아 줄곧 문학촌을 지휘해 왔으며 김유정기념사업회장으로서 고향 선배 작가를 기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전상국은 춘천고를 거쳐 경희대 국문과로 진학했다. 소설가 황순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원주와 춘천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경희고에서 가르치는 한편 대학원에 진학해 못다 한 공부를 이어 갔다. 그가 동향 선배 작가 김유정을 만난 것이 대학원 시절이었다.

 

부끄럽지만 80년대 초에 대학원에 가서야 김유정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낡고 가치 없는 작가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지요.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접한 김유정 문학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김유정의 문학은 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재형이었어요.”

 

황순원의 지도로 김유정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가 아는 김유정은 작품과 연구서 속 존재일 따름이었다. 1985년 강원대 교수가 되어 춘천으로 내려와서부터 그는 현실 속 김유정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실레마을에는 <동백꽃> <·> <산골 나그네> 같은 김유정 소설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실제 모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김유정을 기억하는 촌로들도 만났다. 김유정의 마지막 날들을 함께했던 조카들한테서는 귀중한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그는 실레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금병산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등산로를 만들고 봄봄길, 동백꽃길, 금따는콩밭길, 만무방길, 산골나그네길처럼 김유정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춘천시와 강원도 등 지방정부를 상대로 김유정문학촌 조성 등 기념사업을 제안한 것이 이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김유정의 짧은 생애가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로웠어요. 젊은 나이에 가세는 기울고 연애도 실패했는데다가 무엇보다 소중한 건강을 잃은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럼에도 좌절과 실의에 빠지지 않고 글쓰기의 열정과 신명을 이어 가는 한편 고향에서 야학과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한 그 삶이 강한 매력으로 다가왔지요.”

 

논문을 쓰기 위해 꼼꼼히 읽어 본 김유정의 소설 역시 미처 알지 못했던 매력으로 가득했다.

 

김유정은 1930년대에 활동했음에도 지금도 활발히 읽히는 현재형 작가입니다. 김유정의 소설들은 지금도 독자에게 와 닿는 생생한 언어 감각,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연민과 해학으로 감싸 안은 따뜻한 인간미 등으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인간 김유정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의 소설에 대한 존경으로 그는 김유정을 기리는 일이라면 열 일 제쳐놓고 매달렸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김유정에 미쳤다고 했다.

 

제 처부터 왜 김유정의 그늘 속에 들어가 당신을 잃어버리느냐고 할 정돈데,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소명 같은 걸 느낍니다. 후배 작가인 저로서는 김유정을 통해 제 문학의 얼굴이랄까 가치를 되찾는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김유정 생가 옆에 활짝 핀 생강나무꽃을 보며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 대해 설명하는 전상국.(사진 위) 소설 제목 ·을 이름 삼은 막걸리.

 

주민들과 함께 1년의 절반은 축제중

실제로 김유정에 대한 그의 애정은 <유정의 사랑>이라는 두툼한 소설로 빚어져 나오기도 했다. 1993년에 처음 발표한 이 소설은 김유정의 짧은 생애를 평전 형식에 담은 부분과 90년대 현재를 배경으로 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포개 놓은 독특한 형식. 주인공 백진우는 관련 자료를 섭렵하면서 김유정의 연보를 정리하는 한편 김유정과 그의 소설 속 현장을 찾아다닌다.

들판의 딸 하리, 여름 산행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금병산 중턱 조금 후미진 산등성이의 솔밭 속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에서 유부남인 백진우와 학원 강사인 미혼여성 하리는 춘천 일대에서 산행을 함께 하며 사랑을 키워 가는데, 김유정과 그의 소설들은 그 사랑의 매개이자 배경이 된다. 여자는 김유정에 미친 남자를 아예 유정이라 부르며, ‘하리는 자유분방한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꽃 마타리와 발음이 비슷한 여간첩 마타하리를 줄여 부르는 여자의 애칭이다. 유정은 하리에게 동백꽃이 사실은 생강나무꽃을 이르는 이 고장 사람들의 호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의 봉필이 영감 집 자리며 김유정이 꾸렸던 간이학교 금병의숙 자리며를 안내한다.

 

하리에게 유정이라 불리는 백진우는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듯 김유정을 흉내낸다. 김유정이 기생 박녹주와 여학생 박봉자한테 대답 없는 연애편지를 숱하게 보냈던 것처럼 진우 역시 겨울 두 달 동안에 40여 통의 편지를하리에게 보내며 사랑을 압박한다. 그런 진우의 폭주에 부담감을 느낀 하리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잠적하지만, 소설 에필로그는 오랜만에 전화로 연결된 두 사람이 닫혔던 사랑의 문을 다시 열 가능성을 마련해 놓으면서 이렇게 마무리된다. “사랑은 진행형일 때만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에 대한 전상국의 사랑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김유정은 1931년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둔 뒤 고향으로 내려와 2년 동안 머무르면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한편 고향 사람들의 삶의 속살을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그가 1933년부터 죽을 때까지 발표한 소설 서른한 편 중 열두 편이 이곳 을 무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고향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김유정의 그런 애향심과 인간애가 후배 작가로 하여금 김유정을 기리는 일에 올인하도록 부추겼지만, 김유정문학촌으로 대표되는 그 일이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김유정이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지역 주민들에게 그의 존재와 가치를 알려야 했다.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만들며 멀쩡한 역 이름을 바꾸는 데에는 지역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김유정문학촌의 특징과 자랑은 지방정부와 지역 예술단체 및 예술인들,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령 행사가 있을 때 부녀회는 풍물시장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노인회는 청소를 맡으며 자율소방대는 교통정리를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 과정에서 주민들도 향토 작가 김유정에 대한 긍지를 지니게 됩니다.”

 

이런 주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김유정문학촌은 거의 매달 행사를 꾸린다. 김유정의 기일인 329일에 추모제를 여는 것을 필두로 4월에는 김유정문학제, 5월에는 청소년 문학축제 ·’, 7월에는 김유정 문학캠프, 10월에는 김유정 소설로 만나는 1930년대 삶의 체험및 향토 작가와 함께하는 순회 문학강연, 11월에는 생가 지붕에 이엉 엮어 올리기가 이어진다. 특히 김유정이 사랑하던 노란 동백생강나무꽃이 한창일 무렵에 열리는 추모제는 침울하고 애통한 분위기보다는 김유정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확인하고 그 미래를 기약하는 밝고 긍정적인 행사가 되도록 애쓰고 있다.

   

동백꽃 향기에 취하는 열여섯개 길

75주기 추모제 이튿날인 지난달 30일 찾은 문학촌에는 역시 생강나무꽃이 한창이었다.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에서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라 표현되었던 것처럼 매향에 버금가는 진한 향기가 문학촌 안팎을 휘감고 있었다.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이라 쓴 것은 김유정의 무지와 오해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까리 동백아 여지 마라/ 누구를 괴자고 머리에 기름/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만 왜 여는가라는 <강원도아리랑>의 사설, 그리고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라는 가요 <소양강 처녀>2절 노랫말에서 보듯 이 고장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이라 불러 왔다.

 

동백꽃은 문학촌은 물론 옛 김유정역 역사 앞과 실레마을 곳곳, 그리고 금병산 자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평일인데도 문학촌과 실레마을을 찾은 이들이 김유정 문학과 동백꽃의 향기에 취해 마을 곳곳을 걷고 있었다. ‘점순이가 를 꼬시던 동백숲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춘호 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같은 팻말들이 관람객들을 열여섯 개 이야기길로 안내해 주었다.

 

김유정의 친필 원고와 유품이 전혀 없다는 게 큰 약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 무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마을 자체가 매우 소중했습니다. 김유정 문학의 자취를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작품 속 이야기를 만나게 해 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금병산 김유정 등산로나 실레마을 이야기길 같은 게 그런 뜻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죠.”

 

‘<·> <동백꽃>의 점순이 찾기 대회’ ‘토종닭 싸움 대회’ ‘김유정 소설 속편 쓰기’ ‘김유정 소설 퀴즈 골든벨행사들 역시 김유정의 소설을 문학사 속에 가두지 않고 현실로 불러내는 데 이바지한다. 이런 노력 덕에 연평균 35만명 정도가 문학촌을 찾고 있다. 지난달 27~28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한국문학관협회 총회에서 김유정문학촌이 제1회 최우수 문학관으로 선정된 사실은 김유정문학촌의 성공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러나 김유정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전상국 촌장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7월에는 강촌역에서 김유정역까지 경춘선 옛 철로를 활용하는 레일바이크가 개통될 예정입니다. 그러면 연간 100만명 이상이 문학촌을 찾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에 대비해서 저희는 옛 김유정역 앞에 기관차 한 량과 객차 두 량을 가져다 놓고 김유정 카페와 경춘선 박물관 등으로 쓸 겁니다. 1938년에 지어진 옛 김유정역사에는 잡지 박물관을 꾸리려 합니다.”

 

이와 함께 최근 매입한 문학촌 앞 부지 6000평을 어떻게 꾸밀지가 요즘 전상국 촌장의 가장 큰 관심사다. “지금의 협소한 전시실을 대체할 새 전시관과 정보관, 세미나실, 헌책방, 그리고 50년대 영화관과 주막집, 민속놀이 공간 등으로 30년대에서 70년대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생각입니다.”

 

무보수 촌장 자리임에도 그는 일주일이면 서너 번을 문학관으로 출근한다. 주말에는 거의 매여 있다시피 한다. 문학촌에는 해설사가 세 명 있지만, 특별히 그의 설명을 기대하는 방문객들도 많기 때문이다.

 

지금 제 나이의 절반도 되기 전에 요절한 청년 김유정을 기리는 일이 저에게는 문학적 초심을 지켜 주는 구실도 합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는 게 보상이라면 보상이 아닐까요?”

 

한겨레신문 / 등록 : 2012.04.06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