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말기 일본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1865.6.29 삿조동맹 추진, 막부체제의 종식과 근대 일본의 토대를 마련하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로 유명한 막부 말기 일본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그는 격변기 짧은 기간의 치열한 활약을 통해, 일본이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재탄생 하는 길을 여는데 기여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널리 추앙 받기도 한다.
도쿠가와막부에 적의를 품고 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
1865년 6월 29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사쓰마(薩摩)번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만나, 조슈(長州)번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쓰마번이 명의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사이고가 승낙하자 료마는 나가사키의 가메야마샤추(__山社中. 료마가 주도해 세운 일종의 무역, 해운회사)에 구매 주선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조슈번의 이토 __스케(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 유신 전까지의 이름)가 나가사키에서 8월 중순 영국 상인 토머스 B. 글로버에게 총기 7,300정을 9만2,400량에 매입했다.
이즈음 료마는 사이고의 의뢰로 야마구치를 방문해 군량미 조달을 요청해 조슈번이 500섬을 공급키로 합의했다. 12월 초에는 사쓰마번이 야마구치에 사자를 보내 군량미 지원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했다. 군함은 10월 18일 역시 글로버에게 3만7,500량에 매입했다. 군함 매입비는 조슈번이 지불하고 명의는 사쓰마번으로 하며 운영은 샤추가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듬해 1866년 1월 21일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한 끝에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 이른바 삿조(薩長)동맹이 이루어졌다.
이 동맹이 료마의 큰 업적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료마가 처음부터 사쓰마번의 지시에 따라 동맹을 추진했다는 설도 있어 그의 기여도를 두고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1864년 조슈번이 후원하는 존왕파 사무라이들이 교토로 진격했지만 막부 연합군에 패했다. 이후 조슈번은 든든한 재정을 바탕으로 군사력 근대화에 주력했고, 료마가 주선한 사쓰마번과의 동맹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사쓰마번도 조슈번과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막부에 적의를 품고 있었다. 삿조동맹은 일종의 상호방위조약, 즉 막부가 어느 한 쪽을 공격하면 서로 지원하는 동맹이자 사실상 막부 타도 동맹이기도 했다.
번과 막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꿈꾸다.
사카모토 료마는 오늘날 일본 시코쿠 고치(高知)현 고치시, 당시의 도사(土佐)번 고치성에서 태어났다. 조닌(町人)이었다가 최하급 무사 신분 고시(鄕士)를 획득한 집안이었다. 12살 때 쿠스야마쥬쿠(塾)에 들어갔지만 친구와 심하게 다투어 함께 퇴학당하고 14살 때 히네노벤지의 도장에 들어가 오구리(小栗)류의 검술과 유술을 익혔다.
료마가 어린 시절 선생님도 포기한 지진아였다는 이야기는 그를 대기만성형 인물로 부각시키려는 허구라는 설이 있다. 1
853년 에도로 가서 호쿠신이토(北辰一刀)류 검술을 배웠고 같은 해 말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서 공부한 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와 화가이자 유학자 가와다 쇼류에게 서양 사정에 관해 배우고, 1856년 다시 에도로 가서 검술을 익힌 뒤 1858년에 돌아왔다. 에도로 유학 다녀올 수 있었다는 것은 집안 재력이 든든했다는 뜻이다.
1861년에는 다케치 즈이잔이 주도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실천하기 위해 결성된 도사 근왕당(勤王黨)에 가담했지만, 번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다케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1862년 말 료마는 막부 관리 가쓰 가이슈와 만나 크게 감화 받아 문하생이 되었다.
◀간사한 관리들을 물리쳐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며 막부타도를 강력히 주장한 료마
가쓰는 막부가 건조한 증기선 지휘관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근대적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양이(攘夷)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 준 것도 가쓰였고, 료마는 사이고의 배려로 사쓰마번의 보호를 받으며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가메야마샤추를 결성했다. 료마의 생각은 번과 막부 차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향하고 있었다.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 막부 타도의 뜻과 포부
“이 모든 일은 간사한 관리가 외국인과 내통해서 벌어졌습니다. 간사한 관리들이 기세가 등등하고 수도 많지만, 저는 다이묘 두세 명과 굳게 약속하여 동지를 모으고 에도의 동지, 하타모토(쇼군의 직속 가신), 그밖에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합쳐 간사한 관리들을 물리쳐 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 보통 사람처럼 쉽사리 죽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죽는 날은 천하에 큰일이 일어나 살아 있어도 쓸모가 없고, 사라져도 상관없는 때가 될 것입니다. 도사(土佐)의 시골뜨기도 뭐도 아닌 얼치기로 태어나 한 사람 힘으로 천하를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고 더욱 몸을 낮춰 개펄 속 재첩처럼 늘 코를 땅바닥에 붙이고 모래를 머리에 덮어쓰고 있으니, 부디 안심하십시오.”
료마가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1863년 조슈번은 조정과 막부의 양이(攘夷) 방침에 따라 미국 상선을 포격했지만 군함의 포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개항해야 했다. 그런데 막부는 조슈번의 포격으로 손상된 군함을 에도에서 수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료마는 막부가 사실상 외국 함대의 조슈번 공격을 도와 외국과 내통했다고 보았다. 편지의 ‘간사한 관리’란 그렇게 내통한 관리를 뜻한다. 막부에 대한 비판적 인식, ‘일본을 세탁해야 한다’는 결의, 천하를 움직이겠다는 포부, 그러면서도 때를 기다리는 처세 등을 엿볼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과 새로운 일본의 탄생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는 료마
1866년 여름 막부는 조슈번을 공격했다. 사쓰마번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조슈번은 막부군을 참패시켰다. 료마는 가메야마샤추의 배로 조슈번을 지원했다.
료마는 1866년 이 때부터 대정봉환(大政奉還), 즉 막부가 정권을 일왕 조정에 반환하는 것에 관한 구상을 내놓고 1867년 2월 하순부터 도사번의 참정(參政) 고토 쇼지로를 설득했다. 고토는 도사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를 설득하여 료마의 대정봉환론이 도사번의 공식 입장이 됐다.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상하 의정국을 설치하여 의원을 두며, 외국과의 교류를 위해 널리 공의(公議)를 취하는 것”이 골자였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막부 무력 타도에 주안점을 둔 데 비해, 료마와 도사번은 무력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평화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1867년 10월 3일 도사번은 대정봉환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했고 료마는 10월 10일 막신 나가이 나오무네에게 건의를 수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1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성에서 번주 회의를 소집하자 료마는 고토 쇼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만일 당신 한 사람의 실책으로 이 절대적인 호기를 놓친다면 그 죄는 천하가 용서치 못할 것”이라며 대정봉환에 전력을 다해줄 것을 촉구했다. 결국 10월 14일 대정봉환이 최종 결정됐다. 료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제도와 강령의 작성에 들어갔다.
1867년 12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군대가 교토를 장악했고, 이듬해 1868년 1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촉구에 따라 메이지 일왕은 왕정복고를 공식 선포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왕정복고와 막부폐지에 반발해 저항했지만 교토에서 대패하고 에도로 후퇴한 뒤, 1868년 4월 막부군 사령관 가쓰 가이슈가 에도를 포기했다. 260여 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체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근대 일본의 길을 연'국민적 영웅
1867년 12월 10일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오우미야(近江屋) 2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료마는 오우미야 종업원이라 생각하여 방심하고 있었다. 료마는 머리에 칼을 맞아 사망하고 나가오카는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 당시 나이 31세. 괴한들의 정체는 막부의 별동대 신센구미(新選組)라는 설과 막부가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결성한 미마와리구미(見廻組)라는 설이 있다. 어느 경우든 막부 상층부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료마는 1864년 7월에도 교토의 데라다야(寺田屋)에서 신센구미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이에 따라 그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가 검술의 달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불분명하며(그는 권총을 선호했다), 허풍이 심한 성격이라는 주위 사람의 증언이 있고, 유달리 돈을 밝혔다는 평가도 있으며 엽색 행각도 심한 편이었다. 삿초 동맹, 가메야마샤추 설립, 대정봉환을 비롯한 정국 구상 등을 전적으로 료마의 독창적인 업적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료마가 지속적으로 접촉한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글로버 상회는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영국의 자딘 매디슨 상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글로버의 직함도 ‘매디슨 상회 나가사키 대리인’이었다. 료마가 당대의 유력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당시 일본 최대의 서양 무기 구매창구인 글로버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심지어 료마가 사실상 ‘서양 무기상의 세일즈맨’ 구실을 한 셈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굳은 의지와 비전, 유연하고 열린 사고, 다양한 입장의 세력들을 오가며 타협하고 중재하는 능력 등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격변의 시기 몇 년 간의 활동을 통해 일본 역사에 지워질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 글 표정훈 / 출판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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