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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대통령, 그는 누구인가?

풍월 사선암 2012. 1. 14. 12:45

룰라대통령, 그는 누구인가?

 

1. 개 요

 

브라질 35대 대통령 룰라 다실바(Luiz Inácio Lula da Silva)1945106일에 태어났으나 호적상으로는 19451027일생으로 되어있다. 노동자당의 설립멤버인 그는 3번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2002년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206년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브라질 역사상 그의 통치는 논란이 많았으나 유명했다. Bolsa Família and Fome Zero과 같은 사회개혁 프로그램은 그의 목표였고 그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지구온난화와 같은 국제문제에서 탁월한 역할을 했고 국가간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야망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타임지에 의하여 2010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중 한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 어린 시절

 

룰라는 19451027Caetés에서 태어났다. 부모 8형제 중 일곱 번째이었다. 태어난 지 2주에 Santos로 이사했다. 그가 7세였던 195212월 그이 어머니는 São Paulo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트럭을 타고 13일 후에 Guarujá에 도착했다.

 

룰라는 두 번 결혼했다. 1969년에 Maria de Lourdes와 결혼했으나 1971년에 병으로 죽었다. 당시 그녀는 임신을 했었는데 아이 역시 죽었다. 1974년 룰라는 현부인인 Marisa와 결혼했는데 당시 Marisa는 과부였다.

 

3. 교육과 직업

 

룰라는 정규교육을 받은 바가 거의 없다. 10세가 될 때까지 읽는 것조차 배우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대 가족을 돕기 위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잡았다. 12세 때 구부닦이와 거리 판매를 했다. 14세 때 처음으로 정식 직업을 잡았는데 구리가공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

 

열 살 때 사고로 왼손 손가락을 잃었다. 손가락을 잃은 후 치료를 받기 까지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이일로 그는 노동조합참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쯤 그는 조합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여러 중요 포스트에 올라있었다 브라질 군부정부와 노동조합간의 충돌로 룰라는 죄로 기울어져 갔다.

 

4. 노조조합경력

 

그의 형 Frei Chico의 권유로 룰라는 Indústrias Villaresd서 일할 때 노동운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계급도 서서히 올라갔다. 1975년에는 São Bernardo do Campo Diadema

 

금속노조합장이 되었고 1978년에 재선되었다. 1970년대 말 브라질이 군사통치하에 있을 때 룰라는 주요 파업을 포함한 조합 활동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위법으로 판명되어 1개월 징역을 살았다.

   

5. 정치경력

 

1980210일 룰라를 포함한 교수, 지식인 및 조합리더들이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 (PT))이라는 좌파정당을 결성하였다.

 

1982년 법적 이름에 룰라라는 닉네임이 붙여졌고 1983년에 노동조합, Central Única dos Trabalhadores (CUT)의 창립을 도왔다. 1984년 룰라와 PT는 차기 대통령 직선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대통령은 하원 등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운동의 결과로 29년 만에 1989년에 처음으로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6. 선거

 

룰라와 São Paulo시장, José Serra2004년에 만났다. 룰라는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세라를 이겼다. 룰라는 1982년 처음으로 상파울로 주정부에서 일하게 되었으나 곧 퇴직하였다. 룰라는 1986년에 의석을 얻었다. 노동자당은 군사정권후의 헌법에 노동자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을 삽입하는데 주력하였고 농업개혁을 조항 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룰라는 1989년 국회의원 신분으로 1960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민주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룰라와 브리졸라(Brizola)는 모두 대중인기가 있어 두 사람 중 하나가 당선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룰라는 가장 좌파적이었는데 즉시 토지개혁과 대외채무 지급유예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사인 Fernando Collor de Mello는 친기업구호로 브라질의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과 그는 룰라를 물리쳤다. 그러나 192년 공금유용의 혐의로 탄핵위협을 받고 사퇴하였다.

 

룰라는 1990년 국회의원 재선을 고사하고 노동자당의 당력을 전국적으로 확장하는데 힘을 기우렸다. 1990년대에 통화안정계획이 효과를 보아 심한 인플레가 진정되었다. 룰라는 전재무장관 Fernando Henrique Cardoso(브라질 사회민주당)에게 194년과 1998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전 덥수룩한 수염과 체게바라 티셔츠의 사나이인 노조지도자로 알려져 있었다. 2002년 선거캠페인에서는 옷 입는 스타일과 외채지급유예에 대하여 관점을 바꾸기로 하였다. 외채지급유예선언으로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지 않을 가를 경제학자, 기업인 은행인 들이 걱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컨설탄트의 권고로 보다 친기업적인 이미지로 바꾸었다. 20021027일 룰라는 상대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7. 대통령직 수행

 

2007년 룰라는 재선에 성공했고 당초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 급진적인 사회변혁 보다는 새로운 퇴직연금, 조세, 노동, 사법제도와 대학개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개혁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노동자당원 일부는 중도적 입장에 찬성을 보내지 않고 있다. 2007년 인터뷔에서 3선이 가능하도록 하는 헌법 개정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8. 사회계획

 

룰라는 Diadema 연설에서 주택보조금과 Bolsa Família 신용과 같은 사회보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계획을 선거캠페인중이나 당선된 후에나 그의 구호 상위에 올려놓고 있다.

   

브라질의 가장 큰 보조 프로그램은 Bolsa Família인데 이는 학교출석을 조건으로 하는 학비보조(Bolsa Escola) 프로그램으로 캄비나스 시의 시장이었던 José Roberto Magalhães Teixeira에 의하여 처음 소개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지자체와 주가 유사한 프로그램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후에 Fernando Henrique Cardoso 대통령이 2001년에 연방정부가 채택하도록 하였다. 2003년 룰라는 Bolsa Escola에 음식 및 개스를 추가로 보조하는 Bolsa Família 프로그램을 완성하였다. 이 국내에서는 선거용이라는 내부 비판이 있지만 그 성과는 국제적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Fome Zero(굶주림 제로) 프로그램은 굶주림과 극빈을 구제하는 계획이다.

 

Fome Zero Bolsa Família과 함께 PAC(Growth Acceleration Program)은 룰라 정부의 핵심 계획이다. PAC의 예산은 2010년 현재 646십억 레알(미화 353십억 달러)이며 룰라정부의 주요 투자 프로그램이다. 이 계획의 목표는 브라질 인프라를 강화하여 민간부문을 자극시키고 보다 많은 잡을 창출하는 데 있다.

 

9. 경제

 

룰라의 치하에서 브라질은 세계에서 8번째 거대 경제가 되었고 2천만이상의 인구가 가난을 벋어났다. 리오데 자네이로는 남미에서는 처음으로 2016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2010년 워싱튼 포스트는 “2002년 선거에서 룰라가 힘을 얻어 급진적 조치를 할 것을 걱정하여 브라질 내에 투기가 성행했었다. 이로 인하여 시장은 교란되었고 부라질화 레알의 평가절하가 크게 일어났었고 2000년 보다 리스크 커졌다.” 고 보도했다.

 

그의 첫 번째 임기 초 룰라는 Antonio Palocci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트로츠키를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룰라는 브라질사회민주당의 Henrique Meirelles를 중앙은행총재로 임명했는데 그는 시장지향형 경제가였다. 그는 BankBoston 행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룰라는 2001년 아르헨티나의 지급유예 선언시 서명하였던 IMF와의 모든 협정을 연장하였다. 초기 2년 동안에 룰라정부는 IMF가 협정에서 요구한 만족할만한 예산흑자를 시현하였다. 2005년 후반기에 룰라정부는 IMF 빚을 모두 청산하였다. 선거후 3년간 룰라는 더디지만 확고히 시장신뢰를 얻었다. 국가위험지수는 약 250 포인트가 내려갔다. 룰라정부는 인프레 목표를 정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

 

2006년 초 재무장관 Palocci는 권력 남용혐의로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룰라는 PT의 멤버이고 경제학자인 Guido Mantega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Guido Mantega는 전에 말크시스트였는데 브라질 경제사상사를 써서 박사를 딴 사람이다. 그는 고금리를 비판하고 안정적인 은행금리를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브라질 금리는 세계에서 높은 수준에 있다.

 

룰라는 그의 두 번째 임기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Growth Acceleration Program ( Programa de Aceleração de Crescimento)을 수립했는데 브라질 경제가 급작이 팽창하지 않도록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투자 계획이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도로 및 철도를 새로 놓고 개축하며 조세를 단순화하고 세금을 내리며 후일 부족을 염려하여 에너지 생산을 현대화하는 것이 포함되어있다. 4년에 걸쳐 이 프로그램에 투입하기로 한 자금은 5천만 레알(미화 24백만 달러)로 추정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룰라는 사유화정책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방 철도에 공공-기업 파트너십을 도입하였다.

 

브라질은 이머징 경제 중 가장 큰 외채국가이었으나 20081월에 처음으로 순채권국이 되었다. 2008년 중반 핏치와 S&P는 브자질을 투자가능등급으로 조정하였다. 은행들도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10. 외교정책

   

2008BRICs(Brazil, Russia, India, China)의 리더는 룰라, 메드베데프, 씽 및 후진타오이다. 200632일 에코노미스트에 의하면 룰라는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펴고 있고 자신을 이념가가 아닌 중재자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배네주엘라의 차베스와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과도 친교를 맺고 있다.

 

브라질은 남미와 미국 간의 대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콜럼비아간 충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룰라정부하에서 브라질의 대외무역은 극적으로 증가하여 2003년 이래 적자를 흑자로 바꿔놓았다. 200429십억 달러의 흑자를 시현하였다. 브라질은 유엔에 평화군을 파견하고 있으며 아이티에서 평화임무를 리드하고 있다.

   

2008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에콰돌간 긴장 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 80여국 이상을 방문하였다. 룰라의 목표는 유엔안전보장이사화에서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었다.

 

11. 맺는 말

 

이제 까지 좌파의 영웅 룰라대통령을 살펴보았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수학이 공식적 교육의 전부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을까가 신기하다. 룰라는 좌파이나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대통령 전에는 체게바라를 존경하는 좌파적인 인물이었으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중도성향으로 전향하였다는 점을 우리나라 좌파인사들은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좌파에 룰라 같은 출중한 인물이 출현하기를 바란다.

 

박수칠때 떠난다룰라 브라질 대통령 오늘 아름다운 퇴장

 

'민주주의의 롤모델' '엘리트를 넘어선 노동자 대통령' 남미독립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도, 아르헨티나 빈민의 어머니로 불렸던 '에비타' 에바 페론도 그만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진심을 보여준 정치인과, 정치인의 진심을 믿고 따른 국민. 8년간 그가 이끈 브라질에는 우파와 좌파의 경계도, 노동자와 부유층의 대립도 없었다.

 

모두를 위한 정치,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비웃음을 샀지만 그가 만들어낸 브라질의 오늘은 민주주의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레임덕'이라는 용어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31(현지시간) 퇴임을 앞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에 대한 전세계의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브라질 여론조사기관 센수스가 룰라 대통령의 퇴임을 사흘 앞둔 29일 발표한 여론 조사 결과 룰라 대통령의 개인 지지율은 87%를 기록했다.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83.4%, 2003년 정부 출범 이래 최고치를 나타냈다. 룰라 대통령은 국영 라디오의 주례 담화 '대통령과의 커피 한잔'의 고별방송에서 "지난 8년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지해 준 국민에게 감사한다."고 밝히고 눈물을 흘렸다.

 

2003년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브라질은 300억 달러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빚더미를 안고 있었다. "엘리트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선반공 출신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그의 외침은 공허했고, 오히려 그의 노동자 성향이 브라질 사회의 대립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가 우세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구두닦이, 금속공장 노동자를 전전하던 강성 노동운동가의 대통령 당선은 노동자 계급이 일으킨 '깜짝 반란'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꿨다. 룰라 정부는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물류시설 확충, 에너지 개발 확대 등을 담은 경제성장촉진(PAC) 프로그램을 실시해 8년간 연평균 7.5%의 실질성장률을 기록했다. '빈곤 퇴치 프로그램'2900만명을 '먹을 고민'에서 구출했고, 중산층은 3000만명 이상 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경제와 정치 모두에서 미국 중심의 구도에 맞서 '할 말은 하는' 지도자로 평가되며 G7 시대를 다자외교 시대로 바꾼 주역으로 평가된다.

 

룰라 대통령의 성공에는 '실용' '포용' '상생' '스킨십' '협상' 등 다섯 가지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정책엔 좌도, 우도 없었다. '강한 추진력'을 제외한 모든 신념을, 실질적인 결과를 위해서는 과감히 버렸다.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노동운동 현장에서 40년 가까이 대립하던 대기업과 기존 정치 세력의 힘을 적극 활용했다. 10여개의 정당을 규합해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기업인들도 적극 영입했다.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면서 브라질 경제를 지배하는 농축산 기업들에 대해서도 지원책을 펼쳐 상생을 모색했다.

 

8년간 이어진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심장에서 우러나는 정치'를 내세운 스킨십의 결과다. 8년간 670일가량을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보내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고, 현장에서는 경호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국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노동운동가 출신 특유의 협상력이 중요한 무기로 쓰였다고 평가한다. 모든 정치 활동을 협상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당 간 대립, 기업인과 노동자의 대립, 국제사회의 역학 구도에서 룰라는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온건하게 목소리를 내며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90%에 가까운 국민의 성원 속에 시민으로 돌아가는 룰라 대통령의 향후 행보도 관심거리다. 그는 대선 재출마(3) 가능성에 대해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면서 "대통령직 복귀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로이터통신 등 일부 외신들은 그가 브라질 국내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유엔 사무총장 등 국제사회의 요직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룰라가 일궈낸 브라질은 이제 그의 정치적 양녀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로 이어진다. 호세프 신임 대통령은 'PAC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룰라 대통령의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취임 이전이지만 그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70%에 육박하는 이유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