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우리음악

세상을 바꾼 노래 심수봉 '그때 그사람'

풍월 사선암 2011. 12. 31. 11:17

 

세상을 바꾼 노래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심수봉 그때 그 사람’ (1978)

그때대중은 새로운 트로트를 만났고, ‘그 사람은 대중적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그녀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났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뇌신경 인프레라는 병을 얻어 무의도에서 요양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실향민 어머니와 함께 인천 지역에서 자라며 피아노와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배웠다. 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음악 실력이 알려져 외부활동을 시작했으며, 비록 무산되긴 했으나 나훈아의 주선으로 음반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그러던 1978, 여대생 심민경은 제2회 대학가요제 본선 무대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게 된다. 그때 부른 노래가 그때 그 사람이고, 그가 갖게 될 예명이 심수봉이다.

 

그때 그 사람은 통속가요의 큰 축인 트로트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 시대에는 주류였으나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하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발표 무대가 대학가요제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생경했을 것이다. 젊고 새로운 음악의 장에서 젊은 작곡가 겸 가수가 부르는 기성음악은 낯섦 속의 익숙함, 바로 그래서 낯섦이었다. 그날 상을 받진 못했으나 그때 그 사람은 이듬해 MBCTBC의 가요순위를 석권해버린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기묘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재즈와 로큰롤을 두루 경험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트로트의 전형으로 보긴 힘들다. 그런데 흑인의 설움과 재즈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한 심수봉을 통과하면서 서양음악은 서민의 음악인 트로트와 접점을 만들어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트로트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은 편이고 왜색가요로 비하되기도 한다. 동시에 트로트를 전통가요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그냥 그렇게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전통가요라는 분류에 트로트를 포함시킬 수는 있어도 전통가요트로트공식을 인정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아주 많다.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의 엔카와 깊은 관계라는 것이 정설인데, 역으로 엔카의 본류가 한국에 있다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다. 1930년대 초에 일본 엔카의 교과서를 쓰기 시작한 작곡가이자 일본 대중음악의 오늘이 있게 한 음악가인 고가 마사오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훗날 자신의 음악이 조선 민중의 음악과 정서에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원류를 따지는, 그다지 의미가 크지 않은 논쟁의 근거보다는 더 큰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탐구를 벗어나 현재의 관점으로 돌아와서 볼 때에 그때 그 사람은 당대 대중의 정서를 담아내던 장르에 보다 세련된 음악적 장치를 더함으로써 트로트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은 선반이었다. 그리고, 인천항에서 이별하고 슬퍼하는 지인들을 보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만든 것처럼, 본인부터가 아픔을 겪어온 심수봉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줄 노래를 하나 둘 길어 올리기 시작한다.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모르는 이가 없는 스타가 되고, 적지 않은 명곡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심수봉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던 공백기가 긴 편이다. 그럼에도 그의 자리가 특별하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성인가요 가수들과 구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신이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남다른 음악철학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었다. 흔치 않은 트로트 싱어-송라이터였고, 음악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여성 음악인이었으며, 그래서 아티스트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대중가수였다. 이 모든 것이 피아노 앞에 앉아 그때 그 사람을 부르던 날에 시작되었다. ‘그때대중은 새로운 트로트를 만났고, ‘그 사람은 대중적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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