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우리음악

세상을 바꾼 노래 '임을위한 행진곡'

풍월 사선암 2011. 12. 31. 11:42

 

세상을 바꾼 노래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임을 위한 행진곡' (1982)

묘지로부터 거리로 퍼져나간 민중의 노래

 

*노래가 수록된 앨범의 표기를 준용하여 본문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님을 위한 행진곡을 각각 구분해 썼음을 미리 알립니다.

 

오늘 세상을 바꾼 노래로 호명될 곡은 특별하다. 하나는 세상을 바꾼 노래를 말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이들과 함께 한) 노래라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곡명 앞에 특정 음악인의 이름이 붙지 않는다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다. 아울러 세포분열을 하듯 계속하여 여러 이름을 앞에 달고 다양한 모습으로 번져나갔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쓰려 한다.

 

사람들이 모여 부르는 노래는 많다. 하지만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노래는 많지 않다. 묘지와 거리에서 불린 노래가 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란 남녀가 광주에 있었다. 둘은 가까웠고 들불야학을 함께 한 사이다. 대학을 다니다 노동현장으로 간 여인이 먼저 세상을 등졌고, 남자는 19805월에 광주에서 시민군이 되어 싸우다 국군에 의하여 전사했다. 그리고 겨울에 노래 하나가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 혹은 노래굿 넋풀이-빛의 결혼식을 위해서였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이 노랫말로 바꾸고, 1979년 대학가요제에 영랑과 강진으로 참가해 은상을 받은 적도 있는 김종률이 곡을 썼다. 촛불의 눈물이 된 모든 이들을 위한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이다.

 

사료 상 최초의 녹음은 테이프 [넋풀이-빛의 결혼식](1982)으로, 광주에서 문화예술로 운동에 참여했던 연행예술운동패 사람들이 불렀다. 하지만 어떤 가수와 음반을 통하여 보급되었다기보다는 구전과 악보를 통하여 퍼져나간, 말 그대로 민중가요였다. 군사정권은 이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잡혀가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불렀고 시나브로 거리의 노래가 되었다. 지금도 진보단체와 진보정당의 집회와 기념식은 국민의례가 아니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민중의례로 시작한다. 2010년 광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방아타령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삭제하려 했던 자들은 이 역사성과 상징성을 무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많이 낯이 익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얼굴은 결의에 찬 투쟁가이다. 노래패 꽃다지가 그렇게 노래했고, 바로 이 버전이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201111월에 꽃다지는 10년 만에 새 음반 [노래의 꿈]을 발표했다). 다른 편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처럼 비장하고 아름답게 불러 음반에 실은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세상이 좋아지자(?) 영화 [화려한 휴가]에 삽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실은 2000년대에 들어 전혀 다른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난 임을 위한 행진곡들이 많다. 2002 월드컵 응원앨범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펑크 밴드 버닝 햅번이 느닷없이 방방 뛰는 펑크 송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치기라고 생각해버리면 오해이다. 그들은 꽤 괜찮은 펑크 뮤지션들이니까. , 2006년에는 음반 [아가미]에 하림이 민중성을 흥으로 해석하여 유럽 민속음악 풍으로 만들었고, 정재일이 새롭게 편곡해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담겼다. 특히 처연함을 자아내는 한대수의 걸걸한 음성과 장엄한 합창이 인상적인 버전이다. 518기념재단이 제작한 음반 [5월의 노래](2006)에선 허클베리 핀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격렬한 록으로 재탄생시킨 적이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변주되던 곡을 원작자인 김종률이 2008년에 음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발표하여 곡이 지닌 본래의 아름다움을 확인시키게 된다.

 

밤섬해적단의 [서울불바다](2010)에 실린 ‘386’에서도 전혀 다른 의도로 쓰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잠깐 들을 수 있다. 이 밴드의 보컬 겸 베이스로 활동하는 장성건은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폐허로 발표한 세 번째 앨범 [맞불](2011)에도 실은 바 있다. 2007년에 데모로 제작되었던 이 앨범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진지하고 음산하며 구슬픈 블랙메탈로 변신했다. 이렇게 임을 위한 행진곡도 여러 가지 색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삶의 질과 복지수준, 언론자유처럼 좋은 지표들은 하위권인 대신에 자살률과 산업재해, 노동시간과 빈부격차, 교육비 지출과 교육(입시노동)시간, 불평등 수준처럼 나쁜 쪽으로는 죄다 최상위를 자랑하는 선진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거나하게 취해 술자리에서 청춘의 추억을 떠올리며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전히 묘지와 거리에서 불리고 있다. 지금도 거기에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 - 김종률

5.18 광주항쟁, 민주화 운동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김종률’ [님을 위한 행진곡] 8-90년대민주화 운동은 물론 각종 시민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운동단체의 집회를 시작하는 민중의례의 일부로써 널리 불렸던 님을 위한 ..

 


<임을위한 행진곡 - 서영은>

<임을위한 행진곡 - 최도은>

<임을위한 행진곡 - 박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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