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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스민 "학력위조 논란 때 남편 없어 다행…"

풍월 사선암 2012. 6. 10. 07:50

이자스민 "학력위조 논란 때 남편 없어 다행"

 

[사람 속으로] 첫 귀화인 국회의원 이자스민

처음엔 정치 제안 거절했어요, 자신 없어서 오바마 당선 보며 마음 바꿨죠

 

◀19대 국회 개원 직후 인터뷰 스케줄이 30개나 잡혔다는 이자스민 의원. 귀화인 출신 의원에 대한 관심과 기대에 벌써부터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도전은 아름답다’. 이 상투적인 말을 쓸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이자스민(35). 필리핀 이주여성인 그는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귀화인 국회의원이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그가 정치인을 꿈꾼 이유는 분명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며느리이자 엄마이기에, 다문화라는 말에 깔린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학력위조 논란,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이슈에 휩싸였지만 국회의원 이자스민은 담담했고 또 당당했다. 어쩌면 이미 또 다른 꿈을 키워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개원 직후 30여 개 인터뷰가 줄줄이 잡혔다는 그를 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만났다.

 

국회 의원회관 363. 5일 오후 그의 사무실은 문이 열린 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채 풀지 못한 박스들이 쌓여 있었고, 수시로 인부들이 오갔다. 이 의원도 집무실 책상 앞에서 뭔가 연신 정리 중인 듯싶었다. 아직 무선 인터넷도 못 쓴다면서 슬며시 웃는 표정엔 설렘이 묻어났다. 집무실을 둘러보다 문 옆의 작은 책상과 의자가 눈에 띄었다. 기다린 듯 이 의원이 답했다 국회 인턴이 오면 가깝게 일해 보려고요. 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도 기회를 주고요.” 의정 청사진만큼은 정리가 끝나 보였다. 

 

국회의원으로 첫 주를 보낸 소감은요.

 

사람들이 다 똑같이 물어요. 금배지 단 느낌이 어떠냐고. 그런데 저는 3월 말부터 당 회의에도 참가했고, 41일 총선 지원 유세 때부터 부산·제주도·대구·인천까지 돌았어요. 선거 끝나고는 보좌진 꾸리려고 바로 사람들을 만났고요. 그래서인지 벌써 2개월 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달라진 건 사무실과 보좌진이 있다는 거죠. 항상 혼자서 계획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같은 고민을 함께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죠.”

 

여당 의원, 정치 성향은 맞는 건가요.

 

저한테는 다문화·이주민을 이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고, 또 기회를 준 게 새누리당이죠. 그러니까 성향이 맞느냐 안 맞느냐는 문제가 덜 돼요. 전에 어떤 의원이 그러데요. 자기도 왜 하필이면 그 당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고요. 그래서 답하길 다른 당에서는 제안을 못 받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 전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하고라도 일하겠다고 했대요. 저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럼 이번 총선에서 야권의 러브콜이 없었나요.

 

다들 당연히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소수계층 문제는 야권이 주로 다루니까요. 하지만 전혀 없었어요. 제가 타진한 적도 없고.”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08년부터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와 인연을 맺으면서다. 당시 연구소에서는 ‘2010년 첫 이주여성 정치인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한국 생활 경험이나 능력을 따졌을 때 그가 적임자였다. 그는 필리핀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인 남편을 만나 1995년 결혼을 했고, 98년에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2005러브인아시아(이주여성 대상 교양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로 활동 반경을 넓히다, 프로그램에서 만난 이들과 봉사단체 물방울나눔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엔 프로젝트 참가를 거절했다. 정치인이 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마음을 바꿨다. 2010년 지방선거를 준비했다. 공천을 앞두고 이력서를 주요 정당에 보냈다. 언론에선 그가 한나라당 광역 비례대표로 선발될 것이라는 보도도 내보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후보 리스트에 빠져 있었다.

 

2년 전 한 번 실패한 뒤라 당선이 더 기쁘지 않나요.

 

그 부분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시 후보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기자들이 저한테 물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신문에선 리스트에 올랐다 마지막 순간에 탈락했다고 나오더라고요. 사실상 그때 제가 거절을 했었죠.”

 

왜요.

 

준비가 안 됐어요. 저 자신을 보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그랬죠. 하지만 만약이라도 다시 기회가 온다면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럼 이제 준비가 됐나요.

 

원래 저는 다문화 관련 일만 했었죠(그는 서울시 외국인생활지원과에서 외국인 공무원 1로 일했다). 그런데 국회에 온 뒤에 보니 국회의원은 전체 국민을 다 안을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하더라고요. 계속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4년 동안 다문화 대표로서, 또 전체 국민의 대표로서 각각 할 일이 뭐죠.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다문화=외국인이라고 생각하죠. 다문화 사회에서 한국 사람을 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전 인식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누가 저보고 지금하고 한국에 처음 온 17년 전하고 언제가 더 나으냐고 하면 전 옛날이 좋아요. 그땐 동네에 외국인이 저 하나였고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했죠. 음식점에서 반찬 하나라도 더 주고요. 그런데 지금은 이주여성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요. 가령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말 대신 다문화죠?’라고 해요. 어떻게 보면 숫자가 많아지면서 겁을 내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뭔가 문제를 일으킬까봐요. 특히 라디오나 신문에서 안 좋은 기사가 나오면 인식이 더 나빠지죠. 제가 공무원·교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자신도 몰랐던 편견을 돌아봐 달라는 거죠.”

 

그는 인식 개선이라는 게 10~20년이 걸릴 일이라 4년이 정말 길지가 않다고 했고, 이를위해 단단한 디딤돌 역할을 맡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상임위 신청부터 주변 예상과 달리 문방위(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1지망으로 했다.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엔 방송이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질적 지원책이 필요할 텐데요.

 

인식이 개선되면 복지나 교육도 다 좋아지게 마련이에요. 제가 아무래도 경험자이다 보니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만들고 싶죠. 예를 들면 전국에 200개가 넘는 다문화가정 지원센터가 있어요. 그런데 지원을 받는 사람은 만날 같아요. 예산은 예산대로 나가고 꼭 도와줘야 할 사람들은 받지 못해요. 그런 점부터 보완해야 해요. 다문화정책 포럼을 하나 만들 생각이에요. 생각은 많은데 구체적인 입법은이제 1주일도 안 됐잖아요(웃음).”

 

그런데 정치의 매력이 뭘까요.

 

저는 일부러 정치를 하려던 게 아니라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하나예요. 아이들 때문이죠. 정말 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0.1%라도 낫다면 엄마로서 뭘 못하겠어요.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 내가 꼭 정치를 해야 한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똑같이 물어본다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정치 입문이 순탄할 리 없었다. 제노포비아 이슈까지 이어진 학력 논란이 있었다. 이전까지 그의 학력은 필리핀 명문 의대 중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비례대표 후보로 등록하면서 그는 학력란에 아테네요 생물학과 중퇴로 기입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의 학력위조 논란이 급속히 퍼졌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필리핀은 우리와 의대 과정이 다르다. 자연대를 졸업하고 메디컬 스쿨 입학 자격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의대로 진학한다. 내가 나온 아테네요 생물학과 졸업생의 경우 메디컬 스쿨 시험의 합격률은 100%”라는 것. 그는 사실대로 얘기했지만 언론에선 이런 설명 없이 생물학과=의예과라고 뭉뚱그렸다. 그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미인대회 논란도 마찬가지다. 그가 인터뷰에서 “(지역)미인대회 출신이라고 말했던 게 언론에서는 미스 필리핀 출신으로 와전됐다는 것이다.

 

학력위조 논란이 일었을 때 왜 바로 해명을 안 했나요.

 

사실 해명할 필요도 크게 못 느꼈어요. 외국 같은 경우 학제가 다른 거잖아요. 그런데 도저히 무슨 설명을 해야 하는 건지. 사실 논란이 생기니까 무섭다기보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그랬어요. 한국만 알고 의대는 한국 의대만 안다는 게. 이런 뉴스가 외국으로 나가면 외국에선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이슈를 만든다고 한국을 이상하게 바라볼까 봐 걱정이 되는 거예요.”

 

가족들이 뭐라던가요.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니까 시동생이 장난 삼아 그러데요. 형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아마 형이 있었으면 가만 안 놔뒀을 거야, 발 벗고 나서서 일일이 해명 댓글 다 달고 형수가 아니라 형이 기자회견 했을 거야라고요.”

 

이 의원의 남편 이동호씨는 2010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이 피서차 강원도 영월 계곡으로 놀러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물에 빠진 어린 딸을 구하려다 급류에 휩쓸렸다. 장례를 치르고 한참을 이 의원은 음식도 먹지 못한 채 방 안에 박혀 숨어 지냈다. 남편, 아니 인생의 버팀목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몸무게가 10kg 넘게 줄었다.

 

남편은 방송 출연, 번역, 강연 등등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언제나 힘이 돼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도 남편과 수다를 떨면 어느새 풀어졌고, 힘이 들어도 당신, 잘하고 있어하는 소리만 들으면 힘이 났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한국정책연구소의 김은주 소장은 얼마 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치인 만들기) 프로젝트가 성공해서 좋기는 한데 걱정이야. 안 좋은 소리 이겨내지 못할까 봐.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말해라. 남편만큼은 못하겠지만.”

 

요즘 남편 분이 더 생각나지 않나요.

 

당선을 저보다 더 좋아했겠죠. 집에 들어갈 때마다 생각이 나요. 저희는 대화하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하다 못해 드라마 보고 밤 11시쯤 포장마차에 가서 한잔씩 했죠. 주인이 오죽하면 한 이불 덮고 사는 사람들이 뭐 이렇게 할 말이 많으냐고 했어요. 제가 누구 때문에 화났다고 말하면 맞아, 그 사람 이상하다하고 맞장구쳐주는 사람. 내가 재밌는 얘기 들으면 집에 가서 말해주고 싶은 사람, 이젠 그런 사람이 없네요. 얘기를 하면 풀릴 일들이 계속 안으로 쌓여요.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큰 위로가 됐는데 말이죠.”

 

그래도 슬픔을 잘 넘기셨어요.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아마 필리핀 사람들의 장점 중 하나겠죠. 얼마 전 남편의 사촌동생 부부가 필리핀 선교사로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그러데요. 필리핀에서는 마음이 편안했다고. 그런데 한국에 다시 오니 조급해지고 걱정이 아닌 상황에도 걱정을 하게 된다고요. 필리핀 사람들이 굉장히 긍정적이죠.”

 

진짜 한국 사람 다 됐구나 싶을 때는요.

 

엄마랑 통화할 때요. 제가 계속 얘기를 하는데 어느 순간 엄마는 조용하신 거예요. 제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어를 하고 있었던 거죠. 저도 모르게. 엄마한테 왜 그럼 아무 말도 안 했어물어보면 누구 딴 사람이랑 말하는 줄 알았대요. 그리고 가끔 필리핀에선 이럴 때 어떻게 해요?’라는 질문을 받죠. 그럼 한참 생각해요. 이게 필리핀 방식인지 한국 방식인지. 제가 한국생활 18년차니까 인생의 반을 여기서 살았으니 그럴 만해요.”

 

그런데 정말 한국말을 잘하세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연세어학당 한국어 강습비가 3개월에 2500달러였어요. 우리 남편 월급이 월 120만원인데. 그래서 혼자 신문 보고 드라마 보고 그랬어요. 드라마는 말과 행동이 같이 나오니까 상황별로 말을 배울 수 있죠. 이병헌씨 나오는 아스팔트 사나이가 가장 처음에 본 드라마여서 그때부터 이병헌씨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리고 집안 식구들이 많은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엄마처럼 아이들도 3개 국어를 하나요.

 

아뇨. 제가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어렸을 때부터 필리핀 말을 가르칠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죠. 그래서 단어 하나만 배우면 바로 아이들한테 써 먹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문제집 사서 같이 공부하고요. 한국어 실력을 함께 늘려갔죠. 영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직접 가르쳤어요. ‘손 올라가는 걸참느라 스트레스 엄청 받았죠(웃음).”

 

한국 아줌마로서 애들 키우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처음에 입학시킬 때 한국 엄마들 따라가지 말아야겠다 했어요. 너무 경쟁을 시키니까. 초등학교 내내 학원도 안 보냈어요. 그래도 학교에 가서 엄마들끼리 모이면 귀가 솔깃해지긴 해요. 이번에 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좀 전략이 생겼어요. 지망 학교를 놓고 아이와 다퉜죠. 저랑 아이가 희망하는 학교가 다른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합의가 안 되니까 제가 그랬죠. ‘네 생각이 있으니 엄마가 포기할게. 그런데 엄마가 너 믿는 거 알지?’ 결국 아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학교를 썼더라고요. 선택권과 책임감을 넘기니까 더 잘하더라고요. 지금도 학원 가는 걸 그렇게 정해요. 제가 믿고 맡긴다고 하니까 자기가 스스로 설계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쉬운 걸 왜 괜히 속을 끓였나 몰라요.”

 

2년 전엔 자스민은 한국인이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어요. 이제 자스민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나요.

 

제가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요. 얼마 전에 굉장히 마음에 와 닿던, 마음을 움직였던 일이 있었어요. 다문화 시상식에 갔었는데 수상자인 베트남 여성이 그러세요. “언니(처음 봤는데도), 우리를 위해 일하려면 건강을 꼭 챙겨야 해요.” 또 한 분 수상자 중에 수녀님이 계셨는데 제 손을 꼭 잡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아유, 희망이 보인다그러셨어요. 그 말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죠. 정말 잘해야겠구나 싶고. ‘언니는 우리 희망이다’ ‘언니처럼 되고 싶다이런 말을 4년 뒤에도 똑같이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영화 완득이엄마 이자스민

 

아들과 처음 여행하는 장면

제 남편 사고 난 영월서 찍었죠

눈물 계속 쏟아져 어렵게 촬영

   

◀영화 완득이에 출연한 이자스민(왼쪽 둘째).

 

이자스민 의원의 도전은 정치만이 아니었다. 배우로도 활약했다. 2010년 영화 의형제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지난해 영화 완득이에선 완득이 엄마로 출연했다. 열일곱에 한국의 난쟁이에게 시집 온 동남아 출신 여성. 남편과 아들을 떠나 식당 일을 하며 살아가는 캐릭터였다. 그는 대본에 따라 더 검게, 더 늙게 분장한 자신을 거울로 비춰 보며 불쑥 물었다. “당신 그렇게 오래 식당 일을 했으면 돈도 좀 모았을 텐데 옷이랑 신발이 이게 뭐야? 그렇게 아들이 보고 싶었으면서 왜 다시 찾지 못한 거야?” 이후 영화 속 캐릭터는 수정됐다. 7회 촬영이 13회까지로 늘었다. 원작에도 없는 내용이 추가됐다. 아들에게 라면만 먹인 남편에게 소리 높여 화를 내는 장면도 그중 하나다.

 

전문 배우가 아닌데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았나요.

 

“‘러브인아시아를 하면서 많은 이주여성을 만났죠. 완득이 엄마처럼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사람들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배역에 녹아들 수 있었죠.”

 

촬영 중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사람들이 가장 감동적으로 여기는 부분이 터미널 장면이에요. 엄마와 아들이 같이 앉아있는. 그거 어디서 촬영했는지 아세요? 영월이었어요. 제 남편이 사고가 났던 곳. 로케이션이 거기인 줄 촬영 1주일 전에 알았죠. 제게는 가슴 아픈 장소죠. 특히 버스를 탄 장면에서 굉장히 오래 찍었어요. 아들이랑 여행 가는 분위기로 표정이 밝아야 하는데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강이 보이니까 계속 눈물이 났어요. 촬영이 자꾸 중단되고 다시 분장 고치고. 그래서 영화에 클로즈업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멀리서 찍은 것만 나와요.”

 

[중앙일보]입력 201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